100:0.1 힘찬 종교 생활의 체험은 평범한 개인을 하나의 이상주의의 힘을 가진 인격자로 변화시킨다. 종교는 각 사람의 진보를 촉진함으로 모든 사람의 진보를 도우며, 모든 사람의 성취를 통해서 각자는 더욱 진보한다.
100:0.2 다른 신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은 서로의 영적 성장을 자극한다. 사랑은 종교적 성장이 일어나는 토양―주관적 욕구의 만족이 아니라 객관적 매력―을 제공하지만, 그래도 사랑은 최고의 주관적 만족감을 낳는다. 종교는 일상 생활의 평범한 고역(苦役)을 귀중한 일로 만든다.
100:1.1 종교는 의미의 성장과 가치 기준의 향상을 낳지만, 순전히 개인적인 평가가 절대적인 것의 수준으로 높아질 때 반드시 해악이 생긴다. 어린아이는 쾌락의 내용에 따라서 체험을 평가한다. 사람의 성숙도는 개인의 쾌락 대신에 더 고상한 의미를 찾는 정도, 아니 다양해진 생활 상황과 우주 관계에서 최고의 개념에 충성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높아진다.
100:1.2 어떤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성장할 수 없고, 따라서 영적으로 고정되는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다. 다른 시대에, 연속되는 문화에서, 그리고 진보하는 문명의 지나가는 단계에서, 의미의 성장을 위하여 준비가 있어야 한다. 성장을 억제하는 주요한 요소는 편견과 무지(無知)이다.
100:1.3 모든 성장하는 어린아이에게 자신의 종교적 체험이 자랄 기회를 주어라. 이미 만들어진 어른의 체험을 아이에게 떠맡기지 말라. 기존 교육 체제를 통해서 해가 갈수록 조금씩 진보하는 것은, 영적 성장은커녕 반드시 지적 진보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어휘가 늘어난다고 인품이 성장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단순히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진보가 성장을 참되게 가리킨다. 이상을 높이는 것, 가치 기준을 더욱 이해하는 것, 가치 기준의 새로운 의미, 그리고 최상의 가치 기준에 더욱 충성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의 성장을 가리킨다.
100:1.4 아이들은 오직 어른 동료들이 충실해야 영구하게 감명을 받는다. 교훈이나 본보기조차 오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충실한 사람은 성장하는 사람이요, 성장은 감명을 주고 영감을 일으키는 현실이다. 오늘을 충성스럽게 살라―자라라―그러면 내일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올챙이가 가장 빨리 개구리가 되는 길은 순간마다 올챙이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100:1.5 종교적 성장에 필수인 토양의 전제 조건은 자아를 실현하는 진취적 생활, 타고난 성향의 조정, 호기심을 따르고 적당한 모험을 즐기는 것, 만족한 느낌을 맛보는 것, 정신 차리고 깨어 있도록 자극하는 두려움의 작용, 놀라움의 매력, 그리고 자신이 보잘것 없음을 정상으로 의식하는 것, 즉 겸손이다. 성장은 또한 자아의 발견과 그에 따른 자기 비평―양심―에 의존하며, 이는 양심이 참말로 사람이 자신의 가치 기준과 습관, 개인의 이상에 따라서 스스로를 비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00:1.6 종교적 체험은 몸의 건강, 물려받은 기질, 사회적 환경에 두드러지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 현세의 조건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헌신하는 내면의 영적 진보를 막지 않는다. 성장하고 자아를 실현하고 싶은 어떤 타고난 욕구가 모든 정상 필사자에게 있으며, 이것은 특별히 억제되지 않으면 작용한다. 영적 성장 잠재성을 가진 구성 자질을 기르는 확실한 기법은 최상의 가치 기준에 마음을 다하여 헌신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100:1.7 사람은 종교를 주거나 받거나, 빌리거나 배우거나 잃어버릴 수 없다. 종교는 최종의 가치를 더욱 추구하는 데 비례하여 성장하는 개인적 체험이다. 따라서 우주적 견지에서 성장은 의미가 쌓이고 가치 기준이 늘 높아지는 것을 돕는다. 그러나 사람의 고귀함 그 자체는 언제나 의식하지 않고 성장한다.
100:1.8 생각하고 행동하는 종교적 버릇은 영적 성장 체제에 기여한다. 사람은 영적 자극에 유리하게 반응하도록, 일종의 영적 조건 반사(反射)를 일으키도록, 종교적 성향을 개발할 수 있다. 종교적 성장을 유리하게 만드는 버릇에는 신성한 가치에 대한 발달된 감수성, 남의 종교 생활의 인식, 우주적 의미가 있는 것을 돌이켜보는 명상, 경건한 마음으로 문제를 푸는 것, 자기의 영적 생활을 동료들과 나누기, 이기심의 회피, 신의 자비를 주제넘게 바라지 않는 것, 하나님 앞에 서 있듯 사는 것을 포함한다. 종교적 성장의 여러 요인은 의도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성장 그 자체는 어김없이 의식하지 않고 일어난다.
