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0.1 사람의 참된 종교적 반응은 모두, 예배 보조자가 일찍부터 베푸는 봉사로 후원을 받고, 지혜 보조자의 검열을 받는다. 사람의 첫 초월 지성의 재산은 우주 창조 영의 성령 안에서 인격이 회로로 연결되는 재산이다. 신다운 아들들이 수여되거나 조절자가 보편적으로 수여되기 오래 전에, 이 영향은 윤리와 종교와 영적 수준에 대하여 사람의 관점을 확대하도록 작용한다. 파라다이스 아들의 수여가 있은 뒤에, 해방된 진리의 영은 종교적 진리를 깨닫는, 인간의 능력을 키우는 데 힘차게 이바지한다. 사람 사는 세계에서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생각 조절자는 인간이 가진 상급 부류의 종교적 통찰력을 개발시키는 데 더욱 참여한다. 생각 조절자는 우주의 창문이요, 이를 통하여 유한한 인간은 한없는 신, 우주의 아버지가 확실하고 신다운 것을 믿음으로 볼지도 모른다.
103:0.2 인류의 종교적 성향은 타고난 것이다. 보편적으로 표현되고 자연 기원을 가진 듯하다. 원시 종교는 반드시 진화로 창시된다. 자연스러운 종교적 체험이 계속 진보함에 따라서, 다른 면에서는 천천히 움직이는 행성의 진화 과정에 진리의 정기적 계시가 때때로 끼어든다.
103:0.3 유란시아에는 오늘날 네 종류의 종교가 있다:
103:0.4 1. 자연 종교, 곧 진화 종교.
103:0.5 2. 초자연 종교, 곧 계시 종교.
103:0.6 3. 실제의 종교, 곧 유행하는 종교, 다른 정도로 자연 종교와 초자연 종교가 섞여 있다.
103:0.7 4. 철학적 종교, 사람이 만든 종교, 즉 철학으로 생각해낸 신학 교리, 그리고 이치를 따짐으로 만들어진 종교.
103:1.1 한 사회 집단이나 민족 집단 사이에서 종교적 체험이 일치하는 것은 개인에 깃드는 하나님의 분신(分身)이 동일한 성질을 가진 데서 생긴다. 다른 사람들의 복지에 관하여 사심 없는 관심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 속에 있는 이 성직자이다. 그러나 인격이 독특하기 때문에―어느 두 필사자도 같지 않으니까―따라서 어느 두 인간도 자기 지성 속에 사는 신성한 영의 인도와 재촉을 비슷하게 풀이할 수 없는 것이 필연이다. 한 무리의 필사자는 영적 통일성을 체험할 수 있지만, 결코 철학적으로 균일하게 될 수 없다. 그리고 종교적 생각과 체험의 풀이의 이러한 다양성은 20세기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종교에 대하여 500가지가 넘게 다르게 정의를 내렸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실제로, 인간은 누구나 자기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솟아나는 신의 충동에 대하여 자신의 체험적 해석으로 종교를 정의하며, 따라서 그러한 해석은 독특하고, 모든 다른 인간의 종교 철학과 온전히 달라야 한다.
103:1.2 한 필사자가 동료 필사자의 종교 철학에 완전히 찬성할 때, 그 현상은 이 두 존재가 철학적ㆍ종교적 해석의 유사성에 관련된 문제들에 관하여 비슷한 |종교적 체험|을 겪었음을 가리킨다.
103:1.3 너의 종교는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문제이지만, 너의 종교 생활이 자기 중심―한정되고 이기적이고 비사회적―으로 되는 것을 막을 목적으로, 너는 방대한 다른 종교적 체험을 (서로 다르고 다채로운 필사자들의 다양한 해석을) 이해하는 지식을 얻어야 한다.
103:1.4 종교가 처음에 무언가를 믿는 원시적 신념이고, 다음에 가치 기준의 추구가 뒤따른다고 가정할 때, 합리주의는 그릇되다. 종교는 1차적으로 가치 기준의 추구이며, 다음에 해석하는 관념 체계가 형성된다. 믿는 관념―해석―보다 종교적 가치 기준―목표―에 대하여 사람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기가 훨씬 쉽다. 이것이 어째서 종교가 서로 충돌하는 수백 가지 관념―교리―를 유지하는 혼잡한 현상을 나타내면서, 한편 가치 기준과 목표에 찬성할 수 있는가 설명한다. 이것은 또한 특정한 개인이 종교 관념을 버리거나 바꾸는 마당에 자기의 종교적 체험을 지킬 수 있는가 설명한다. 종교적 관념에 혁신적 변화가 있는데도 종교는 버틴다. 신학(神學)은 종교를 낳지 않는다. 신에 관한 철학을 만들어 내는 것은 종교이다.
103:1.5 신봉자들이 거짓된 것을 무척 많이 믿었다고 해서 종교가 무효로 되지는 않는데, 이는 종교가 가치 인식에 기초를 두고,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서 생긴 믿음으로 종교가 입증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종교는 체험과 종교적 생각에 기초를 둔다. 신학, 즉 종교에 관한 철학은 그 체험을 풀이하려는 정직한 시도이다. 그러한 해석하는 관념은 옳거나 그를 수 있고, 아니면 진실과 잘못이 섞인 것일 수도 있다.
103:1.6 영적 가치 기준을 인식함을 깨닫는 것은 관념 작용을 초월하는 체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라 부르기로 작정한 이 “감각,” “느낌,” “직관,” 또는 “체험”을 가리키는 데 이용될 수 있는 아무런 낱말이 어느 인간 언어에도 없다. 사람 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은 인격을 가지지 않았다―조절자는 선(先)인격이다―하지만 이 훈계자는 가치를 제시하고, 신성의 맛을 풍기며, 신성은 가장 높고 무한한 의미에서 성격을 가졌다. 하나님이 적어도 성격을 가지지 않았다면, 의식할 수 없으며, 의식(意識)이 없다면 사람 밑에 있을 것이다[1].
