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0.1 유란시아에서 어떤 체계적 계시가 내리기 오래 전부터, 사람은 진화하는 체험의 일부로서 자연히 생긴 종교를 소유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기원을 가진 이 종교는 그 자체로서 사람이 가진, 동물을 초월하는 자질의 산물이었다. 진화 종교는 야만인ㆍ미개인ㆍ문명인 안에서 작용하고, 그에게 부딪치는 다음 영향력의 보살핌을 통해서, 수천 년에 걸쳐서 인류가 체험적 경력을 쌓는 동안 천천히 생겼다:
92:0.2 1. |예배 보조자|―동물 의식에서 실체를 파악하는, 동물 초월 잠재성이 나타나는 것. 이것을 신을 찾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라고 불러도 좋다.
92:0.3 2. |지혜 보조자|―상급의 표현 경로에서, 그리고 늘 확대되는 신의 실체 개념을 향하여, 경건한 지성 속에 찬미를 지도하는 성향이 나타나는 것.
92:0.4 3. |성령|(聖靈)―이것은 지성을 초월하는 초기의 선물이며, 모든 진정한 인격 안에 어김없이 나타난다. 예배를 갈망하고 지혜를 바라는 지성에게 베푸는 이 봉사는 신학 개념으로서, 또 실제로 사실로 인격이 체험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살아남는다는 가설을 스스로 깨닫는 능력을 창조한다.
92:0.5 이 세 가지 신성한 보살핌이 나란히 작용하는 것은 진화적 종교의 성장을 시작하고 추진하기에 아주 넉넉하다. 이 영향을 나중에 생각 조절자, 세라핌, 진리의 영이 확대하며, 이 모두가 종교의 발전 속도를 빠르게 한다. 이 매체들은 유란시아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왔고, 이 행성이 사람 사는 구체로 남아 있는 한, 여기서 계속할 것이다. 이 신성한 매체들의 많은 잠재성은 아직까지 표현될 기회를 가진 적이 없다. 필사자의 종교가 상물질 가치와 영적 진리의 숭고한 꼭대기를 향하여 한 수준 한 수준 올라감에 따라서, 많은 것이 다가오는 시대에 드러날 것이다.
92:1.1 초기의 공포증과 귀신들로부터, 영들을 처음에 강제하고 다음에 구슬리려는 노력을 포함하여, 연속된 여러 발전 단계를 통해서 종교가 진화한 것을 추적해 보았다. 부족의 주물은 성장하여 토템과 부족 신이 되었고, 마술 주문은 현대의 기도가 되었다. 처음에 하나의 희생 행위였던 할례는 위생 절차가 되었다.
92:1.2 종족들이 야만인이었던 초기 시절 전체에 걸쳐서, 종교는 자연 숭배로부터 귀신 숭배를 거쳐서 주물 숭배에 이르기까지 진보했다. 문명이 밝아옴과 함께 인류는 더 신비스러운 상징적 관념을 신봉했고, 한편 이제 성숙기에 가까워지면서 인류는 참 종교를 이해하기에, 아니 바로 진리의 계시가 시작되는 것을 위해서도 성숙해지고 있다.
92:1.3 종교는 영적 관념과 환경에 대하여 지성이 생물학적으로 반응함으로 일어난다. 종교는 한 민족 안에서 좀처럼 멸망하거나 바뀌지 않는 것이다. 종교는 어느 시대에도 신비스러운 것에 대한 사회의 조정이다. 하나의 사회 제도로서, 종교는 의식ㆍ상징ㆍ제사ㆍ성서ㆍ제단ㆍ성소(聖所)ㆍ성전을 포함한다. 거룩한 물, 유품ㆍ주물ㆍ부적ㆍ예복ㆍ종(鐘)ㆍ북ㆍ사제직이 모든 종교에 공통으로 있다. 그리고 순전히 진화된 종교를 마술이나 요술로부터 온전히 분리하기는 불가능하다.
92:1.4 신비와 권능이 언제나 종교적 느낌과 두려움을 자극해 왔고, 한편 감정은 이 둘의 발달을 강력하게 조절하는 요소로서 늘 작용해 왔다. 두려움은 언제나 기본되는 종교적 자극제였다. 두려움은 진화 종교에서 신들의 모습을 꾸미고, 원시 신자의 종교 의식(儀式)을 자극한다.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서, 두려움은 경외ㆍ찬미ㆍ존경ㆍ동정심으로 인하여 수정되고, 그리고 나서 가책과 뉘우침이 이를 더욱 조절한다.
92:1.5 어느 아시아 민족은 “하나님은 크게 두려운 분이라”고 가르쳤다[1]. 그것은 순전히 진화된 종교의 산물이다[2]. 가장 높은 부류의 종교적 생활의 계시가 된 예수는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선언했다.
92:2.1 종교는 모든 인간 제도 가운데 가장 경직되고 신축성이 없지만, 변하는 사회 뒤에 처져서 적응한다. 결국, 진화된 종교는 변하는 도덕 관습을 반영하며, 다시 이것은 계시된 종교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느리고 확실하게, 하지만 투덜거리면서, 종교(예배)는 지혜―체험적 논리가 안내하고 신의 계시가 비춰 주는 지식―의 발자국을 좇아서 따라간다.