100:1.9 그러나 종교적 성장이 의식하지 않고 일어나는 성질은 그 성장이 인간 지능의 하의식(下意識)이라 생각되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활동임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사자 지성의 상의식(上意識) 수준에 있는 창조적 활동임을 가리킨다. 의식하지 않고 종교적으로 성장하는 현실을 깨닫는 체험은 상의식 기능이 존재함을 가리키는 하나의 분명한 증명이다.
100:2.1 영적 발전은 첫째로, 참 영적 세력과 생생한 영적 연락을 유지하고, 둘째로 영적 열매를 줄곧 맺는 것에 달려 있다. 즉 사람이 영적 은인으로부터 받은 것을 동료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영적 진보는 사람이 영적으로 부족함을 머리로 인식하고, 아울러 완전을 향한 욕구, 하나님을 알고 그와 같이 되려는 욕구, 마음을 다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목적을 자의식하는 데 달려 있다.
100:2.2 영적 성장은 처음에 필요를 각성하고, 다음에 의미 있는 것을 헤아리며, 그리고 나서 가치 기준을 발견하는 것이다. 참된 영적 성장이 일어나는 증거는 사랑으로 동기를 얻고, 사심 없는 봉사로 인하여 자극받고, 신의 완전한 이상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에 지배된 인격을 전시하는 데 있다. 이 체험 전부가 종교의 실체이며, 단순한 신학적 관념과 대조가 된다.
100:2.3 종교는 우주에 대하여 영적으로 반응하는 기법, 깨우침을 받은 지혜로운 기법이 되는 체험 수준까지 진보할 수 있다. 그렇게 영화로운 종교는 인격의 세 수준, 지성ㆍ상물질ㆍ영 수준에서, 즉 지성에 대하여, 진화하는 혼 속에서, 깃드는 영과 함께 활동할 수 있다.
100:2.4 영적 수준은 사람이 하나님과 가까움을 가리키는 지표이자 사람이 동료 존재들에게 쓸모 있음을 재는 자가 된다. 영적 성향은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의미 있는 것에 담긴 진리를 헤아리고, 가치 기준에 담긴 선을 발견하는 능력을 높여 준다. 영적 발전은 발전하는 능력에 따라 결정되며, 사랑의 이기적 성질을 없애는 데 비례하여 커진다.
100:2.5 실제의 영적 상태는 신에 도달한 정도, 조절자와 조화된 정도를 측정한다. 궁극의 영적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최대의 실체에 이르는 것, 하나님다운 모습의 극대화와 대등하다. 영생은 무한한 가치 기준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다.
100:2.6 인간이 자아를 실현하는 목표는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유일하게 얻으려고 애쓸 가치가 있는 것은 신답고, 영적이고, 영원하다. 필사 인간은 육체의 기쁨을 즐기고 인간적 사랑에서 얻는 만족감을 누릴 자격이 있다. 그는 인간 관계와 현세의 제도에 충실함으로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들은 공간을 뛰어넘고, 시간을 극복하고, 신다운 완전함을 얻고 최후자로 봉사하는 영원한 운명을 성취할 불멸의 인격을 기르기 위한 영원한 기초가 아니다.
100:2.7 “하나님을 알고 하늘나라를 믿는 자에게 땅에 있는 만물이 무너진다 해도 무슨 상관이냐?”하고 말했을 때, 예수는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의 깊은 확신을 보여주었다[1]. 현세의 안전은 사라지기 쉽지만, 영적 보장은 깨어질 수 없다. 인간의 곤경ㆍ이기심ㆍ잔인ㆍ미움ㆍ악의ㆍ질투의 큰 물결이 필사자의 혼을 내려칠 때, 너희는 마음 속에 한 거점,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영의 요새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안심해도 좋다. 깃드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에게 자기의 혼을 맡기려고 바친 모든 인간에게 적어도 이것이 참말이다.
100:2.8 차츰차츰 성장하든지 특정한 위기로 인하여 도달하든지 상관 없이, 그러한 영적 달성이 있은 뒤에, 새 가치 기준이 생길 뿐 아니라 인격의 새로운 적응이 일어난다. 영에게서 태어난 그러한 개인들은 인생에 다시 자극받으며,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포부가 물거품이 되고 아주 간절한 꿈이 깨어지는 동안에 차분히 구경할 수 있다. 그들은 그러한 재난이 단지, 우주에서 새롭고 더 숭고한 성취 수준에서 더 고귀하고 오래 가는 실체들을 육성하기 전에, 사람이 현세에 창조한 것을 부서뜨리는, 방향을 바꾸는 격변인 줄 분명히 안다.