103:2.1 종교는 인간의 지성 속에서 작용하며 인간의 의식 속에서 종교가 나타나기 전에, 체험 속에서 사람은 종교를 깨달았다. 어린아이는 |출생|을 체험하기 전에, 약 아홉 달 동안 존재했다. 그러나 종교의 “출생”은 갑작스럽지 않고, 오히려 차츰차츰 솟아나는 것이다. 그런데도 머지않아 “태어나는 날”이 있다[2]. 너희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영에게서 태어나지 않으면―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많은 육체의 출생이 “폭풍 같은 산고”와 기타 비정상 “출산”의 특징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허다한 영적 출생에 영의 고통이 많이 따르고 심리적 동요의 표시가 생긴다. 다른 영적 출생은 영적 체험이 높아짐과 함께, 최고의 가치를 인식하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성장이다. 하지만 의식해서 기울이는 노력, 그리고 분명한 개인적 결심이 없이는 아무런 종교적 발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종교는 결코 소극적 체험, 부정적 태도가 아니다. “종교의 탄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른바 종교적 감화를 받는 체험과 직접 관계되지는 않고, 이러한 감화는 정신의 갈등, 감정의 억압, 기분의 동요가 일어나는 결과로서, 생애의 후기에 일어나는 종교적 사건의 특징을 보통 나타낸다.
103:2.2 그러나 사랑이 넘치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임을 의식하면서 자라도록 부모가 기른 사람들은 정신적 위기, 감정의 격변을 통해야 하나님과 그렇게 친교함을 겨우 의식할 수 있는 필사 동료들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103:2.3 사람의 지성에 있는 진화의 토양에서 계시된 종교의 씨앗이 싹트며, 이 토양은 아주 일찍부터 사회 의식을 낳는 도덕적 성품이다. 한 아이의 도덕적 성품을 처음 자극하는 것은 남녀의 차이나 죄책감이나 개인의 자부심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 및 공평의 충동, 그리고 친절―동료들에게 유익한 봉사―를 베풀려는 충동과 상관이 있다. 일찍부터 생긴 그러한 도덕적 각성을 길렀을 때 갈등ㆍ격변ㆍ위기가 비교적 없는 종교 생활이 차츰 발달한다.
103:2.4 인간은 누구나 아주 일찍부터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충동과 이타적 충동 사이에 싸움 비슷한 것을 체험한다. 그러한 도덕적 갈등을 해결하는 과제에서 인간을 초월하는 도움을 찾는 결과로서, 흔히 하나님을 의식하는 첫 체험을 얻을 수 있다.
103:2.5 어린아이의 심리 상태는 부정적이 아니라, 자연히 긍정적이다. 허다한 필사자가 부정적인 것은 그렇게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긍정적이라고 할 때, 그의 도덕적 충동을 언급하며, 이 지성의 힘이 솟아나는 것은 생각 조절자가 도착했음을 알린다.
103:2.6 그릇된 가르침이 없는 가운데, 정상 아이의 지성은, 부정적으로 죄와 죄책감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의식이 고개를 들면서, 도덕적 올바름과 사회 봉사를 향하여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종교적 체험이 발달하면서 갈등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피할 수 없이 인간 의지의 결정ㆍ노력ㆍ기능이 언제나 있다.
103:2.7 도덕적 선택에는 많든 적든, 도덕적 갈등이 보통 따른다. 아이의 지성 속에서 맨 처음에 생기는 바로 이 싸움은 이기심의 욕구와 이타심의 충동 사이에 생긴다. 생각 조절자는 이기적 동기를 가진 인격의 가치 기준을 무시하지 않지만, 인간의 행복을 얻는 목표에 이르고, 하늘 나라의 기쁨에 이르는 것으로서, 이타심의 충동을 조금 더 우대하도록 작용한다.
103:2.8 한 도덕적 존재가 이기심의 욕구가 있는데도 사심 없이 되기를 선택할 때, 그것은 원시 종교의 체험이다. 어떤 동물도 그렇게 선택할 수 없다. 그러한 결정은 인간답고도 종교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실을 용납하고, 사회에 봉사하려는 충동을 나타내며, 이 충동이 사람의 형제 정신의 기초이다. 자유 의지 행위로 머리가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그러한 결정은 종교적 체험이 된다.
103:2.9 그러나 어린아이가 도덕적 능력을 얻고, 따라서 이타적 봉사를 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하기 전에, 그는 이미 튼튼하고 잘 통일된 이기적 성품을 개발하였다. 사실로 일어나는 바로 이 상황이 “높은” 성품과 “낮은” 성품 사이에, “죄 많은 늙은이”와 은혜로운 “새 성품” 사이에 싸움이 있다는 이론을 낳는다[3]. 일생에 아주 일찍부터 정상인 어린아이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다[4].
103:2.10 사람은 제 실속을 찾는 욕구를 자아―그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반대로 이타심을 가지려는 의지를 제 몸 바깥에 있는 어떤 영향―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싶어한다. 정말로 그러한 판단이 옳으니, 이는 자아를 추구하지 않는 모든 그러한 욕구는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인도하심에 실제로 기원을 가지며, 이 조절자는 하나님의 분신이다. 인간은 의식 속에서 영 훈계자의 충동을 이타적 욕구, 동료 인간을 생각하는 욕구로서 깨닫는다. 적어도 이것이 어린아이의 머리 속에서 일찍부터 생기는 근본적 체험이다. 자라는 어린아이가 통일된 인격을 얻지 못할 때, 이타심의 욕구가 너무 지나치게 자라서 자아의 복지에 심각한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그릇된 지도를 받은 양심은 많은 갈등ㆍ걱정ㆍ슬픔, 그리고 인간의 끝없는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다.
103:3.1 영ㆍ꿈, 그리고 다양한 기타 미신을 믿는 관념은 모두 원시 종교들의 진화적 기원에 하나의 역할을 했지만, 너희는 씨족이나 부족의 단결 정신의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초기 인간 지성의 도덕적 성품에서 생기는 이기심ㆍ이타심의 갈등에 도전한 바로 그 사회적 상황이 집단 관계에서 제시되었다. 원시적 오스트랄리아인은 영들을 믿는데도, 아직도 종교의 초점을 씨족에 둔다. 시간이 지나면, 그러한 종교 개념은 처음에는 동물로, 나중에는 초인간이나 어떤 신으로서 인격화되는 경향이 있다. 아프리카 부시맨의 신앙은 토템 신앙조차도 되지 않지만, 그처럼 열등한 종족조차 자기 이익과 집단 이익의 차이를 인식하며, 이것은 세속의 것과 신성한 것의 가치를 원시적으로 구별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 집단은 종교적 체험의 근원이 아니다. 사람의 초기 종교에 이 모든 원시적 기여가 어떤 영향을 미치든 상관 없이, 참된 종교적 충동은 사심 없이 되려는 의지를 촉진하는 진정한 영 존재에 그 기원을 가지는 것이 여전히 사실이다.