92:2.2 종교는 도덕 관습에 집착한다. 이미 |있던| 것은 오래 되었고, 신성하다고 생각된다. 다른 이유가 아니고 이 때문에, 돌로 만든 연장은 청동기 시대와 철기(鐵器) 시대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3]. 이 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나에게 돌로 된 제단을 만들고자 하거든 너희는 깎은 돌로 세우지 말지니, 만드는 데 연장을 쓰면, 너희는 제단을 더럽혔느니라.” 오늘날도, 힌두인은 원시의 불 송곳을 써서 제단에 불을 지핀다. 진화된 종교의 과정에서, 새로운 것은 언제나 신성 모독으로 여겼다[4]. 성찬(聖餐)은 새롭고 가공된 먹을 것이 아니라, 가장 원시적 식품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불로 구운 고기, 쓴 나물과 함께 이스트 넣지 않은 빵.” 온갖 종류의 사회 관행, 그리고 법 절차까지도 옛 모습에 집착한다.
92:2.3 음탕하다고 여길 수 있는 많은 것이 다른 종교의 성서에 발표된 것을 보고 현대인이 놀랄 때, 지나가는 세대들이 그들의 선조가 거룩하고 신성하다고 여긴 것을 두려워 없애지 못했다는 것을 멈추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세대가 음탕하다고 볼 수도 있는 많은 것을, 이전 세대들은 용납된 관습의 일부로, 아니 인정받은 종교 의식이라고까지 여겼다. 상당한 양의 종교적 논쟁은, 오래 되었지만 꾸짖어 마땅한 관습을 새로 제시된 논리와 절충하고, 오래 되고 묵은 풍습을 신조로 영속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그럴듯한 이론을 찾으려는 끊임없는 시도 때문에 일어났다.
92:2.4 그러나 종교의 성장을 너무 갑자기 가속하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을 따름이다. 한 종족이나 민족은 어떤 상급 종교로부터도, 적응하는 천재와 함께, 당대의 그 진화적 지위와 상당히 일치되고 양립할 수 있는 것을 동화할 수 있을 뿐이다. 사회ㆍ기후ㆍ정치ㆍ경제 조건은 모두, 종교적 진화 과정과 진보를 결정하는 데 온통 영향을 미친다. 사회의 도덕은 종교, 다시 말해서, 진화된 종교에 좌우되지 않는다. 오히려 종족의 도덕이 종교의 형태를 결정한다.
92:2.5 사람의 종족들은 이상하고 새로운 종교를 그저 겉으로만 받아들인다. 새 종교를 그들의 도덕 관습과 옛날의 믿는 방식에 실제로 적응시킨다. 이것은 어떤 뉴질랜드 부족의 예가 잘 보여준다. 이 부족의 사제들은 이름만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뒤에, 가브리엘로부터 바로 계시를 받았다고 고백했는데, 그 계시의 취지는 바로 이 부족이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 되었고, 그들이 절제 없는 성관계, 그리고 오래 되고 꾸짖어 마땅한 풍습, 그들의 수많은 다른 풍습에 마음대로 빠지는 것을 허락한다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새로 기독교인이 된 자들은 모두, 새롭고 덜 까다로운 이 기독교 해석으로 즉시 전향하였다.
92:2.6 종교는 언젠가 온갖 종류의 반대되고 모순되는 행위를 인가한 적이 있고, 지금 부도덕하거나 죄라고 여기는 거의 모든 것을 한때는 인정했다. 체험으로 배우지 않고 논리의 도움을 받지 않은 양심은, 결코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안전하고 틀림없는 안내자가 된 적이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양심은 인간의 혼에게 말씀하는 신의 목소리가 아니다. 양심은 다만 존재의 어떤 현재 단계에서도 그 관습의 도덕적ㆍ윤리적 알맹이의 총합이다. 양심은 단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인간답게 생각한 이상적 반응을 나타낼 뿐이다.
92:3.1 인간의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화석을 지닌, 지난 시대의 사회의 지층을 검사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의 도덕 관습은 그러한 신들을 처음 생각한 사람들의 도덕률을 참되게 반영한다. 옛 종교와 신화(神話)는 사라진 지 오래된, 민족들의 신앙과 전통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 이 옛 의식 관습은 새로운 경제 관습과 사회의 진화와 나란히 지속하며, 물론 터무니없이 모순되어 보인다. 그 의식(儀式)의 남은 찌꺼기는 지난날의 민족 종교의 참 모습을 보여준다. 그 종파들은 진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교리를 널리 펼치려고 형성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여라.