100:3.1 종교는 정적(靜的)이고 지극한, 정신의 평안을 얻는 기법이 아니다. 종교는 힘찬 봉사를 위하여 혼을 가라앉히는 충동이다. 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시중드는 충실한 봉사에 자아 전체가 지원하는 것이다. 종교는 최고의 목표, 영원한 상을 얻는 데 필수인 어떤 값이라도 치른다. 종교적 충성에는 완벽하게 바치는 마음이 있으며, 이것은 뛰어나게 숭고하다. 이 충성심은 사회적으로 효과 있고 영적 진취성이 있다.
100:3.2 신자에게 하나님이란 낱말은 사람이 최고의 실체에 접근하고 신성한 가치를 인식하는 것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사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선악을 좌우하지 않는다. 도덕적 가치는 소망의 성취나 감정의 좌절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100:3.3 가치 기준을 숙고할 때, 너희는 |가치| 그 자체와 가치가 |있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너희는 즐거운 활동, 그리고 늘 점진적으로 더욱 높아지는 인간 체험의 수준에서 즐거운 활동을 뜻 있게 통합하고 더 낫게 진행하는 것, 이 둘 사이의 관계를 헤아려야 한다.
100:3.4 의미는 체험이 가치 기준에 더하는 무엇이다. 의미는 가치 기준을 이해하여 의식하는 것이다. 혼자서만 누리는 순전히 이기적 기쁨은 실질적으로 목적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상대적 악에 가까워지는 의미 없는 쾌락을 암시할지 모른다. 실체들이 의미가 있고 정신적으로 연결될 때, 지성이 그러한 관계들을 인식하고 이해할 때, 가치는 사람이 체험하는 것이다.
100:3.5 가치 기준은 결코 정지(靜止) 상태에 있을 수 없다. 실체는 변화, 성장이 있음을 가리킨다. 성장이 없이, 의미가 확대되고 가치가 높아지는 일이 없이, 변화는 가치가 없다―악이 될 가능성이 있다. 우주에 적응이 잘 되어 있을수록, 어떤 체험이라도 더 많은 중요성을 가진다. 가치는 개념의 착각이 아니다. 가치 기준은 실재하지만 반드시 관계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가치 기준은 언제나 실재하면서도 잠재한다―지난날에 어떠했던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것이요, 그리고 앞으로 있을 것이다.
100:3.6 실재하는 것과 잠재하는 것을 연결하면 성장이 된다, 가치가 체험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은 그저 전진하는 것은 아니다. 전진은 언제나 의미가 있지만, 성장이 없으면 전진은 비교적 가치가 없다. 인생에서 최고로 값진 것은 가치 기준의 성장, 의미 있는 것들의 진보, 그리고 이 두 체험이 우주에서 서로 관계되는 것을 깨닫는 데 있다. 그러한 체험은 하나님을 의식함과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필사자는 자연을 초월하지는 않더라도, 참으로 인간을 초월하고 있다. 죽지 않는 혼이 생성되고 있다.
100:3.7 사람은 성장을 일으킬 수 없어도 유리한 조건을 마련할 수 있다. 육체의 성장이거나, 지능의 성장이거나 영적 성장이거나 상관 없이, 성장은 반드시 의식하지 않고 일어난다. 따라서 사랑은 자란다. 사랑을 창조하거나, 만들어 내거나, 돈으로 살 수 없다. 사랑은 자라야 한다. 진화는 성장을 일으키는 우주 기법이다. 사회의 성장은 법을 세운다고 보장할 수 없고, 행정을 개선한다고 도덕의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기계를 만들어낼지 모르지만, 기계의 진정한 가치는 인간의 문화와 개인의 평가로부터 얻어야 한다. 사람이 성장에 유일하게 기여하는 것은 인격의 온 힘을―살아 있는 믿음을―동원하는 것이다.
100:4.1 종교 생활은 헌신하는 인생이고, 헌신하는 인생은 창조하는 인생이요, 독창적이고 자연스러운 인생이다. 새로운 종교적 통찰력은 갈등에서 생겨나며, 갈등은 예전에 열등하게 반응하는 형식 대신에, 새롭고 더 낫게 반응하는 버릇의 선택을 개시한다. 새 의미가 있는 것들은 오로지 갈등 속에서 솟아난다. 오직 우수한 의미가 있는 것들에 담긴 상급 가치를 지지하지 않을 때에야 갈등이 지속된다.