103:3.2 자연의 경이와 신비, 즉 비인격 마나를[1] 믿는 원시 신앙은 후일의 종교가 나타날 것을 예시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진화하는 종교는 개인이 사회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얼마큼 몸소 희생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더 행복하고 더 풍족하게 만들기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궁극에 종교는 하나님과 사람이 베푸는 봉사가 되도록 정해졌다.
103:3.3 종교는 사람의 환경을 바꾸도록 설계되어 있지만, 오늘날 필사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종교에서 많은 것은 이렇게 할 힘이 없게 되었다. 환경이 너무나 자주 종교를 지배하였다.
103:3.4 어느 시대의 종교에도 지극히 중요한 체험은 신학적 교리나 철학 이론에 관한 생각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 기준과 사회적 의미에 대한 감정이라는 것을 기억하여라. 도덕 개념이 마술 요소를 대체함에 따라서 종교는 유리하게 진화한다.
103:3.5 사람은 마나, 마술, 자연 숭배, 귀신 공포증, 동물 숭배와 같은 미신을 거쳐서 여러 가지 예식에 이르기까지 진화했고, 그런 예식으로 인하여 개인의 종교적 태도는 씨족의 집단 반응이 되었다. 다음에 이 예식들은 부족 신앙으로 집중되고 구체화되었고, 궁극에 이 두려움과 신앙은 신으로 인격화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종교적 진화에서 결코 도덕 요소가 통째로 빠지지는 않았다.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충동은 언제나 힘이 있었다. 그리고 이 강력한 영향은―하나는 인간의 영향이요 다른 하나는 신의 영향인데―1천 가지의 파괴적 성향과 적대심 때문에 무척 자주 절멸의 위협을 받았는데도 세월의 변천을 통해서 종교가 살아남는 것을 보장했다.
103:4.1 사회의 행사와 종교적 모임의 차이, 특징이 되는 차이는, 세속의 모임과 반대로 종교적 모임이 |친교|의 분위기에 젖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인간의 교제는 신다운 자와 친교하는 느낌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집단 예배의 시작이다. 사람들이 함께 먹는 것은 가장 초기 종류의 사회적 친교였고, 그래서 초기 종교들은 예식에서 바치는 희생물의 얼마큼을 예배자들이 먹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기독교에서도 주의 성찬은 이 형태의 친교를 유지한다. 친교 분위기는 이기적 자아와 깃드는 영 훈계자의 이타적 욕구의 싸움에서, 신선한 느낌을 주고 위로하는 휴전 기간을 마련해 준다. 이것이 참된 예배에 이르는 전주곡이다―하나님의 계심을 연습하는 것이요, 궁극에 사람의 형제 정신이 태어나게 만든다.
103:4.2 원시인이 하나님과 친교가 중단되었다고 느꼈을 때, 그는 속죄하려고, 친한 관계를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어떤 종류의 희생물을 바치는 데 의존하였다. 올바름을 간절히 목마르게 찾는 것은 진리의 발견으로 이끌고, 진리는 이상을 키우며, 이것은 개별 신자에게 새로운 문제를 일으킨다. 이는 우리의 이상이 기하 급수(級數)로 자라는 경향이 있고, 한편 그 이상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우리의 능력은 겨우 산술 급수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103:4.3 (죄를 의식함이 아니라) 죄를 지은 느낌은 영적 교통이 중단되거나 사람이 도덕적 이상을 낮추는 데서 생긴다. 사람의 가장 높은 도덕적 이상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비슷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그러한 곤경을 벗어날 수 있다. 사람은 자기의 가장 높은 이상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바랄 수 없지만, 하나님을 찾아내고, 갈수록 더 그를 닮아가는 목표에 충실할 수 있다.
103:4.4 예수는 희생물을 바치고 속죄하는 예식을 쓸어버렸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선포함으로, 이 모든 꾸며낸 죄책감의 근거와 우주에서 고립된 느낌을 없애버렸다. 인간과 창조자의 관계는 자식과 부모의 기초 위에 놓여 있다. 하나님은 필사 아들딸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된다. 그러한 친밀한 가족 관계의 정당한 부분이 아닌 모든 예식은 영원히 취소된다.
103:4.5 아버지 하나님은, 자식의 실제 미덕이나 자격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동기―사람의 목적과 의도―를 인식함으로 자식인 사람을 다룬다. 그 관계는 부모와 자식 관계이며, 신의 사랑이 이를 움직이게 만든다.
103:5.1 초기의 진화적 지성은 두려운 느낌에서 주로 파생되는, 사회적 의무와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느낌이 생기게 만든다. 사회에 봉사하려는 더 분명한 욕구와 이타주의 이상(理想)은 인간의 지성에 깃드는 신다운 영의 직접 충동에서 파생된다[5].
103:5.2 남에게 착한 일을 하는 이 생각과 이상―사람이 이웃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이 무엇인가 희생하려는 충동―은 처음에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6]. 원시인은 오직 그에게 아주 가까운 자, 그를 이웃으로 다루는 자들만 이웃으로 여긴다[7][8]. 종교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사람의 이웃 개념은 씨족ㆍ부족ㆍ나라를 포함하도록 커진다[9][10]. 그리고 나서 예수는 온 인류를 포함하도록, 우리가 적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기까지, 이웃의 규모를 크게 만들었다. 모든 정상 인간의 마음 속에는 이 가르침이 도덕적이라―옳다―고 말해 주는 무엇이 있다. 이 이상을 가장 적게 실천하는 자들조차 이것이 이론적으로 옳다고 인정한다.
103:5.3 모든 사람은 사심 없고 이타심을 가지려는 이 보편적 인간 욕구가 도덕적인 것을 인식한다. 인본주의자는 이 욕구의 기원을 물질 지성이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탓으로 돌린다. 종교가는 필사 지성이 가진 참으로 사심 없는 욕구는 생각 조절자가 안에서 영적으로 인도하심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더 바르게 인식한다.