92:3.2 종교는 언제나 대체로 관례ㆍ의식ㆍ관행ㆍ예식ㆍ독단의 문제였다. 종교는 끈질기게 해악을 끼치는 잘못, 즉 선택 받은 백성이라는 망상에 보통 물들어 있다. 주문 외우기, 영감, 계시, 신을 달래기, 뉘우침, 죄값 물어내기, 중재, 희생물 바치기, 기도, 죄 고백, 예배, 죽은 뒤에 부활, 성찬ㆍ의식ㆍ몸값ㆍ구원, 몸값 내고 되찾기, 계약ㆍ더러움ㆍ정화(淨化)ㆍ예언ㆍ원죄(原罪)와 같은 기본적 종교 관념―이 모두가 원시의 귀신 공포증이 있었던 옛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92:3.3 원시 종교는 물질적 존재를 위한 싸움이 무덤을 넘어서 사는 것을 포함하려고 연장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신조를 유지하는 것은 자아 보존 투쟁이, 상상하는 귀신 및 영 세계의 영토까지 연장된 것이다. 그러나 진화된 종교를 비난할 유혹을 받을 때 조심하여라. 바로 진화된 종교는 |일어난 사실임|을 기억할지니,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어떤 개념의 힘은 그 개념이 확실하거나 진실한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생생하게 인간에게 호소하는가에 있다.
92:3.4 진화된 종교는 변화나 수정을 위하여 아무런 대책이 없다. 과학과 달리, 진화된 종교는 그 자체를 진취적으로 수정하는 방안을 마련하지 않는다[5]. 진화된 종교는 그 추종자들이 그 종교가 “|유일한 진리|”라고 믿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성자들이 전해 받은 신앙”은 이론적으로 최종이고 틀릴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진보가 그 단체 자체를 수정하거나 파괴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숭배 단체는 발전에 저항한다. 따라서 언제나 숭배 단체에게 수정을 강제해야 한다.
92:3.5 오로지 두 가지 영향이 자연 종교의 교리를 수정(修正)하고 향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느리게 진행하는 도덕 관습의 압력이요, 다른 하나는 신기원의 계시가 정기적으로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리고 진보가 느린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옛날에는 진취성이나 창의성이 있으면 요술사로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뜻했다. 숭배 단체는 몇 세대에 걸친 시대와 오랜 세월에 걸친 주기를 가지고 느리게 진보한다. 그러나 그 단체는 앞으로 나아간다. 귀신을 믿는 진화된 신앙은 계시된 종교의 철학을 받아들일 기초를 쌓았고, 이것은 궁극에 그 근원인 미신을 파괴할 것이다.
92:3.6 종교는 여러 가지로 사회의 발전에 장애가 되었지만, 종교가 없이 지속되는 도덕이나 윤리, 가치 있는 문명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종교는 많은 비종교 문화의 어머니가 되었다: 조각은 우상 만들기에서, 건축은 성전 짓기에서, 시(詩)는 주문에서, 음악은 예배하는 노래에서, 연극은 영의 인도를 대신하는 연기에서, 춤은 철마다 예배하는 잔치에서 비롯하였다.
92:3.7 그러나 종교가 문명의 발전과 보존에 필수였다는 사실에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자연 종교는 달리 그 종교가 육성하고 유지한 바로 그 문명을 또한 절름발이로 만들고 방해하려고 많이 수고했다는 것을 적어야 한다. 종교는 산업 활동과 경제 발전을 방해했다. 노동을 헤프게 쓰고 자본을 낭비했다. 종교는 가족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평화와 선의를 적절히 육성하지 않았다. 종교는 때때로 교육을 게을리 했고 과학의 성장을 더디게 만들었다. 죽음을 부유하게 꾸미기 위해서 삶을 지나치게 빈곤하게 만들었다. 진화된 종교, 인간의 종교는 정말로 이 모든 것, 그리고 더 많은 잘못ㆍ오류ㆍ실수를 저지른 죄가 있다. 그런데도 종교는 문화적 윤리, 문명화된 도덕, 사회의 단결을 유지했고, 계시된 종교가 후일에 많은 이러한 진화적 결점을 메우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92:3.8 진화된 종교는 사람에게 가장 비용이 많이 든 제도였지만, 비할 수 없이 효과가 있었다. 인간의 종교는 오직 진화된 문명에 비추어서 정당화될 수 있다. 사람이 동물의 진화에서 올라간 결과가 아니라면, 그러한 종교 발전 과정을 정당화할 수 없을 것이다.
92:3.9 종교는 자본의 축적을 용이하게 만들었고, 어떤 종류의 일을 육성했다. 사제들의 여가는 예술과 지식을 권장했고, 결국 그 종족은 초기에 윤리적 기법의 온갖 잘못의 결과로서 많은 것을 얻었다. 정직한 샤먼과 그렇지 않은 샤먼은 비용이 무척 비싸게 들었어도, 그들은 제 값을 충분히 했다. 지식 계급과 과학 그 자체는, 기생하는 사제 계급으로부터 솟아나왔다. 종교는 문명을 육성하고, 사회의 연속성을 마련해 주었고, 세세토록 도덕을 유지하는 경찰력이 되었다. 종교는 인간의 단련과 자제를 마련해 주었고, 이것은 |지혜|가 생길 수 있게 만들었다. 종교는 진화에서 효과 있는 채찍이며, 이 채찍은 게으르고 고통 받는 인류를 지능이 놀고 있는 자연 상태로부터 더 높은 이성과 지혜의 수준으로, 앞으로, 위로 가도록 사정 없이 몬다.