100:4.2 종교적 혼란은 피할 수 없다. 정신적 갈등과 영적 동요가 없이 아무런 성장이 있을 수 없다. 철학적 생활 기준을 세우는 것은 지성의 철학 영역에서 어지간한 소동을 일으킨다. 투쟁이 없이는 위대하고 선하고 참되고 고귀한 것들을 위한 충성심이 우러나지 않는다. 영적 시력이 맑아지고 우주 통찰력이 향상될 때 노력이 따른다. 인간의 지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영(非靈) 에너지를 먹고 살다가 젖떼듯 떨어져 나가는 것에 저항한다. 게으른 짐승 같은 지성은 우주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씨름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려고 저항한다.
100:4.3 그러나 종교 생활에서 큰 문제는 사랑이 지배함으로 인격자의 혼의 능력을 통일하는 과제에 있다. 건강, 정신의 효율성, 행복은 육체 체계, 지성 체계, 영 체계가 통일되었을 때 생겨난다. 사람은 건강과 위생에 관하여 이해하는 것이 많지만, 행복에 관해서 참으로 거의 깨우친 것이 없다. 가장 높은 행복은 영적 진보와 떼어낼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영적 성장은 오래 가는 기쁨, 너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평화를 낳는다.
100:4.4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감각은 사물의 존재에 대하여 일러준다. 지성은 의미 있는 것들의 현실성을 발견하지만, 영적 체험은 개인에게 인생에서 참된 가치가 있는 것들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함으로, 사심 없이 사람을 사랑함으로, 인간 생활의 이 높은 수준에 이른다. 네가 동료 인간을 사랑하면, 너는 그들의 가치를 발견했음이 틀림없다. 예수가 사람을 그토록 사랑한 것은 사람을 무척 귀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너는 동료들의 동기를 발견함으로 그들의 가치를 가장 쉽게 발견한다. 누가 너를 짜증나게 하고 분개하는 느낌이 일게 하면, 너는 동정심을 가지고 그렇게 불쾌한 행위를 하는 그의 관점, 이유를 헤아리려고 애써야 한다. 일단 이웃을 이해하면, 너는 너그러워질 터이고, 이러한 너그러움은 자라서 우정이 되고 무르익으면 사랑이 될 것이다.
100:4.5 정신의 눈을 뜨고서, 사람이 동굴에서 살던 시절에 네 원시 조상 중에 한 사람의 그림을 상상해 보아라―키가 작고, 보기 흉하고, 더럽고, 으르렁거리는 뚱뚱이이며, 바로 앞을 무섭게 쏘아보면서, 다리를 벌리고 서서, 곤봉을 치켜올리고, 미움과 적개심으로 씩씩거린다. 그러한 그림은 도저히 사람의 신다운 위엄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그림을 확대해 보자. 활기가 생긴 이 인간 앞에 칼이를 가진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고, 그 사람 뒤에는 한 여자와 두 아이가 있다. 그러한 그림이 인류 중에서 훌륭하고 고귀한 많은 것의 시작을 나타낸다는 것을 네가 즉시 깨닫지만, 그 사람은 이 두 그림에서 똑같다. 오직 이 둘째 스케치에서 너는 넓어진 시야의 덕을 보고 있다. 거기서 너희는 이 진화하는 필사자의 동기를 헤아린다. 너희가 그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의 태도는 칭찬할 가치가 있게 된다. 오직 동료들의 동기를 헤아릴 수만 있다면, 너희가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더 쉬워질까. 동료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너희는 결국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100:4.6 너는 단순히 의지(意志)하는 행위로 참으로 동료를 사랑할 수는 없다. 오직 이웃의 동기와 감정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데서 사랑이 태어난다. 오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루하루 네가 한 사람 더 사랑하기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하루 또는 한 주 한 주, 동료 중에 또 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을 해낸다면, 그리고 이것이 네 능력의 한계라면, 너는 분명히 친교하고 있고 네 인격을 참으로 영적으로 변화시킨다. 사랑은 전염되며, 사람이 총명하고 지혜롭게 헌신할 때, 사랑은 미움보다 더 잘 번진다. 그러나 오직 진정하고 사심 없는 사랑이라야 참으로 전염된다. 각 필사자가 오직 힘찬 애정을 퍼붓는 초점이 될 수만 있다면, 사랑을 옮기는 이 유익한 바이러스는 곧 인류의 감정 흐름에 크게 침투해서, 모든 문명이 사랑으로 휩싸일 터이고, 그것이 사람의 형제 정신의 실현일 것이다.
