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된 유란시아 책은 2006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번역: © 2000, 2025 유란시아 재단
번역: © 2001, 2007 Urantia Society of Greater New York
THE TIMES OF MICHAEL’S BESTOWAL
제 121 편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했던 시대
제121편: 미가엘이 증여된 때의 시대환경
제 121 편: 미가엘이 증여된 시기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했던 시대
1955 121:0.1 ACTING under the supervision of a commission of twelve members of the United Brotherhood of Urantia Midwayers, conjointly sponsored by the presiding head of our order and the Melchizedek of record, I am the secondary midwayer of onetime attachment to the Apostle Andrew, and I am authorized to place on record the narrative of the life transactions of Jesus of Nazareth as they were observed by my order of earth creatures, and as they were subsequently partially recorded by the human subject of my temporal guardianship. Knowing how his Master so scrupulously avoided leaving written records behind him, Andrew steadfastly refused to multiply copies of his written narrative. A similar attitude on the part of the other apostles of Jesus greatly delayed the writing of the Gospels.
2000 121:0.1 나는 우리 계급을 주관하는 우두머리와 기록을 맡은 멜기세덱의 공동 후원을 받고서, 유란시아 중도자 연합회 회원 12명으로 구성된 한 위원회의 감독 하에 활동하며 한때 사도 안드레에게 부속되었던 2차 중도자(中道者)이다. 내 계급의 지구 생물이 지켜본 그대로, 현세에서 나의 보호 대상이었던 사람이 나중에 일부 기록한 대로, 나는 나사렛 예수의 일생에 있었던 사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라고 허락을 받았다. 주가 기록된 글을 뒤에 남기지 않으려고 얼마나 면밀하게 피했는가 알았기 때문에, 안드레는 자신이 쓴 이야기의 사본(寫本)을 여러 부 만드는 것을 완강하게 거절했다. 예수의 다른 사도들 편에서 비슷한 태도를 가진 것은 복음서의 기록을 크게 지연했다.
2001 CM 121:0.1 우리 계층의 수석 우두머리와 기록 담당 멜기세덱의 공동 후원을 받으면서, 유란시아 중도자 연합 형제단체 회원 열두 명으로 구성된 한 위원단의 감독 아래서 활동하는 나는, 한때 안드레 사도{使徒}에게 배속돼있었던 2차 중도자이며, 나와 같은 계층에 속하는 지구상의 피조물이 관측했던 바대로, 그리고 현세에서 나의 보호 대상이었던 인간 상대자가 나중에 부분적으로 기록했던 바대로, 나사렛 예수의 생애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기록된 글을 남기지 않으려고 주님께서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알았으므로, 안드레 사도는 자신이 기록한 이야기가 복사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예수의 다른 사도들 편에서도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었으므로, 복음서 작성이 많이 지연됐다.
2007 URKA 121:0.1 나는 한 때 사도 안드레에게 소속되었던 2차 중도자이며, 유란시아 중도자 연합 형제회의 12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감독 밑에서 활동하면서, 우리 계층을 주관하는 우두머리와 기록을 담당하는 멜기세덱의 공동 후원을 받고 있으며, 지구 창조체들인 나의 계층에게 관찰되었던 그대로, 그리고 나의 일시적인 수호자관계에 있었던 인간 주체에게서 나중에 부분적으로 기록된 대로, 나사렛 예수의 일생에서의 활동행위에 대한 서술들을 기록으로 옮기도록 권한을 받았다. 안드레는 주(主)께서 글로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얼마나 세심하게 피했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글로 쓴 서술의 사본을 여러 부 만드는 것을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예수의 다른 사도들 편에서도 비슷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서들의 작성이 엄청나게 지연되었다.
2025 121:0.1 나는 우리 계급을 주관하는 우두머리와 기록이 되어 있는 멜기세덱의 공동 후원을 받고서, 유란시아 중도자 연합회 회원 12명으로 구성된 한 위원회의 감독 하에 활동하며 한때 사도 안드레에게 부속되었던 2차 중도자(中道者)이다. 내 계급의 지구 생물이 지켜본 그대로, 현세에서 나의 보호 대상이었던 사람이 나중에 일부 기록한 대로, 나는 나사렛 예수의 일생에 있었던 사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라고 허락을 받았다. 주가 기록된 글을 뒤에 남기지 않으려고 얼마나 면밀하게 피했는가 알았기 때문에, 안드레는 완강하게 자신이 쓴 이야기의 사본(寫本)을 여러 부 만들지 않으려 했다. 예수의 다른 사도들 편에서 비슷한 태도를 가진 것은 복음서의 기록을 크게 지연했다.