92:3.10 그리고 동물로서 올라가서 얻은 이 신성한 유산, 진화된 종교를 계시된 종교로 계속 검열함으로, 그리고 진정한 과학의 불타는 용광로를 이용하여 늘 계속 다듬고 고귀하게 만들어야 한다.
92:4.1 계시는 진화를 따르지만 언제나 진취적이다. 한 세계의 역사 시대를 통해서 종교의 계시는 늘 확대되고 있고 연달아 사람을 더욱 깨우치는 것이었다. 연속하여 진화하는 종교들을 분류하고 검열하는 것이 계시의 사명이다. 그러나 계시가 진화된 종교들을 높이고 개선하려면, 신의 그러한 방문은 그 가르침을 발표하는 시대의 생각 및 반응과 너무 멀리 동떨어지지 않은 가르침을 묘사해야 한다. 이처럼 계시는 언제나 진화와 연락을 유지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한다. 계시된 종교는 반드시 받아들이는 사람의 능력에 제한을 받는다.
92:4.2 그러나 겉으로 나타나는 연락이나 유래와 상관 없이, 계시된 종교는 반드시, 최종 가치를 가진 어떤 신, 그리고 죽은 뒤에 인격 신분이 살아남는다는 어떤 개념을 믿는 신앙의 특징을 가진다.
92:4.3 진화된 종교는 감상적이지만 논리가 없다. 그 종교는 가상하는 귀신 및 영 세계를 믿는 것에 대한 사람의 반응이다―미지의 것을 깨닫고 두려워함으로 자극 받는, 인간의 믿음이자 반사 작용이다. 실재하는 영적 세계가 계시 종교를 제시한다. 계시 종교는 우주의 신들을 믿고 기대려 하는 필사자의 갈망에 지능을 초월하는 우주가 반응하는 것이다. 진화된 종교는 인류가 멀리 빙 돌아서 진리를 찾으려고 더듬는 것을 그린다. 계시된 종교는 바로 그 |진리이다|.
92:4.4 종교적 계시를 내린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신기원(新紀元)의 중요성을 가진 것은 겨우 다섯이다. 이것들은 다음과 같다:
92:4.5 1. |달라마시아||의 가르침|. 칼리가스티아 영주 참모진의 유형(有形) 참모 1백인이 참된 첫째 근원 중심 개념을 처음으로 유란시아에 선포하였다. 확대되는 이러한 신의 계시는 행성의 탈퇴와 교육 체제의 붕괴로 갑자기 끝날 때까지, 30만 년이 넘도록 이어졌다. 반이 한 일을 제쳐놓고, 달라마시아 계시의 영향은 온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아담이 도착할 때가 되자 놋 족속조차 이 진리를 잊어버렸다. 1백인의 가르침을 받은 모든 사람 가운데, 홍인이 그 가르침을 가장 오래 지녔다. 그러나 큰 영의 관념은 아메리카 인디안의 종교에서 겨우 흐릿한 개념이었고, 기독교와 접촉을 가졌을 때 그 개념이 크게 분명해지고 강화되었다.
92:4.6 2. |에덴||의 가르침|. 아담과 이브는 진화 민족들에게 만물의 아버지 개념을 다시 묘사했다. 첫째 에덴의 붕괴는 아담의 계시가 미처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에 그 과정을 멈추게 했다. 그러나 중지된 아담의 가르침을 셋 족속 사제들이 계속하였고, 이 진리의 얼마큼은 세계에서 결코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 레반트의 종교적 진화의 경향 전체가 셋 족속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수정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500년이 되자 인류는 에덴 시절에 후원받았던 계시를 대체로 잃어버렸다.
92:4.7 3. |살렘||의 ||멜기세덱|. 네바돈의 이 비상시 아들은 유란시아에서 세 번째로 진리의 계시를 개시했다. 그의 가르침의 근본 교훈은 |신뢰|와 |믿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한 은혜로움을 의지할 것을 가르쳤고, 믿음은 행위요, 행위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다고 선포했다. 그의 가르침은 다양한 진화된 종교의 관념 및 풍습과 차츰 서로 섞였고, 그리스도 이후 처음 천년이 시작될 때 유란시아에서 있었던 여러 신학 체계로 마침내 발전되었다.
92:4.8 4.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미가엘은 하나님이 우주의 아버지라는 개념을 유란시아에 네 번째로 발표했고, 이 가르침은 그 뒤로 늘 널리 지속하였다. 그의 가르침의 본질은 |사랑|과 |봉사|였다. 즉 지음받은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이 사랑으로 베푸는 봉사를 깨닫고, 또 그에 반응하여 자진하여 사랑으로 예배하는 것이요, 그러한 지음받은 아들들은 자유 의지로 형제들에게 봉사를 베풀고, 이러한 봉사로 마찬가지로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기쁘게 깨닫는다.