103:5.4 그러나 자아의 의지(意志)와 자아를 넘는 의지 사이에서 생기는 이 초기의 싸움에 관한 사람의 해석은 반드시 믿을 만하지 않다. 오로지 상당히 잘 통일된 인격자가 자아의 갈망과 싹트는 사회 의식이 여러 모습으로 다투는 것을 중재할 수 있다. 자아는 자기의 이웃만큼 권리를 가지고 있다. 둘 중에 어느 것도 개인의 눈길과 봉사를 독점으로 요구하지 못한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인간의 가장 초기 형태의 죄책감이 생긴다.
103:5.5 오로지 자아의 자존심 욕구와 더 높은 자아(신다운 영)의 이타적 욕구가, 통합하고 감독하는 인격의 통일된 의지로 조정되고 절충될 때에야 인간의 행복을 얻게 된다. 진화 인간의 지성은 감정적 충동의 자연스러운 증가, 그리고 영적 통찰력―진정한 종교적 반성―에 바탕을 둔 사심 없는 욕구의 도덕적 성장, 이 둘 사이의 싸움을 심판하는 까다로운 문제에 늘 부딪친다.
103:5.6 자아를 위해서, 그리고 최다수의 타아(他我)를 위해서 똑같은 이익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시간과 공간의 틀 속에서 반드시 만족스럽게 풀 수 없는 문제를 제시한다. 영원히 산다면 그러한 적대 관계는 해결될 수 있지만, 짧은 인생에서 이것은 해결될 수 없다. 예수는 이렇게 그러한 역설(逆說)을 언급하였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겠거니와 누구든지 하늘 나라를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는 자는 얻으리라[11].”
103:5.7 이상을 추구하는 것―하나님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죽기 전과 후에 이어지는 노력이다. 죽은 뒤의 인생은 필사 존재와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 이 생명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좋은 일이 앞날의 생명을 향상하는 데 바로 기여한다. 진정한 종교는 자연사의 문을 거치는 결과로서 사람에게 부여되는 미덕, 고귀한 인품의 모든 미덕을 얻는다는 헛된 희망을 북돋음으로 도덕적 태만과 영적 게으름을 조장하지 않는다. 참된 종교는 필사자가 수명이 있는 동안에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을 헐뜯지 않는다. 필사자의 소득은 모두 첫 단계에 살아남는 불멸의 체험을 강화하는 데 바로 기여한다.
103:5.8 사람의 모든 이타적 충동이 단지 자연스러운 군집 본능이 발달된 것이라 가르칠 때, 이것은 사람의 이상주의에 치명적이다. 그러나 자기 혼의 이 상급 욕구가 필사 지성에 깃드는 영적 세력으로부터 방출된다는 것을 사람이 알게 될 때, 사람은 고귀하게 되고 힘차게 에너지를 얻는다.
103:5.9 영원하고 신다운 무엇이 자기 속에 살며 애쓴다는 것을 사람이 일단 완전히 깨닫는 것은 사람을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넘어서 들어올린다. 그래서 우리의 이상이 초인간 기원을 가졌다는 힘찬 믿음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의 이타적 확신, 사람이 형제라는 느낌을 현실로 만든다.
103:5.10 사람은 자기의 영적 분야에서 자유 의지가 있다. 필사 인간은 전능한 하나님의 엄격한 통치에 복종하는 힘없는 종이 아니요, 기계론적 우주 결정론에서 희망 없는 숙명에 희생되는 자도 아니다. 아주 참되게 말하면, 사람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설계하는 자이다.
103:5.11 그러나 사람은 압력을 받는다고 구원을 얻거나 고귀하게 되지 않는다. 영의 성장은 진화하는 혼 속에서 일어난다. 압력을 가하면 인격을 비뚤어지게 만들지 모르지만, 결코 성장을 자극하지 않는다. 교육시키는 압력조차도, 비참한 체험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겨우 부정적으로 유익하다. 모든 바깥 압력이 최소인 곳에서 영적 성장이 가장 크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도다[12].” 사람은 가정과 공동체, 교회와 국가의 압력이 가장 적을 때 가장 좋게 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보하는 사회에서 가정, 사회 단체, 교회, 국가가 할 일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103:5.12 사회의 종교 집단에서 한 구성원이 그런 단체의 요구 조건을 따랐을 때, 그는 종교적 관념이 진실인가, 그리고 종교적 체험이 사실인가에 관하여 자신의 개인적 해석을 완전히 표현하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도록 격려를 받아야 한다. 한 종교 집단의 안전은, 동질의 신학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통일되는 데 달려 있다. 한 종교 집단은 “자유 사상가”가 될 필요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교회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람이 형제인 것이 옳다고 인정하고, 감히 그 구성원에게 어떤 교리의 압력도 주지 않는다면 큰 희망이 있다.
103:6.1 신학은 인간 정신의 행동과 반응을 연구하는 것이다. 신학의 개인적 표현에는 심리학과, 신학의 체계적 묘사에는 철학과, 어느 정도 반드시 통합되어야 하기 때문에, 신학은 결코 하나의 과학이 될 수 없다. 신학은 언제나 |너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심리학이다.
103:6.2 사람이 |바깥|에서 그의 우주를 연구하고 조사하는 일에 접근할 때, 그는 여러 가지 자연 과학을 만들어낸다. 자신과 우주의 연구를 |안|에서 접근할 때, 그는 신학과 형이상학에 기원을 준다. 사물과 존재들로 이루어진 우주에 접근하는 이 두 가지 정반대되는 길에서 얻은 조사 결과와 가르침 사이에 처음에 나타나도록 정해진 많은 차이점을 조화하려는 노력으로, 후일에 철학이라는 기술이 발달한다.
103:6.3 종교는 영적 관점, 인간 체험의 |내면성|을 깨닫는 것과 상관이 있다. 사람의 영적 성품은 그에게 바깥에 있는 우주를 안에서 보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따라서, 순전히 인격이 체험하는 내면성의 견지에서 보았을 때, 모든 창조의 성질이 영적인 듯 보인다는 것이 참말이다.
103:6.4 사람이 자신의 육체 감각의 물질적 자질 및 관계된 지성의 파악을 통해서 우주를 분석하여 검사할 때, 우주는 기계적이고 에너지와 물질인 듯하다. 실체를 연구하는 그러한 기법은 안에 있는 우주를 바깥으로 내놓는 것이다.