1. THE OCCIDENT OF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1. 그리스도 이후 1세기의 서양
1. 그리스도 이후 첫 세기 동안의 서양
1. 그리스도 뒤 1세기의 서양 세계
1. 그리스도 이후 1세기의 서양
1955 121:1.1 Jesus did not come to this world during an age of spiritual decadence; at the time of his birth Urantia was experiencing such a revival of spiritual thinking and religious living as it had not known in all its previous post-Adamic history nor has experienced in any era since. When Michael incarnated on Urantia, the world presented the most favorable condition for the Creator Son’s bestowal that had ever previously prevailed or has since obtained. In the centuries just prior to these times Greek culture and the Greek language had spread over Occident and near Orient, and the Jews, being a Levantine race, in nature part Occidental and part Oriental, were eminently fitted to utilize such cultural and linguistic settings for the effective spread of a new religion to both East and West. These most favorable circumstances were further enhanced by the tolerant political rule of the Mediterranean world by the Romans.
2000 121:1.1 예수는 영적으로 퇴폐한 시대에 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 그가 태어날 때 유란시아는 그 전에 아담 이후 역사 전체를 통하여 들어보지 못하고 그 뒤에 어느 시대에도 겪어보지 못했던 그러한 영적 생각과 종교 생활의 부흥을 겪고 있었다.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육신화했을 때, 세계는 창조 아들의 수여를 위해서, 그때까지 지배했거나 그 뒤에 생긴 가운데 가장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이 시대 바로 앞 여러 세기 동안에,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 언어가 서양과 근동(近東)에 퍼졌으며, 유대인이 레반트 종족이니까 그 성질이 일부 서양이고 일부 동양이었기 때문에, 동양과 서양, 양쪽에 새 종교를 효과적으로 퍼뜨리기 위하여 그러한 문화와 언어의 배경을 이용하기에 뛰어나게 적절하였다. 대단히 유리한 이 상황은 로마인이 지중해 세계를 관대한 정치로 다스림으로 인하여 더욱 좋아졌다.
2001 CM 121:1.1 예수께서는 영적으로 쇠퇴한 시기에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었으며;그가 태어났을 때 유란시아는, 예전에 아담-이후 역사를 통틀어 들어본 바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어느 시대에도 겪어보지 못할 정도로, 영적 사색{思索}과 종교적 삶의 부흥을 경험하고 있었다.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육신화했을 때, 세상은 그전에 만연했거나 그후로 생긴 상황 중에서 창조주 아들의 증여에 최고로 유리한 여건을 제공했다. 이 시기 직전의 몇 세기 동안에,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어가 서양과 근동{近東}에 널리 퍼졌으며, 레반트족인 유대인은 본성에서 일부는 서양적이고 일부는 동양적이었는데, 동방과 서방 양쪽에게 새로운 어떤 종교를 효과적으로 전파하도록, 그런 문화와 언어의 배경을 활용하기에 매우 적당했다. 이런 최적의 환경은, 로마인이 지중해 지역을 정치적으로 관대하게 통치함으로써 더욱 증진됐다.
2007 URKA 121:1.1 예수는 이 세상이 영적으로 타락한 시기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유란시아는 아담의-이후부터 당시까지의 모든 역사에서 알져진 적이 없고, 그 이후 어떤 시대에서도 체험하지 못했던 영적 사고와 종교적 삶의 부흥을 체험하고 있었다.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육신화 하였을 때, 세계는 창조자 아들의 증여를 위하여, 그 때까지 한번도 만연한 적이 없고 그 이후에도 한번도 획득할 수 없었던 최적의 조건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들 시절 바로 앞 여러 세기들 동안에,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어가 서양과 근동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일부 서양의 본성과 일부 동양의 본성을 모두 지닌, 레반트인의 하나인, 유대인들은 어떤 새로운 종교를 동방과 서방 양쪽 모두에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그러한 문화적 그리고 언어적 배경을 활용하기에 가장 우수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최적의 상황들은 지중해 세계에 대한 로마의 관대한 정치적 통치로 인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2025 121:1.1 예수는 영적으로 퇴폐한 시대에 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 그가 태어날 때 유란시아는 그 전에 아담 이후 역사 전체를 통하여 들어보지 못하고 그 뒤에 어느 시대에도 겪어보지 못했던 그러한 영적 생각과 종교 생활의 부흥을 겪고 있었다.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육신화했을 때, 세계는 창조 아들의 수여를 위해서, 그때까지 지배했거나 그 뒤에 생긴 가운데 가장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이 시대 바로 앞 여러 세기 동안에,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 언어가 서양과 근동(近東)에 퍼졌으며, 유대인이 레반트 종족이니까 그 성질이 일부 서양이고 일부 동양이었기 때문에, 동양과 서양, 양쪽에 새 종교를 효과적으로 퍼뜨리기 위하여 그러한 문화와 언어의 배경을 이용하기에 뛰어나게 적절하였다. 대단히 유리한 이 상황은 로마인이 지중해 세계를 관대한 정치로 다스림으로 인하여 더욱 좋아졌다.