92:4.9 5. |유란시아 ||논문집|. 이 글은 이 논문집 가운데 하나인데, 이것은 유란시아의 필사자들에게 주는 최근의 진리 발표이다. 이 여러 논문은 모든 이전의 계시와 다르니, 이것은 한 우주 성격자의 작품이 아니라, 여러 존재의 종합된 발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의 아버지 앞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어떤 계시도 결코 완벽할 수 없다. 하늘이 베푸는 모든 다른 봉사는 기껏해야 부분적ㆍ일시적이며, 시공의 지역 조건에 실용적으로 적응되었다. 이처럼 인정하는 것은 모든 계시에서 즉시 생기는 효과와 권한을 아마도 깎아내릴지 모르지만, 유란시아의 필사 종족들에게 최근에 진리를 이처럼 내린 계시의 미래 영향과 권한을 약화시키는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그렇게 솔직히 말하는 것이 좋은 때가 유란시아에 왔다.
92:5.1 진화된 종교에서, 신들은 사람과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 계시된 종교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아니 신의 유한한 모습을 따라서 빚어졌다고―가르침 받았다. 계시의 가르침과 진화의 산물이 혼합되어 합성된 신앙의 경우에 하나님 개념은 다음이 섞인 것이다:
92:5.2 1. 여러 진화 종파의 선재하는 관념.
92:5.3 2. 계시된 종교의 숭고한 이상.
92:5.4 3. 위대한 종교 지도자, 즉 인류의 선지자ㆍ선생들의 개인적 관점.
92:5.5 대부분의 큰 종교 시기는 어떤 뛰어난 인물의 일생과 가르침으로 개시되었다. 지도층은 역사에서 대다수의 가치 있는 도덕 운동에 기원을 주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지도자의 가르침을 희생하면서 그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가 선포하는 진리를 놓치더라도 그 인물을 경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유가 없지는 않다. 진화 인간의 가슴 속에는, 위로부터 또 저 세상으로부터 도움을 찾는 본능적 소망이 있다. 이 갈망은 행성 영주와 나중에 물질 아들들이 땅에 나타나기를 기대하도록 고안되었다. 유란시아에서 사람은 이 초인간 지도자와 통치자들을 빼앗겼고, 따라서 초자연 기원과 기적 같은 생애에 관계되는 전설로 인간 지도자들을 덮어 가림으로써 항상 이 손실을 메우려고 애쓴다.
92:5.6 많은 민족이 그들의 지도자가 처녀로부터 태어났다고 상상했다. 이러한 지도자의 생애에는 기적의 사건들이 헤프게 널려 있고, 그가 돌아오기를 각자의 집단이 언제나 기대한다. 중앙 아시아에서 부족 사람들은 아직도 징기스칸이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티벳ㆍ중국ㆍ인도에서는 부처를 기다린다. 이슬람에서는 모하메드이고, 아메리카 인디안 사이에서는 헤수나닌 오나모나론톤이었다. 히브리인은 대체로 아담이 물질적 통치자로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바빌론의 신 마르둑은 아담의 전설이 지속된 것이고, 이 하나님의 아들 관념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였다. 아담이 땅에 나타난 뒤에, 이른바 하나님의 아들들은 세계의 여러 종족 사이에 공통된 것이었다.
92:5.7 그러나 사람들이 이들을 미신으로 경외한 것과 상관 없이, 인류의 도덕ㆍ철학ㆍ종교의 진보를 위해서, 이 선생들은 받침점과 같은 현세의 인물이요, 그 위에 계시된 진리의 지렛대가 놓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92:5.8 오나가로부터 구루 나낙까지 1백만 년 동안 유란시아의 인간 역사에서 수백의 종교 지도자가 있었다. 이 기간에 종교적 진리와 영적 믿음의 물결이 여러 번 밀물과 썰물처럼 올라오고 내려갔으며, 지난날에 유란시아에서 있었던 각 종교의 부흥은 어떤 종교 지도자의 일생과 가르침과 동일시되었다. 근래의 선생들을 고려하면서 아담 뒤에 유란시아에서 7대 종교 시대로 이들을 묶는 것이 도움이 될까 한다:
92:5.9 1. |셋|| 족속 시대|. 아모삿의 지도 밑에서 다시 생긴 셋 족속 사제들은 아담 이후에 큰 선생들이 되었다. 그들은 안드 족속의 땅에서 두루 활동했고, 그들의 영향은 그리스인ㆍ수메르인ㆍ힌두인 사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후자 사이에서 이 사제들은 힌두 신앙의 브라만으로서 오늘날까지 계속하였다. 셋 족속과 그 추종자들은 아담이 계시한 삼위일체 개념을 결코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다.
92:5.10 2. |멜기세덱|| 선교사 시대|. 유란시아 종교는 그리스도보다 거의 2천 년 전에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살렘에 살면서 가르쳤을 때, 그가 임명한 선생들의 노력으로 적지 않게 부활되었다. 이 선교사들은 믿음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지불하는 값이라고 선포했고, 그들의 가르침은 비록 금방 나타나는 종교를 낳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후일에 진리 선생들이 유란시아 종교들을 세우게 된 그 기초를 형성하였다.