103:6.5 우주에 대하여 논리와 일관성이 있는 철학 개념은 유물론(唯物論)이나 유심론(唯心論)의[2] 가설 위에 세울 수 없으니, 이는 이 두 생각 체계가, 보편적으로 적용되었을 때 우주를 왜곡하여 보도록 강요되기 때문이다. 즉 전자는 내면을 바깥에서 보는 우주를 접촉하며, 후자는 바깥을 안에서 보는 우주의 성질을 깨닫는다. 그러면 과학이나 종교는 결코 그 자체로서 저절로, 혼자 힘으로, 인간 철학의 안내가 없이, 신의 계시의 빛을 받지 않고서, 보편적 진리 및 관계를 적절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 없다.
103:6.6 언제나 사람 속에 있는 영은 자체를 표현하고 자아의 실현을 위하여 지성의 장치와 기법에 의존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물질 실체를 바깥에서 체험하는 것은 그 체험하는 인격자의 지성 의식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영적인 것과 물질인 것, 인간의 속 체험과 바깥 체험은 반드시 지성의 기능과 상관되며, 그들이 의식으로 깨닫는 것에 관하여, 지성의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사람은 머리 속에서 물질을 체험한다. 사람은 혼 속에서 영적 실체를 체험하지만, 머리 속에서 이 체험을 의식하게 된다. 지능은 필사자가 겪는 체험의 총합을 조화시키고, 항상 조정하고 제한하는 물건이다. 에너지 및 사물, 그리고 영적 가치, 이 두 가지는 의식하는 머리의 매체를 통해서 그 해석에 따라 색깔을 얻는다.
103:6.7 과학과 종교가 더 조화되도록 조정하는 데 너희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중간에 개재하는 상물질 사물 및 존재가 있는 세계의 영토를 너희가 까맣게 모르기 때문이다. 지역 우주는 물질ㆍ상물질ㆍ영으로 이렇게 실체가 명시되는 세 등급이나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상물질 각도의 접근은 자연 과학에서 발견된 것과 종교 정신의 작용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점을 지워 버린다. 이치를 따지는 것은 과학을 이해하는 기법이요, 믿음은 종교에서 통찰력을 얻는 기법이며, 상지혜는 상물질 수준의 기법이다. 상지혜는 초물질 실체에 대한 감수성이며, 그 내용이 지식 및 이치이고 그 본질이 믿음과 통찰력이기 때문에, 상지혜는 불완전한 성장을 보상하기 시작한다. 상지혜는 물질 인격자가 도달할 수 없는, 서로 달라지는 실체 파악을 초월 철학으로 절충하는 것이다. 상지혜는 어느 정도 육체로 사는 물질 인생 이후에 살아남은 체험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상당히 동떨어진 과학과 종교 분야의 상호 작용을 절충하는 어떤 방법을 소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많은 필사자가 인식했다. 그리고 형이상학은 잘 알려진 이 간격에 다리를 놓으려고, 사람이 쓸데없이 시도한 결과이다. 그러나 인간의 형이상학은 빛을 던지기보다 사람을 헛갈리게 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형이상학은 상물질의 상지혜의 부재를 메우려고, 의도는 좋았지만, 사람이 쓸데없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103:6.8 형이상학은 실패인 것이 입증되었다. 사람은 상지혜를 파악할 수 없다. 계시는 진리를 알아보는 상지혜 민감성이 물질 세계에 부재하는 것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기법이다. 계시는 진화하는 구체(球體)에서 이치를 따짐으로 발달한 형이상학의 혼란을 권위 있게 명료하게 해준다.
103:6.9 과학은 사람이 자기의 물리적 환경, 에너지 및 물질의 세계를 연구하려는 시도이다. 종교는 사람이 영적 가치가 있는 우주를 체험하는 것이다. 상당히 거리가 먼 이 개념들의 조사 결과를 우주에 대한 합리적이고 통일된 태도와 비슷한 무엇으로 조직하고 관련지으려는, 사람의 정신 노력으로 철학이 개발되어 왔다. 계시로 분명해진 철학은, 상지혜가 없는 가운데, 그리고 상지혜를 대신하는, 사람의 이치의 대용품―형이상학―이 붕괴하고 실패한 마당에, 적절하게 활동한다.
103:6.10 옛날 사람은 에너지 수준과 영 수준을 구별하지 않았다. 수학적인 것과 의지가 있는 것을 처음으로 분리하려고 애쓴 것은 보라 인종과 그 안드 족 후계자들이었다. 문명화된 사람은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한, 아주 예전의 그리스인과 수메르인의 발걸음을 갈수록 더 따라갔다. 그리고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철학은 영 개념과 에너지 개념 사이에 항상 벌어지는 틈에 다리를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간 시대에 이 여러 차이점은 최상위 안에서 조화된다.
103:6.11 상상과 추측은 과학의 범위를 연장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과학은 반드시 이치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이치를 따지는 것은 안정시키는 영향력이요 도움 되는 하녀이지만, 종교는 언제까지나 믿음에 의존한다. 그리고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 현상의 잘못된 해석, 과학과 종교라고 잘못 부르는 것들이 언제나 있어 왔고, 늘 있을 것이다.
103:6.12 과학을 어설프게 파악하고, 종교를 힘없이 붙잡고, 하다가 그만둔 형이상학의 시도로부터 사람은 철학의 뼈대를 지으려고 애썼다. 물질 세계와 영 세계 사이에 온통 중요하고 필수인 형이상학의 연결이 붕괴되지 않고, 형이상학이 물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상물질 간격에 다리 놓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면, 현대인은 정말로 자신과 우주에 대하여 가치 있고 마음을 끄는 철학을 세우려할 것이다. 필사 인간에게는 상물질 지성 및 물질에 관한 개념이 모자란다. |계시|는 우주에 대한 논리적 철학을 세우기 위하여, 그리고 그 우주에서 확실하고 안정된 자기 자리를 만족스럽게 이해하기 위하여, 사람이 무척 긴급히 필요한 이 개념 자료의 부족을 메우는 유일한 기법이다.
103:6.13 계시는 진화 인간이 상물질 간격을 메우는 유일한 희망이다. 상지혜의 도움 없이, 믿음과 이치는 합리적 우주를 파악하고 연구할 수 없다. 상지혜의 통찰력이 없이, 필사인은 물질 세계의 현상에서 선(善)ㆍ사랑ㆍ진리를 헤아릴 수 없다.