1955 121:1.2 This entire combination of world influences is well illustrated by the activities of Paul, who, being in religious culture a Hebrew of the Hebrews, proclaimed the gospel of a Jewish Messiah in the Greek tongue, while he himself was a Roman citizen.
2000 121:1.2 세계 영향의 이러한 조합은 전부 바울의 활동에 잘 나타난다. 그는 종교적 교양 면에서 가장 뛰어난 히브리인이었고, 그리스어로 유대인 메시아의 복음을 선포했으며, 한편 그 자신은 로마 시민이었다.
2001 CM 121:1.2 세계의 영향이 이렇게 전체적으로 조합된 것은 바울의 활동을 통해서 잘 나타나는데, 종교적 교양 면에서 가장 뛰어난 히브리인이었던 그가 유대인 메시야 복음을 그리스 언어로 전파했지만, 바울 자신은 로마 시민이었다.
2007 URKA 121:1.2 이러한 세계적 영향에서의 전체적인 화합은 바울의 활동들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바울 자신은 로마 시민이었던 반면에, 종교적으로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유대인 메시아에 대한 복음을 그리스 언어로 전파하였다.
1955 121:1.3 Nothing like the civilization of the times of Jesus has been seen in the Occident before or since those days. European civilization was unified and co-ordinated under an extraordinary threefold influence:
2000 121:1.3 예수가 살던 시절의 문명과 같은 것은 서양에서 그 시절 이전이나 이후에도 전혀 없었다. 유럽의 문명은 특별한 세 가지 영향 밑에서 통일되고 조정되었다:
2001 CM 121:1.3 예수가 살던 시절의 문명은, 서양에서 그 이전이나 이후 어느 때에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유럽의 문명은 다음과 같은 두드러진 삼중적 영향 아래서 통합됐고 조화를 이뤘다:
2007 URKA 121:1.3 서양에서, 그 이전이나 그 이후 어느 때에도 예수의 시대와 같은 문명기는 없었다. 유럽의 문명은 아래의 세 가지 영향들 아래에서 통합되고 서로 조화-협동을 이루었다:로마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체계.그리스의 언어와 문화─그리고 어느 정도의 철학.급속히 퍼져나간 유대인의 종교적 그리고 도덕적 가르침들의 영향력.
2025 121:1.3 예수가 살던 시절의 문명과 같은 것은 서양에서 그 시절 이전이나 이후에도 전혀 없었다. 유럽의 문명은 특별한 세 가지 영향 밑에서 통일되고 조정되었다:
1955 121:1.4 1. The Roman political and social systems.
2000 121:1.4 1. 로마의 정치 및 사회 체계.
2001 CM 121:1.4 1. 로마의 정치적 및 사회적 체계.
2007 URKA 121:1.4 로마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체계.
2025 121:1.4 1. 로마의 정치 및 사회 체계.
2000 121:1.5 2. 그리스 언어와 문화―철학도 어느 정도.
2001 CM 121:1.5 2. 그리스인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철학도 어느 정도.
2007 URKA 121:1.5 그리스의 언어와 문화─그리고 어느 정도의 철학.
2025 121:1.5 2. 그리스 언어와 문화 ― 철학도 어느 정도.
1955 121:1.6 3. The rapidly spreading influence of Jewish religious and moral teachings.
2000 121:1.6 3. 유대인의 급속히 퍼지는 종교적ㆍ도덕적 가르침의 영향.