92:5.11 3. |멜기세덱|| 이후 시대|. 아메니모피와 이크나톤 두 사람이 이 시기에 가르쳤지만, 멜기세덱 이후 시대에 뛰어난 종교적 천재는 레반트의 베두인 집단의 지도자이자 히브리 종교의 창립자―모세―였다. 모세는 일신교를 가르쳤다[6]. 그는 말했다: “듣거라, 아 이스라엘아, 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라[7].” “주, 그는 하나님이로다. 그 외에 아무도 없도다[8].” 모세는 그의 민족 사이에서 귀신 숭배의 찌꺼기를 뿌리 뽑으려고 끈질기게 추구하였고, 그 신봉자들에게 사형을 내리기까지 했다. 후계자들이 모세의 유일신 사상을 더럽혔지만, 나중에 그들은 그의 많은 가르침으로 돌아갔다. 모세의 위대함은 지혜와 총명에 있다. 다른 사람들은 더 위대한 하나님 개념을 가졌지만, 어느 누구도 큰 무리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진보된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데 그렇게 성공하지는 않았다.
92:5.12 4. |기원전 6세기|. 많은 사람이 이 세기에 진리를 선포하려고 일어났는데, 이때는 유란시아에서 일찍이 구경했던 바 종교적 각성이 있던 큰 세기 중에 하나였다. 이들 가운데 고타마ㆍ공자ㆍ노자ㆍ조로아스터, 그리고 자이나교 선생들을 기록해야 한다. 고타마의 가르침은 아시아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고, 수백만이 그를 부처로 존경한다. 공자와 중국인의 도덕의 관계는 플라톤과 그리스 철학의 관계와 같았고, 이 두 가지 가르침에 대하여 종교적 반응이 있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어느 쪽도 종교 스승은 아니었다. 공자가 인간성에서 본 것이나 플라톤이 이상주의에서 본 것보다, 노자는 도(道)에서 하나님을 더 보았다. 조로아스터는 유행하던 이영(二靈) 사상, 곧 좋은 영과 나쁜 영 개념에 많이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영원한 신 관념과 궁극에 빛이 어둠을 이긴다는 생각을 분명히 높였다.
92:5.13 5. |서기 1세기|. 종교 스승으로서, 나사렛의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세운 종파를 가지고 시작했으며, 금식과 형식을 피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나아갔다. 예수를 제외하고, 타르수스의 바울과 알렉산드리아의 빌로는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선생이었다. 그들의 종교 개념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그 종교의 진화에 지배적인 역할을 해 왔다.
92:5.14 6. |서기 6세기|. 모하메드는 그가 살던 시대의 많은 교리보다 뛰어난 종교를 창시했다. 그의 종교는 외국 종교의 사회적 요구에 대하여, 또 자기 민족의 종교 생활의 모순에 대한 항쟁이었다.
92:5.15 7. |서기 15세기|. 이 시기에는 두 가지 종교 운동을 보았는데, 하나는 서양에서 기독교의 통일이 무너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에서 새 종교가 합성된 것이다. 유럽에서는 제도화된 기독교가 계속된 성장이 통일과 양립할 수 없게 만든 정도까지 경직되었다. 동양에서는 이슬람교ㆍ힌두교ㆍ불교의 통합된 가르침을 나낙과 추종자들이 시크교로 합성했는데, 이것은 아시아의 가장 진보된 종교 중에 하나였다.
92:5.16 유란시아의 앞날은 의심할 것 없이, 종교적 진리―하나님이 아버지이고 모든 사람이 형제인 것―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등장하는 특징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지적 신학이 사타니아 체계에서 유란시아의 특징을 나타내는 바와 같이, 이 미래 선지자들의 뜨겁고 성실한 노력을 종교 사이의 장벽을 높이는 데 쏟기보다, 그런 여러 신학을 따르는 많은 추종자 사이에서, 영적으로 신을 예배하는 종교적 형제 정신을 기르는 방향으로 더욱 쏟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92:6.1 20세기 유란시아의 종교들은 사람이 신을 숭배하려는 충동이 어떻게 사회에서 진화했는가에 관하여 재미있는 연구를 제공한다. 많은 종교가 귀신을 숭배하던 시절 이후로 거의 진보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피그미인 가운데 더러는 영에 둘러싸인 환경을 조금 믿지만, 그들의 부류는 아무런 종교적 반응이 없다. 그들은 종교의 진화가 시작되었을 때 원시인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오늘날 그대로 있다. 원시 종교의 기본 신앙은 죽은 뒤에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성격을 가진 하나님을 예배하는 개념은 상급의 진화적 발전, 아니 계시의 첫째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가리킨다. 디야크인은 겨우 가장 원시적 종교 관습을 진화했을 뿐이다. 비교적 근래의 에스키모인과 아메리카 인디안은 무척 빈약한 하나님 개념을 가졌다. 그들은 귀신을 믿었고 죽은 뒤에 어떤 종류로 살아남는다는 분명치 않은 관념을 가졌다. 오늘날의 오스트랄리아 원주민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어둠을 무서워하고, 투박한 조상 존중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줄루인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희생물 바치는 종교를 막 진화시키고 있다. 많은 아프리카 부족은, 기독교인과 모하메드 교인의 선교 사업을 통한 것을 제외하면, 종교의 진화에서 주물 단계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무리들은, 옛 트라키아인처럼, 일신교 관념을 오랫동안 지녀왔는데, 트라키아인도 불멸을 믿었다.