100:5.1 세상에는 길 잃은 혼이 가득하다. 신학적 의미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방향 면에서 길을 잃었고, 좌절된 철학 시대의 여러 주의와 종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종교적 권한에 복종하는 대신에 어떻게 생활 철학을 세우는가를 배운 사람들의 수가 너무 적다. (강의 바닥이 강은 아니지만, 성장의 경로인 사회화된 종교의 상징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100:5.2 종교적 성장의 발걸음은 침체로부터 갈등을 거쳐서 조정된 길로, 불안한 상태로부터 의심하지 않는 믿음으로, 혼란스러운 우주 의식으로부터 통일된 인격으로, 현세의 목표로부터 영원한 목표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처지로부터 신의 아들이 되는 자유로 이끈다.
100:5.3 최고의 이상에 충성함을 고백하는 것―하나님을 의식함을 정신으로, 감정으로, 영적으로 깨닫는 것―은 자연스러운 점진적 성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위기의 경우처럼, 때때로 어떤 길목에서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 중대한 날에 다마스커스 길에서 바로 그러한, 갑작스럽고 대단한 감화를 받았다[2]. 고타마 싯달타는 혼자 앉아서 궁극의 진리의 신비를 파고들려고 애쓴 그날 밤에 비슷한 체험을 했다. 많은 다른 사람도 비슷한 경험을 했고, 많은 참 신자가 갑작스러운 감화 없이 영적 진보를 이루었다.
100:5.4 이른바 종교적 감화와 연결된 대단한 현상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심리적 성질을 가졌지만, 영적 기원을 가진 체험이 이따금 일어난다. 영적 달성을 향하여 정신적으로 발돋움하는 어떤 수준에서도 절대로 온전히 정신을 기울일 때, 신다운 개념에 인간이 충성하는 동기가 완벽할 때, 믿는 필사자의 상의식(上意識) 지성의 목적, 집중되고 거룩하게 된 목적과 시간을 맞추려고 그 깃드는 영이 갑자기 내려와서 잡아채는 일이 무척 자주 생긴다. 통일된 지적ㆍ영적 현상을 그렇게 체험하는 것이 순전한 심리적 관계를 초월하는 요인에서 생기는 감화를 구성한다.
100:5.5 그러나 감정만으로는 거짓된 감화이다. 사람은 느낌뿐 아니라 믿음도 가져야 한다. 그러한 정신을 일부 기울이는 그 한도까지, 그러한 인간의 충성심을 불완전하게 기울이는 그 한도까지, 감화 받는 체험은 지적 실체, 감정적 실체, 영적 실체의 혼합이 될 것이다.
100:5.6 다른 면에서는 통일된 지적 생활에 실용적으로 소용되는 가정(假定)으로서, 사람이 이론적 하의식 지성을 인정하고 싶다면, 다음에 일관성을 지키기 위하여, 사람은 그에 상당하는 비슷한 영역, 더 높은 지적 활동이 있는 상의식 수준을 가정해야 한다. 이 상의식 수준은 깃드는 영 개체, 생각 조절자와 바로 접촉하는 지대이다. 이 모든 정신적 추측에 담긴 큰 위험은 놀라운 꿈과 함께, 환상과 기타 이른바 신비스러운 체험을 신이 인간 지성에게 전하는 것이라 여길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난 시절에, 신성한 존재들은 하나님을 아는 어떤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냈고, 그들이 신비스러운 황홀경이나 병적 환상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현상이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였다.
100:5.7 감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조절자와 접촉이 가능한 상물질 지대에 접근하는 더 좋은 방법은, 생생한 믿음과 진정한 예배, 마음을 다하는 사심 없는 기도를 통하는 것이리라. 인간의 지성이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용솟음쳐 오르는 기억 중에 허다한 것이 신의 계시(啓示)요, 영의 인도라고 잘못 생각되어 왔다.
100:5.8 버릇처럼 종교적 백일몽에 잠기는 습관과 관련하여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신비주의는 때때로 진정한 영적 교통 수단이었지만, 현실을 도피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의 바쁜 장면으로부터 잠시 물러나는 것은 심각한 위험이 아닐지 모르지만, 인격이 오랫동안 고립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지 못하다. 어떤 경우라도 환상을 의식하는 황홀경 같은 상태를 종교적 체험으로 길러서는 안 된다.
100:5.9 신비스러운 상태의 특징은 비교적 수동적인 지능에 작용하면서 주의(注意)가 집중되는 선명한 점들과 함께 의식이 산만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상의식인 영적 접촉 지대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의식을 향하여 의식을 끌어당긴다. 많은 신비주의자가 정신적 분리를 정신이 비정상으로 표현되는 수준까지 밀고 갔다.