2001 CM 121:1.6 3. 유대인의 급속히 퍼져나간 종교적 및 도덕적 교훈의 영향력.
2007 URKA 121:1.6 급속히 퍼져나간 유대인의 종교적 그리고 도덕적 가르침들의 영향력.
2025 121:1.6 3. 유대인의 급속히 퍼지는 종교적ㆍ도덕적 가르침의 영향.
1955 121:1.7 When Jesus was born, the entire Mediterranean world was a unified empire. Good roads, for the first time in the world’s history, interconnected many major centers. The seas were cleared of pirates, and a great era of trade and travel was rapidly advancing. Europe did not again enjoy another such period of travel and trade until the nineteenth century after Christ.
2000 121:1.7 예수가 태어났을 때, 지중해 세계 전부가 통일된 제국이었다. 세계 역사에서 처음으로 좋은 도로가 많은 주요 도시를 서로 연결하였다. 바다에는 해적들이 없어졌고, 무역하고 여행하는 대단한 시대가 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유럽은 그리스도 이후 19세기까지 그렇게 여행하고 무역하는 시대를 또 다시 구경하지 못했다.
2001 CM 121:1.7 예수께서 태어났을 때, 지중해 연안 전 지역은 통합된 제국을 이뤘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양호한 상태의 도로들이 여러 주요 중심도시를 연결했다. 바다에서는 해적이 소탕됐고, 무역과 여행이 크게 이뤄지는 시대가 빠르게 진척되고 있었다. 유럽은, 그리스도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또 다른 그런 여행과 무역의 시대를 다시 맛보지 못했다.
2007 URKA 121:1.7 예수가 태어났을 때, 지중해 연안의 모든 지역은 하나로 통합된 제국을 이루고 있었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많은 주요 중심지들을 연결해 주는 양호한 상태의 도로들이 건설되었다. 바다에서는 해적들이 소탕되어, 무역과 여행이 크게 활발해지는 시대가 빠르게 진척되고 있었다. 유럽은 그리스도 이후로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여행과 무역의 전성시대를 다시 맛보지 못하였다.
2025 121:1.7 예수가 태어났을 때, 지중해 세계 전부가 통일된 제국이었다. 세계 역사에서 처음으로 좋은 도로가 많은 주요 도시를 서로 연결하였다. 바다에는 해적들이 없어졌고, 무역하고 여행하는 대단한 시대가 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유럽은 그리스도 이후 19세기까지 그렇게 여행하고 무역하는 시대를 또 다시 구경하지 못했다.
1955 121:1.8 Notwithstanding the internal peace and superficial prosperity of the Greco-Roman world, a majority of the inhabitants of the empire languished in squalor and poverty. The small upper class was rich; a miserable and impoverished lower class embraced the rank and file of humanity. There was no happy and prosperous middle class in those days; it had just begun to make its appearance in Roman society.
2000 121:1.8 그리스ㆍ로마 세계는 안으로 평화롭고 겉으로 번영하고 있었는데도, 제국 주민의 대다수는 더러움과 빈곤 속에서 시들었다. 소수(小數)의 상류 계급은 부유했으나, 불쌍하고 궁핍한 하층 계급은 인류의 서민들을 포함하였다. 그 시절에는 행복하고 번영하는 중류 계급이 없었다. 중류 계급이 로마의 사회에서 막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01 CM 121:1.8 그리스-로마 시대에 안으로는 평화롭고 겉으로는 번영하고 있음에도, 제국의 대다수 주민은 열악한 환경과 빈곤 속에서 비참하게 살았다. 소수의 상류 계층은 부유했으나;가난에 쪼들리고 허약한 하류 계층에는, 인류 중에서 서민들도 포함됐다. 그 당시에는 행복하고 풍요로운 중산층이 없었으며;중산층은 로마 사회 내에 막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7 URKA 121:1.8 그리스-로마 시대의 내부적인 평화와 외견상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대다수 주민들은 열악한 환경과 빈곤 속에서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었다. 소수의 상위 등급들은 부유하였으나; 비참하고 가난에 쪼들리는 하위 등급들이 인간성에서의 일반서민을 이루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행복하고 풍요로운 중산층이 없었다; 로마 사회 내에 그들의 모습이 막 나타나기 시작했었다.