92:6.2 유란시아에서 진화 종교와 계시 종교는, 이 여러 논문을 쓰던 시대에 세계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신학 체계로 섞이고 합병되는 동안에, 나란히 진보하고 있다. 이 여러 종교, 20세기에 유란시아의 종교들은 다음과 같이 열거해도 좋다:
92:6.3 1. 힌두교―가장 오래 된 것.
92:6.4 2. 히브리 종교.
92:6.5 3. 불교.
92:6.6 4. 공자의 가르침.
92:6.7 5. 도교의 관념.
92:6.8 6. 조로아스터교.
92:6.9 7. 신도(神道).
92:6.10 8. 자이나교.
92:6.11 9. 기독교.
92:6.12 10. 이슬람교.
92:6.13 11. 시크교―가장 최근의 것.
92:6.14 고대에 가장 진보된 종교는 유대교와 힌두교였고, 각기 동양과 서양에서 종교의 발전 과정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힌두인과 히브리인 모두가 자기네 종교가 영감과 계시를 받았다고 믿었고, 다른 것은 모두 한 참된 신앙이 퇴폐된 형태라고 믿었다.
92:6.15 인도는 힌두ㆍ시크ㆍ모하메드ㆍ자이나 교인으로 갈라져 있고, 각기 하나님과 사람과 우주를 다르게 파악하는 대로 이들을 묘사했다. 중국은 도가(道家)와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고, 일본에서는 신도를 섬긴다.
92:6.16 국제적이고 종족을 넘어선 큰 신앙은 히브리교ㆍ불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이다. 불교는 세일론과 버마에서부터 티벳과 중국을 거쳐서 일본까지 뻗는다. 오직 기독교가 이에 맞설 만큼, 여러 민족의 도덕 관습에 적응하는 능력을 보였다.
92:6.17 히브리교는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넘어가는 철학적 과도기를 포함한다[9]. 그것은 진화된 종교와 계시된 종교를 연결하는 진화의 고리이다. 히브리인은 초기에 그들의 진화된 신들로부터 곧장, 계시된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따라간 유일한 서양 민족이었다[10][11]. 그러나 이 진리는 이사야의 시절까지 결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사야는 우주의 창조자와 종족 신 관념이 뒤섞여 합쳐진 관념을 다시 한 번 가르쳤다: “아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는 하나님이요, 주 홀로 계시나이다. 주가 하늘과 땅을 만드셨나이다.” 한때 서양 문명이 살아남을 희망은 히브리인의 숭고한 선(善) 개념, 그리고 헬라인의[1] 진보된 아름다움의 개념에 있었다.
92:6.18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한 종교이며, 이것은 유대교의 신학에 기초를 두었고, 조로아스터교의 어떤 가르침과 그리스 철학을 흡수함으로 더욱 수정되었는데, 주로 빌로ㆍ베드로ㆍ바울, 이 세 사람이 이를 형성했다. 바울의 시절 이후로 이 종교는 여러 단계의 진화를 거쳤고, 아주 속속들이 서양화되어서, 유럽 바깥에 여러 민족이 기독교를 낯선 하나님이 낯선 사람들에게 준 이상한 계시로 바라본 것은 아주 당연하다.
92:6.19 이슬람은 북 아프리카, 레반트, 동남 아시아의 종교 문화를 연결한다. 후일의 기독교 가르침과 연결하여, 이슬람을 일신교로 만든 것은 유대인의 신학이었다. 모하메드의 추종자들은 높은 삼위일체 가르침을 믿기 어려워했다. 그들은 세 분의 신다운 성격자와 하나의 신의 교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갑자기| 상급의 계시된 진리를 받아들이라고 진화된 지성들을 유도하기는 언제나 어렵다. 사람은 진화된 인간이며, 대체로 진화적 기법으로 종교를 얻어야 한다.
92:6.20 조상 숭배는 한때 종교의 진화에서 결정적 진보였지만, 불교와 힌두교처럼 비교적 진보된 아주 많은 것 사이에, 이 원시 개념이 중국ㆍ일본ㆍ인도에서 지속하는 것은 놀랍고도 딱하다. 서양에서 조상 숭배는 민족의 신을 우러러보고 종족의 영웅을 존경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20세기에, 영웅을 모시는 이 민족주의 종교는 여러 가지 급진적ㆍ민족주의적 비종교주의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며, 이것이 서양에서 많은 종족과 민족의 특징을 나타낸다. 바로 이 태도 중에 많은 것이 영어를 쓰는 민족들의 이름난 대학과 큰 산업 공동체에서 또한 발견된다. 이 개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종교는 다만 “풍족한 생활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라는 관념이다. “민족 종교”는 로마 초기의 황제 숭배로, 그리고 신도(神道)로―국가의 황제 가족 숭배로―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92:7.1 종교는 결코 과학적 사실이 될 수 없다. 철학은 정말로 과학적 기초 위에 놓여있지만, 종교는 늘 진화된 것이거나 계시된 것이거나, 아니면 오늘날 세상에서 그런 것처럼, 이 두 가지의 가능한 조합으로 남을 것이다.