103:6.14 사람의 철학은 물질 세계를 향하여 상당히 기울어질 때, 합리주의나 |자연주의|가 된다. 영적 수준을 향하여 특별히 기울어질 때 철학은 |이상주의|나 신비주의가 되기도 한다. 몹시 불행하게도 형이상학에 기댈 때, 철학은 어김없이 |회의|에, 혼란에 빠지게 된다. 지난 시대에, 사람의 지식과 지적 평가의 대부분은 이 세 가지 파악의 왜곡 중 하나에 빠졌다. 철학은 감히 직선 모양의 논리로 실체에 관한 해석을 예측하지 않는다. 철학은 결코 실체가 타원 모양으로 균형된 것, 그리고 모든 관계 개념이 본질적으로 굽어진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03:6.15 필사인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철학은 과학의 이치에, 종교의 믿음에, 그리고 계시가 주는, 진리를 알아보는 통찰력에, 논리적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이러한 통합으로 사람은 적당한 형이상학을 개발하지 못하고 상물질의 상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상할 수 있다.
103:7.1 이치를 따지는 것은 과학을 지탱하고 믿음은 종교를 지탱한다. 추론에 바탕을 두지는 않아도, 믿음은 이치에 맞는다. 비록 논리에 의존하지 않지만, 그런데도 건전한 논리가 믿음을 북돋아 준다. 이상적 철학조차 믿음을 기를 수 없다[13]. 정말로, 과학과 더불어, 믿음은 그러한 철학의 바로 그 근원이다. 믿음, 인간의 종교적 통찰력은 오로지 계시함으로 사람에게 확실히 가르칠 수 있고, 영이신 하나님이 영적 조절자로 깃드심을 필사자가 몸소 겪어야 확실하게 깊어질 수 있다.
103:7.2 참된 구원은, 물질을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상물질 연락이 있는 분야를 거쳐서, 영적 상호 관계가 있는 높은 우주 상태에 이르기까지, 필사 지성을 신답게 진화시키는 기법이다. 지상의 진화에서 물질적 직관 본능이 논리로 따져 얻은 지식의 출현을 앞서는 것처럼, 영적 직관의 통찰력이 나타나는 것은 상물질 및 영적 추리가 나중에 출현하고 하늘에서 진화하는 훌륭한 프로그람을 체험할 것을 미리 알리며, 이 천상의 진화는 일시적 인간의 잠재성을 실제로, 신다운 영원한 인간, 파라다이스 최후자로 변화시키는 사업이다.
103:7.3 그러나 하늘 가는 사람이 하나님 체험을 얻으려고 안으로, 파라다이스를 향하여 손을 뻗음에 따라서, 마찬가지로 그 사람은 물질 우주의 에너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바깥으로, 공간을 향하여 손을 뻗고 있을 것이다. 과학의 진보는 사람이 땅에서 사는 인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이 지역 우주와 초우주를 올라가는 체험은, 적지 않게 에너지의 변질과 물질 변형의 연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지만, 신은 하나되는 것이요, 신이 하나됨은 우주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영적 가치를 담을 뿐 아니라, 우주 통제자와 파라다이스 섬의 에너지 사실을 또한 인식하고, 한편 이 두 단계의 우주 실체는 합동 행위자의 지성 관계에서 완전히 서로 상관되고, 최상 존재의 솟아나는 신의 유한 수준에서 통일된다.
103:7.4 체험적 철학의 중재로 과학적 태도와 종교적 통찰력을 연합하는 것은 사람이 파라다이스로 올라가는 오랜 체험의 일부이다. 수학이 추정(推定)한 것과 통찰력이 확실히 얻은 것은 최대의 달성인 최상위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수준의 체험에서, 지성 논리의 조화시키는 기능을 반드시 필요로 할 것이다.
103:7.5 그러나 한 인격의 과학적ㆍ영적 모습이 진리에 지배되고, 진리가 무슨 결론을 내리든 상관 없이 어디든지 이끄는 대로 진리를 따를 것을 진심으로 바라지 않는 한, 논리는 과학의 조사 결과와 종교의 통찰력을 조화시키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103:7.6 논리는 철학의 기법이요, 철학의 표현 방법이다. 참 과학의 분야 안에서, 추리는 반드시 진정한 논리에 순종한다. 참된 종교의 분야 안에서, 속을 들여다보는 과학적 접근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믿음이 도무지 근거가 없어 보이더라도, 믿음은 안에서 보는 관점의 기초에서 볼 때 반드시 논리가 있다.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면서, 우주는 물질로 보일지 모른다. 안에서 바깥을 보면, 바로 그 우주는 온통 영적인 듯이 보인다. 이치는 물질을 의식함에서 생기고, 믿음은 영적 의식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계시로 강화된 철학의 중재를 통해서, 논리는 안과 바깥의 관점 모두를 확인할 수도 있고, 이렇게 함으로 과학과 종교, 이 두 가지를 안정시킨다. 따라서, 공동으로 철학의 논리와 접촉함으로, 과학과 종교, 이 두 가지가 갈수록 더 서로에게 관대하게 되고, 회의(懷疑)가 더욱 줄어들 수도 있다.
103:7.7 발달하는 과학과 종교가 필요한 것은 더욱 탐구하는, 두려움 없는 자아 비판이요, 진화적 지위의 불완전함을 더욱 크게 인식하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의 스승들은 흔히 너무 자신 있고 독단적이다. 과학과 종교는 오로지 그들이 가진 |사실|에 대하여 자체를 비판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의 무대를 떠나는 순간, 이치는 물러나든지, 아니면 거짓 논리의 배우자로 빨리 퇴화되어 버린다.
103:7.8 진리―우주 관계, 우주 사실 및 영적 가치의 이해―는 진리의 영이 베푸는 봉사를 통해서 얻는 것이 최선이고, |계시|로 비평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계시는 과학도 종교도 창시하지 않는다. 계시의 기능은 과학과 종교를 실체의 진리와 조정하는 것이다. 계시가 없는 가운데서 또는 계시를 받아들이거나 붙잡지 못할 때, 필사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만든 쓸데없는 형이상학의 손짓에 의존했고, 형이상학은 인간에게 진리의 계시, 또는 상물질 인격의 상지혜를 대신하는 유일한 대용품이다.