100:5.10 영적 명상에 잠기는 더욱 건전한 태도는, 돌이켜 신을 예배함으로, 그리고 감사드리는 기도에서 찾아야 한다. 육체를 입은 예수의 일생 후반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사람이 생각 조절자와 직접 교통하는 것을 이른바 이 신비의 체험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신비스러운 교통의 시작에 기여하는 요소들은 그러한 정신 상태가 위험한 것을 가리킨다. 육체의 피로, 금식, 정신의 분리, 깊은 아름다움을 의식하는 체험, 선명한 성욕 충동, 두려움ㆍ걱정ㆍ분노, 그리고 야단스러운 춤과 같은 것들이 신비스러운 상태를 촉진한다. 그러한 기초적 준비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많은 것들은 하의식 지성에서 기원을 가진다.
100:5.11 신비 현상이 일어날 조건이 얼마나 유리했든지 상관 없이, 나사렛 예수는 파라다이스 아버지와 교통하기 위하여 결코 그런 방법을 쓴 적이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예수는 아무런 하의식의 망상이나 상의식의 착각을 겪지 않았다.
100:6.1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는 방법이 뚜렷이 다를지 모르지만, 동기는 대단히 비슷하다. 종교는 생명의 특정한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생활 방식이다. 참된 종교는 신자가 자신에게, 그리고 온 인류에게, 최고의 가치를 가졌다고 판단하는 어떤 실체에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뛰어난 특징은 최고의 가치 기준에 의심 없이 충성하고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최상의 가치 기준에 바치는 이 종교적 헌신은 종교심이 없다고 생각되는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종교가 없는 자들이 지지하는 운동에 열심히 충성을 바치는 데서 나타난다.
100:6.2 신자가 인정하는 최고의 가치는 저속하거나 거짓일 수도 있지만, 그런데도 종교성이 있다. 최고로 여기는 가치가 참으로, 진정한 영적 가치를 가진 우주 실체인 그 한도까지, 종교는 진정하다.
100:6.3 인간이 종교적 충동에 반응하는 표시는 고귀하고 위대한 성질을 띤다. 성실한 신자는 우주 시민임을 의식하고, 초인간 능력의 근원과 접촉함을 의식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우수하고 고결한 단체에 속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쁨에 떨고 활력을 얻는다. 가장 높은 우주 목표―최상의 목표―를 추구하는 자극으로 인하여 자아의 가치를 더욱 의식하게 된다.
100:6.4 자아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동기의 충동, 흥미를 자아내는 충동에 무릎을 꿇었으며, 그 동기는 더욱 높은 자제를 부과하고 감정의 갈등을 줄이고 필사자의 인생을 참으로 살 가치가 있게 만든다. 인간의 한계의 병적 인식은, 가장 높은 우주 및 초우주 목표에 미치려는 도덕적 각오, 영적 포부와 관련하여 필사자의 결점을 자연히 의식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리고 인간을 초월하는 이상을 달성하려는 이 뜨거운 노력의 특징은 반드시 참을성ㆍ인내심ㆍ불굴ㆍ관대함이 늘어나는 것이다.
100:6.5 그러나 참된 종교는 실천하는 사랑이요, 봉사하는 인생이다. 신자가 순전히 현세적이고 하찮은 많은 것에 초연하는 것은 결코 사회적 고립으로 이끌지 않으며, 초연하면서 유머 감각을 잃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종교는 인간 존재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지 않지만, 인생의 모든 것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준다. 그런 종교는 새 종류의 열심ㆍ열의ㆍ용기를 불러일으킨다. 십자군 정신까지도 불러일으킬지 모르며, 이것은 영적 통찰력으로, 그리고 인간이 충성하는 평범한 사회적 의무에 충실히 헌신함으로, 고삐를 쥐지 않으면 극도로 위험하다.
100:6.6 종교 생활의 가장 놀라운 표시 중에 하나는 힘차고 숭고한 평안이니, 이것은 어떤 인간도 이해하기 힘든 평안이요, 모든 의심과 소동이 없음을 가리키는, 우주에 대한 자세이다[3]. 그러한 수준의 영적 안정은 실망에 면역이 되어 있다. 그러한 신자들은 이렇게 말한 사도 바울과 같다: “죽음이나 삶이나, 천사나 군주나 권력이나, 현재 일이나 앞으로 다가올 일이나, 높이나 깊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내지 못할 것을 내가 확신하노라[4].”
100:6.7 승리하는 영광을 깨닫는 것과 관련하여 보장받는 느낌이 있으니, 이 느낌은 최상위의 실체를 깨달은 신자, 궁극위에 이르는 목표를 추구하는 신자의 의식 속에 거한다.