92:7.2 새 종교는 발명될 수 없다. 새 종교는 진화되든지 아니면 |갑자기 계시된다|. 모든 새로운 진화 종교는 단지 오래 된 신앙의 진보하는 표현이요, 새롭게 적응하고 조정된 것일 따름이다. 오래 된 것은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힌두교ㆍ불교ㆍ이슬람교, 그리고 당대의 다른 종파들이 자란 그 토양과 형태로부터 시크교가 싹트고 꽃핀 것처럼, 새로운 것과 합쳐진다. 원시 종교는 아주 민주적이었다. 야만인은 재빨리 빌리거나 빌려 주었다. 오로지 계시된 종교에서, 독재하고 너그럽지 않은 자기 본위의 신학이 나타났다.
92:7.3 유란시아의 여러 종교는 사람을 하나님에게로 데려오고 사람에게 아버지를 깨닫게 하는 범위 안에서, 다 좋다. 어떤 집단의 신자라도, 그들의 교리가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한 태도는 믿음이 확실한 것이 아니라 신학이 오만(傲慢)하다는 것을 더 말해 준다. 모든 다른 신앙에 담긴 최선의 진리를 연구하고 소화함으로 이득을 얻을 수 없는 유란시아 종교는 하나도 없으니, 모두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들은 이웃의 남아 있는 미신과 낡아빠진 의식(儀式)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을 헐뜯기보다, 그들의 살아 있는 영적 믿음에서 가장 좋은 것을 빌리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92:7.4 이 모든 종교는 사람이 똑같은 영적 인도에 대하여 다른 지적 반응을 보이는 결과로서 일어났다. 이 종교들은 결코 그 신조ㆍ교리ㆍ의식이 한결같이 되기를 바랄 수 없다―이것들은 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종교들은 만물의 아버지를 참으로 경배하는 데서 통일을 얻을 수 있고, 언젠가 그렇게 하리니, 이것이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며, 영적으로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참말이다.
92:7.5 원시 종교는 대체로 물질의 가치를 의식하는 것이었지만, 문명은 종교적 가치를 높이며, 이는 참 종교가 의미 있고 최고의 가치를 가진 봉사에 자아를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진화함에 따라서, 윤리는 도덕을 다루는 철학이 되고, 도덕성은 가장 높은 의미를 가진 것과 최상의 가치―신답고 영적인 이상―의 기준으로, 자아를 훈련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종교는 저절로 우러나오는 지극한 헌신, 사랑으로 충성하는 산 체험이 된다.
92:7.6 다음이 종교의 품질을 가리킨다:
92:7.7 1. 수준 가치―충성심.
92:7.8 2. 의미 있는 것들의 깊이―최고의 가치가 있는 이것들을 이상적으로 이해하는 데 개인이 민감해지는 것.
92:7.9 3. 헌신의 깊이―이 신성한 가치 기준에 헌신하는 정도.
92:7.10 4. 이상주의로 영적 생활을 하는 이 우주의 길에서 인격이 매이지 않고 진보하는 것, 곧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주에서 결코 그치지 않고 진보하는 시민임을 깨닫는 것.
92:7.11 종교적 의미는 어린아이가 전능 개념을 부모로부터 하나님으로 옮길 때 자의식 속에서 진보한다. 그러한 아이의 종교적 체험은 전부, 대체로 두려움 아니면 사랑이 부모와 자식 관계를 지배했는가에 달려 있다. 노예들은 주인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개념으로 바꾸는 데 언제나 큰 어려움을 겪었다. 문명과 과학과 진보된 종교는 끔찍한 자연 현상에서 생겨난 두려움에서 인류를 벗어나게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더 높은 깨우침을 얻은 교육받은 사람은 신과 교통하는 데 중개인에게 온통 의존하려는 성향을 벗어나야 한다.
92:7.12 인간답고 눈에 보이는 것을 숭배함으로부터 신답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숭배하도록 옮겨가는 과정에서, 우상 숭배로 머뭇거리는 이 중간 단계를 피할 수 없지만, 이 단계는 깃드는 신의 영이 돕는 봉사를 의식함으로 단축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은 그의 신 개념 뿐 아니라, 또한 그가 명예를 돌리기로 선택한 영웅들의 인품에도 깊이 영향을 받아 왔다. 신답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숭배하게 된 자들이 그 사람을―씩씩하고 용기가 넘치는 그 영웅―요셉의 아들 요수아를 놓치고 못보았다는 것은 무척 유감이다.
92:7.13 현대인은 알맞게 종교를 스스로 의식하고 있지만, 사회의 변화가 가속되고 전례 없이 과학이 발전함으로 현대인의 예배 관습은 혼란에 빠지고 의심을 받고 있다. 생각하는 남녀는 종교를 다시 정의하기를 바라고, 이 요구는 종교가 자체를 다시 평가하기를 강요할 것이다.
92:7.14 현대인은 2천 년 동안에 일어난 것보다 더 많이, 한 세대에 인간의 가치를 다시 조정하는 일에 부닥쳤다. 그리고 이 모두가 종교에 대한 사회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며, 이는 종교가 생각하는 기술일 뿐 아니라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92:7.15 참된 종교는 늘, 동시에 모든 지속하는 문명의 영원한 기초이자 안내하는 별이 되어야 한다.
92:7.16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이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