103:7.9 물질 세계를 다루는 과학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리적 환경을 통제하고, 어느 정도 지배할 수 있게 만든다. 영적 체험의 종교는 친교하는 충동의 근원이며, 이것은 과학 시대의 문명이 복잡한 와중에서 사람들이 함께 살도록 만든다. 형이상학, 그러나 계시는 더 확실히, 과학과 종교, 이 둘을 발견하기 위하여 공통으로 만나는 장소를 마련해 주며, 동떨어졌어도 서로 의존하는 이 생각 분야들을 논리 있게 서로 연결지어서, 과학적으로 안정되고 종교적으로 확실한, 잘 균형된 철학으로 만드는 인간의 노력을 가능하게 한다.
103:7.10 필사자의 지위에서는 아무것도 절대로 증명할 수 없다. 과학과 종교 모두가 가정(假定)에 바탕을 둔다. 상물질 수준에서 과학과 종교의 여러 가설은 상지혜 논리로 어느 정도 증명이 가능하다. 최대의 지위인 영적 수준에서, 실제로 실체를 맛보고 실체와 함께 맛보는 체험 이전에, 유한한 증명을 보일 필요가 차츰 사라진다. 그러나 그때에도 유한한 것을 지나서 증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많이 있다.
103:7.11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분야는, 증명되지 않았어도, 사람의 지성 자질을 구성하는 실체에 대한 민감성을 이용하여 받아들인 어떤 여러 가정에 근거를 둔다. 물질ㆍ움직임ㆍ생명, 이 세 가지 실체를 |가정|함으로, 과학은 자랑스러운 그 추리 경력을 시작한다. 종교는 지성ㆍ영ㆍ우주―즉 최상 존재―이 세 가지가 정당함을 가정하고서 시작한다.
103:7.12 과학은 공간에서 시간적 에너지와 물질을 다루는 수학을 생각하는 분야가 된다. 종교는 유한한 현세의 영 뿐 아니라, 또한 영원한 최고의 영을 다루기를 가정한다. 오로지 상지혜를 오랫동안 겪는 체험을 통해서, 우주를 파악하는 이 두 가지 극단이 기원ㆍ기능ㆍ관계ㆍ실체ㆍ운명을 비슷하게 풀이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일곱 으뜸 영의 회로에는 에너지와 영의 분산이 최대로 조화되어 있다[14]. 최상위의 신 속에 에너지와 영이 처음으로 통일되고, 첫째 근원 중심, 스스로 계신 이의 무한 속에 최종으로 통일된다.
103:7.13 |이치를 따지는 것|은 에너지와 물질로 이루어진 물리적 세계 속에서, 그 세계와 함께 겪는 체험에 관하여, 의식이 내리는 결론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믿음|은 영적 의식―필사자가 달리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정당함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논리|는 믿음과 이치가 통일되어 진리를 찾아 통합하여 전진하는 것이며, 필사 존재를 구성하는 지성 자질에, 사물ㆍ의미, 가치 기준을 날 때부터 인식하는 데, 기초를 둔다.
103:7.14 생각 조절자의 계심에는 영적 실체가 있다는 진정한 증명이 있다. 그러나 이 계심이 정당한 것을 바깥 세계에 증명할 수 없고, 이처럼 하나님이 깃드심을 체험하는 사람에게만 그럴 수 있다. 조절자를 의식하는 것은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선을 초월 지성이 파악하는 것, 그리고 인격의 사랑하는 동기에 기초를 둔다.
103:7.15 과학은 물질 세계를 발견하고, 종교는 그 세계를 평가하고, 철학은 그 의미를 풀이하려 애쓰며, 한편 과학의 물질적 관점과 종교의 영적 개념을 조정한다. 그러나 역사(歷史)는 과학과 종교가 결코 완전히 의견이 같을 수 없는 영역이다.
103:8.1 과학과 철학이 모두 이치와 논리로 하나님이 있음직하다는 것을 가정할까 싶어도,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몸소 겪는 종교적 체험만이 성격을 가진 그러한 최상의 신이 확실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생생한 진리를 그렇게 육신화하는 기법으로, 하나님이 아마도 있으리라는 철학적 가정은 종교적 현실이 된다.
103:8.2 하나님이 확실히 계심을 체험하는 것에 관한 혼란은 개인들이 따로, 그리고 다른 종족의 사람들이 그 체험을 달리 풀이하고 진술하는 데서 생겨난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에 |관한| 대화는 지적ㆍ철학적이니까 서로 다르며, 때때로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허위이다.
103:8.3 착하고 고귀한 남자가 제 아내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지만 결혼 애정 심리학의 필기 시험에 도저히 만족스럽게 합격할 수 없을지 모른다. 또 다른 남자는 제 배우자를 거의 또는 전혀 사랑하지 않아도, 그러한 시험에 아주 적절히 합격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의 참된 성품을 들여다보는 통찰력이 불완전하다고 그의 사랑의 현실이나 성실성을 한 푼어치도 무효로 만들지는 않는다.
103:8.4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믿음으로 그를 알고 사랑한다면―그러한 체험의 현실이, 과학이 의심을 넌지시 비치는 말이나, 논리로 트집잡기나, 철학의 가설, 아니면 하나님 없는 종교를 만들려는,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의 영리한 제안 때문에, 어떤 면에서도 줄어들거나 상처 입게 하지 말라.
103:8.5 하나님을 아는 신자의 확신은 의심하는 유물론자의 불확신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체험을 가진 신자의 깊은 믿음과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불신자의 불확신에 힘차게 도전해야 한다.
103:8.6 철학이 과학과 종교 양자에게 최대의 도움을 주려면, 유물론과 범신주의의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오로지 인격의 실체―변화 가운데 영구한 것―을 인식하는 철학이 사람에게 도덕적 가치가 있을 수 있고, 물질 과학과 영적 종교를 다루는 이론 사이에 다리로서 소용될 수 있다. 계시는 진화하는 철학의 허약성을 보상하는 물건이다.