100:6.8 진화된 종교가 진정한 체험이기 때문에, 진화된 종교조차 충성심과 위엄 면에서 이 모든 것이 해당된다. 그러나 계시 종교는 진정할 뿐 아니라 |우수하다|. 영적 시력이 확대됨으로 생기는 새로운 충성은 새 수준의 사랑과 헌신, 봉사와 친교를 창조한다. 그리고 향상된 이 모든 사회적 전망은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이 형제인 것을 더욱 크게 의식하게 한다.
100:6.9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의 특별한 차이점은 새 품질의 신다운 지혜이니, 이 지혜가 순전히 체험으로 얻은 인간의 지혜에 더해진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 안에서, 그리고 그 종교와 더불어 얻는 체험은 더욱 내려주는 신다운 지혜와 우주 통찰력을 나중에 받을 능력을 개발시킨다.
100:7.1 유란시아의 보통 필사자는 비록 나사렛 예수가 육체를 입고 머무르던 동안에 얻은 그 완벽한 인품의 높이까지 이르기를 바랄 수 없어도, 필사 신자는 누구나 예수의 인격이 완전해진 길을 따라서, 튼튼하고 통일된 인격을 개발하는 것이 아주 가능하다. 주의 인격의 독특한 모습은 그의 인격이 완전하기보다 균형된 것, 인격이 아름답게, 치우치지 않게 통일된 것이다. 예수를 가장 효과 있게 보여주는 것은 다음의 어떤 사람의 예이니, 예수를 고발하는 자들 앞에 서 있는 주를 향하여 손짓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보라!”[5]
100:7.2 예수의 어김없는 친절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지만, 그의 강건한 인품은 따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참으로 성실했다. 그에게 아무런 위선이 없었다. 전혀 꾸밈이 없었고, 언제나 그는 무척 신선하게 진심이었다. 겉치레에 몸을 굽히지 않았고, 무엇인 체한 적이 없었다. 진리를 가르친 그대로 그는 진리를 실천하였다[6]. 그는 바로 그 진리였다. 그의 세대에게 구원의 진리를 성실하게 선포하는 것이 때때로 고통을 가져왔지만, 그는 그런 진리를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의심하지 않고 모든 진리에 충성했다.
100:7.3 그러나 주는 무척 분별이 있었고, 사람이 가까이할 수 있는 분이었다. 그가 베푼 모든 봉사는 대단히 실용적이었고, 한편 그의 모든 계획은 그러한 인가된 상식에 벗어나지 않는 특징을 가졌다. 기형(奇形)이고 유별나고 이상한 성향이 전혀 그에게 없었다. 그는 쉽게 변하거나, 변덕을 부리거나 히스테리를 보인 적이 없었다. 어떤 가르침에도, 무슨 일을 행해도, 특별한 예의 바른 감각과 아울러 언제나 지극한 분별이 있었다.
100:7.4 사람의 아들은 언제나 매우 침착한 인물이었다. 적들조차 그에게 진지한 존경심을 보였다. 그들은 그가 앞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예수는 두려움이 없었다. 신다운 열심이 가득했지만, 결코 광신을 보이지 않았다. 감정이 살아 있어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상상력이 있었으나 언제나 실용적이었다. 그는 솔직하게 인생의 현실에 부딪쳤으나 결코 무디거나 단조롭지 않았다. 용기가 있어도 결코 무모하지 않았고, 신중했으나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 동정심이 있어도 감상에 빠지지 않았고, 독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경건해도 거룩한 체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매우 침착했으니, 인품이 아주 완전히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100:7.5 예수의 독창성은 억눌리지 않았다. 그는 전통에 묶이거나 좁은 관습에 종처럼 순종함으로 지장을 받지 않았다. 의심 없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고, 절대 권한을 가지고 가르쳤다. 그러나 훌륭한 독창성이 있었어도 그의 선조와 그 시대 사람들의 가르침 속에 있는 진리의 보배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에서 가장 독창적인 것은 신을 두려워하고 희생물을 바치는 관습 대신에 사랑과 자비를 강조한 것이었다.
100:7.6 예수는 대단히 넓은 견지에서 세상을 보았다. 그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도하라고 추종자들에게 타일렀다. 그는 전혀 마음이 좁지 않았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온 인류, 아니 한 우주조차도 담았다. 언제나 그는 이렇게 초청하였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올지어다[7].”
100:7.7 예수에 관하여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였더라”하고 사람들이 참되게 말했다[8]. 사람들 사이에 한 사람으로서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주 숭고하게 의지했다. 어린아이가 땅에서 부모를 의지하는 것처럼 아버지를 의지했다. 그의 믿음은 완전했어도 결코 주제넘지 않았다. 자연이 아무리 모질게 보여도, 땅에 있는 사람의 복지에 아무리 개의치 않는 듯 보여도, 예수는 결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실망에 면역(免疫)이 되었고, 박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실패로 보이는 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100:7.8 그는 사람들을 형제처럼 사랑했고, 동시에 사람들의 타고난 자질과 얻은 성질이 어떻게 다른가 헤아렸다. “그는 두루 다니며 좋은 일을 하였더라[9].”