103:9.1 신학(神學)은 종교의 지적 내용을 다루고, 형이상학(계시)은 철학적 모습을 다룬다. 종교적 체험은 종교의 영적 |내용이다|. 종교의 지적 내용에 신화 같은 변덕과 심리학적 망상이 있고, 형이상학의 잘못된 가정(假定)과 스스로 속이는 기법, 종교의 철학적 내용의 정치적 왜곡과 사회ㆍ경제적 변질이 있는데도, 개인적 종교에서 얻는 영적 체험은 여전히 진정하고 타당하다.
103:9.2 종교는 단지 생각 뿐 아니라 느낌ㆍ행동ㆍ생활과 상관이 있다. 사고(思考)는 물질 생활과 더 가깝게 관계되며, 온통 그렇지는 않지만, 주로 이치와 과학의 사실에 지배를 받고, 영의 분야를 향한 비물질 범위에서는 진리에 지배를 받아야 한다. 사람의 신학이 아무리 착각이고 그릇되더라도, 사람의 종교는 전적으로 진정하고 영구히 참될 수 있다.
103:9.3 최초의 형태의 불교는 유란시아의 진화 역사 전체를 통해서 대두된 바, 신이 없는 최선의 종교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 종교가 발전되자, 신이 없는 채로 남지는 않았다. 신앙이 없는 종교는 모순이다. 하나님 없이, 종교는 하나의 철학적 모순이요 지적 부조리이다.
103:9.4 자연 종교가 마술과 신화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후일에 계시 종교들의 실체와 진리, 그리고 예수가 가졌던 종교의 완벽하고 유익한 복음을 무효로 만들지 않는다.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은 마침내 종교에서 마술을 믿는 미신, 신화(神話)의 환상, 전통적 독단의 사슬을 벗겨 버렸다. 그러나 이 초기의 마술과 신화는 물질을 초월하는 가치와 존재들의 계심과 실체를 가정함으로써, 나중에 나타나는 우수한 종교를 위하여 무척 효과 있게 길을 닦았다.
103:9.5 종교적 체험은 순전히 영적ㆍ주관적 현상이지만, 그러한 체험은 우주의 객관적 실체의 가장 높은 영역을 향하여 분명하고 생생한 믿음의 태도를 받아들인다. 종교적 철학의 이상은, 온 우주의 무한한 아버지의 절대적 사랑에 사람이 조건 없이 기대도록 이끌 그러한 믿음이요 신뢰이다. 그러한 진정한 종교적 체험은 이상주의적 욕구를 철학으로 구체화한 것을 훨씬 초월한다. 그런 체험은 실제로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오로지 파라다이스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행하는 일에만 아랑곳한다. 그러한 종교를 가졌다는 표시는, 최상의 신을 믿는 믿음, 영원히 살아남는다는 희망, 그리고 사랑, 특히 동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103:9.6 신학이 종교의 주인이 될 때, 종교는 죽는다. 종교는 생명이 아니라 교리가 된다. 신학(神學)의 사명은 단지 개인이 영적 체험을 자의식하도록 돕는 것이다. 신학은 종교의 체험적 주장을 정의하고 분명히 밝히고 해설하고 정당화하는 종교적 노력이며, 결국 이 주장은 오직 생생한 믿음으로만 입증할 수 있다. 우주의 상급 철학에서, 지혜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연합하게 된다. 이치ㆍ지혜ㆍ믿음은 사람의 가장 높은 인간적 성취이다. 이치를 따지는 것은 사람에게 사실의 세계, 사물을 소개하며, 지혜는 사람에게 진리의 세계, 즉 관계를 소개한다. 믿음은 사람을 신의 세계로, 영적 체험을 겪게 한다.
103:9.7 믿음은 이치가 갈 수 있는 데까지 아주 기꺼이 이치를 데리고 가며, 그리고 나서 철학의 한계 끝까지 지혜와 함께 계속 간다. 다음에 믿음은 오직 진리의 동반을 받으면서, 한이 없고 결코 그치지 않는 우주 여행 길을 감히 떠난다.
103:9.8 과학(지식)은 이치가 정당하다, 사람이 우주를 파악할 수 있다는 본래의(보조 영의) 가정 위에 기초를 둔다. 철학(조화된 이해)은 지혜가 정당하다, 물질 우주가 영적 우주와 조화될 수 있다는 본래(지혜 영)의 가정(假定) 위에 기초를 둔다. 종교(몸소 영적으로 체험하는 진리)는 믿음이 정당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본래(생각 조절자)의 가정 위에 기초를 둔다.
103:9.9 필사 인생의 현실을 충분히 깨닫는 것은 이치ㆍ지혜ㆍ믿음, 이 세 가지의 가정을 점진적으로 기꺼이 믿으려 하는 태도에 있다. 그러한 인생은 진리에 자극을 받고 사랑이 지배하는 인생이며, 이것들은, 존재한다는 것을 물질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객관적 우주 실체의 이상이다.
103:9.10 일단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인식하고 나서, 이치를 따지는 것은 지혜를 나타낸다. 지혜가 옳은 것과 그른 것, 진리와 잘못 사이에서 선택할 때, 지혜는 영의 인도하심을 보여준다. 이처럼 지성ㆍ혼ㆍ영의 활동은 늘 가까이 연합되고, 기능 면에서 서로 연결된다. 이치는 사실에 관한 지식을 다루고, 지혜는 철학과 계시를, 믿음은 살아 있는 영적 체험을 다룬다. 진리를 통해서 사람은 아름다움에 이르고, 영적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선의 높이까지 올라간다.
103:9.11 믿음은 단지 신의 계심이 주는 신비스러운 느낌 뿐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길로 이끈다. 믿음은 그 감정적 결과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참된 종교는 만족스러운 감정일 뿐 아니라, 믿고 아는 체험이다.
103:9.12 종교적 체험에는 그 영적 내용에 비례하는 한 실체가 있으며, 그러한 실체는 이치ㆍ과학ㆍ철학ㆍ지혜, 그리고 인간의 모든 다른 성취를 뛰어넘는다. 그러한 체험으로 얻은 확신은 무너질 수 없고, 종교적 생활의 논리는 사람이 반박할 수 없다. 그러한 지식의 확신은 인간을 초월한다. 그 만족감은 극도로 신성하고, 그 용기는 꺾을 수 없고, 그 헌신에 의심이 없으며, 그 충성은 더할 나위 없고, 그 운명은 최종이다―영원하고 최종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103:9.13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이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