100:7.9 예수는 드물게 명랑한 사람이었지만, 눈이 먼 분별 없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 늘 이렇게 훈계의 말씀을 주었다, “기운을 내라[10].” 확고히 하나님을 믿고 흔들리지 않고 사람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자신 있는 태도를 지킬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믿었기 때문에, 언제나 감동을 주도록 사람들에게 마음을 썼다. 그래도 언제나 그의 신념에 충실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헌신하려고 훌륭하게 각오가 굳었다.
100:7.10 주는 언제나 너그러웠다. 그는 지치지 않고 말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도다[11].” 그는 말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2].” 한없이 너그러웠는데도, 그래도 그는 결코 낭비하거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구원을 받으려면 너희가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얻을지니라[13].”
100:7.11 그는 솔직했으나 언제나 친절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에게 일렀으리라[14].” 죄인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한다고 거침없이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놀랍게 솔직하면서 내내 그는 어김없이 |공정했다|.
100:7.12 때때로 인간적 슬픔의 잔을 깊숙이 들이켰는데도, 예수는 변치 않고 명랑했다. 두려움 없이 그는 존재의 현실에 부딪쳤고, 그래도 하늘나라 복음을 위한 열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15]. 그러나 열심을 자제했고, 결코 열심이 그를 지배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일”에 아낌없이 헌신했다[16]. 이 신다운 열심은 영적 생각이 없는 형제들로 하여금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구경하는 우주는 그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의 모형이라고, 높은 수준의 영적 생활에 필사자가 최고로 헌신하는 본보기라고 그를 평가했다. 그리고 자제된 그의 열심은 쉽게 번졌다. 동료들은 그와 함께 신답게 낙관할 수밖에 없었다.
100:7.13 이 갈릴리 사람은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17]. 즐거운 사람이었다[18]. “기뻐하고 지극히 즐거워하라”하고 늘 말했다[19]. 그러나 의무가 요구할 때, “그늘진 죽음의 골짜기”를 기꺼이 용감히 걸었다. 즐거워했지만 동시에 겸손했다.
100:7.14 그의 용기는 그의 참을성에 못지 않았다. 때이르게 행동하도록 압력을 받았을 때, 그는 오직 “내 때가 아직 다가오지 않았느니라” 대답하곤 했다[20].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차분한 자세는 탁월하였다. 그러나 악을 보고서 자주 분개하였고, 죄를 참지 못했다. 이따금 땅에 있는 자녀들의 복지에 해로운 것에 저항하도록 힘차게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죄를 분개하는 태도는 결코 죄인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지 않았다.
100:7.15 그의 용기는 대단했지만 그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그의 표어는 “두려워 말라”는 것이었다[21]. 그는 대단히 용기가 있었고, 때때로 영웅답게 용감했다. 그러나 그의 용기에 신중함이 있었고 이성(理性)으로 자제되었다. 그 용기는 믿음에서 생겨난 용기요, 함부로 맹목으로 주제넘게 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참으로 용감했지만 결코 만용을 부리지 않았다.
100:7.16 주는 존경심의 본보기였다. 젊을 때에도 그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하옵소서[22].” 그는 동료들이 그릇되게 숭배하는 것조차 존중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로 하여금 종교적 전통을 공격하거나 사람의 잘못된 관념을 공격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그는 참된 거룩함을 존중했고, 그래도 “너희 가운데 누가 나를 죄 있다고 선언하느냐?”하고 말하면서 동료들에게 온당하게 호소할 수 있었다[23].
100:7.17 예수가 위대한 것은 선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는 어린아이들과 사귀었다. 부드러웠어도 사생활에서 잘난 체하지 않았고, 그래도 우주에서 완전해진 사람이었다. 동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를 주라고 불렀다.
100:7.18 예수는 완전하게 통일된 인격자였다. 그리고 오늘날, 갈릴리에서 한 것처럼, 그는 계속 필사자의 체험을 통일하고 인간의 수고를 조정한다. 그는 생명을 하나가 되게, 인품을 고귀하게, 체험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는 인간의 지성 속에 들어가서 그 지성을 높이고 변화시키고 그 모습을 바꾼다. 이 말씀은 글자 그대로 참말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 속에 가졌으면 새 사람이라[24]. 오래된 것이 지나가고 있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고 있도다.”
100:7.19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이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