2025 121:1.8 그리스ㆍ로마 세계는 안으로 평화롭고 겉으로 번영하고 있었는데도, 제국 주민의 대다수는 더러움과 빈곤 속에서 시들었다. 소수(小數)의 상류 계급은 부유했으나, 불쌍하고 궁핍한 하층 계급은 인류의 서민들을 포함하였다. 그 시절에는 행복하고 번영하는 중류 계급이 없었다. 중류 계급이 로마의 사회에서 막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55 121:1.9 The first struggles between the expanding Roman and Parthian states had been concluded in the then recent past, leaving Syria in the hands of the Romans. In the times of Jesus, Palestine and Syria were enjoying a period of prosperity, relative peace, and extensive commercial intercourse with the lands to both the East and the West.
2000 121:1.9 팽창하는 로마 국가와 파르티아 국가 사이의 첫 싸움은, 당시로 보아서 최근에 끝이 났고 시리아를 로마인의 손에 넘겨주었다. 예수의 시절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는 번영하고 비교적 평화롭고 동서 양쪽의 나라들과 널리 상업 교역(交易)이 있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2001 CM 121:1.9 확장하는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국가들 간에 벌어졌던 첫 갈등이 이 시기 직전에 종결됐는데, 결과적으로 시리아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됐다. 예수 시대에 팔레스틴과 시리아는, 번영하고 비교적 평화로운 기간을 누리고 있었고, 서방과 동방의 나라들과 상업 교역을 널리 이뤄가고 있었다.
2007 URKA 121:1.9 확대되는 로마제국과 파르티아 국가들 간의 첫 번째 전쟁은 이 시기 직전에 종결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시리아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예수가 활동하던 시대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는 번영기에 있었고 비교적 평화를 누리고 있었으며, 서방과 동방에 있는 지역들과 많은 상업적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2025 121:1.9 팽창하는 로마 국가와 파르티아 국가 사이의 첫 싸움은, 당시로 보아서 최근에 끝이 났고 시리아를 로마인의 손에 넘겨주었다. 예수의 시절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는 번영하고 비교적 평화롭고 동서 양쪽의 나라들과 널리 상업 교역(交易)이 있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2. THE JEWISH PEOPLE
2. 유대 민족
2. 유대 민족
2. 유대 민족
2. 유대 민족
1955 121:2.1 The Jews were a part of the older Semitic race, which also included the Babylonians, the Phoenicians, and the more recent enemies of Rome, the Carthaginians. During the fore part of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the Jews were the most influential group of the Semitic peoples, and they happened to occupy a peculiarly strategic geographic position in the world as it was at that time ruled and organized for trade.
2000 121:2.1 유대인은 이전에 있던 셈 종족의 한 가지였고, 이 셈족은 또한 바빌로니아인, 페니키아인, 그리고 최근에 로마의 적이었던 카르타고인도 포함했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 전반에, 유대인은 셈 종족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집단이었다. 당시에 그 지역이 통치되고 무역을 위하여 조직된 바와 같이, 그들은 우연히 세계에서 특이하게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했다.
2001 CM 121:2.1 유대인은 고대의 셈족속 가운데 일원이었으며, 이 셈족속에는 바빌로니아인과 페니키아인, 그리고 최근에 로마의 적이었던 카르타고인도 포함됐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 전반기에는 유대인이 셈족속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이었으며, 그들은 당시에 그 지역이 무역을 위하여 통치되고 조직됐던 바와 같이, 세계적으로 특별히 전략적인 지리적 위치를 우연히 점유하고 있었다.
2007 URKA 121:2.1 유대인들은 고대의 셈족의 일원이었으며, 바빌로니아인, 페니키아인, 그리고 그 당시까지 로마의 적이었던 카르타고인 들도 셈족에 포함되어 있었다. 서기 1세기 전반 동안은 유대인들이 셈족 중에서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집단이었으며, 그들은 그 당시의 무역활동을 지배하고 조직화하는데 있어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역을 우연히 점유하고 있었다.
2025 121:2.1 유대인은 이전에 있던 셈 종족의 한 가지였고, 이 셈 족속은 또한 바빌로니아인, 페니키아인, 그리고 최근에 로마의 적이었던 카르타고인도 포함했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 전반에, 유대인은 셈 종족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집단이었다. 당시에 그 지역이 통치되고 무역을 위하여 조직된 바와 같이, 그들은 우연히 세계에서 특이하게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했다.
1955 121:2.2 Many of the great highways joining the nations of antiquity passed through Palestine, which thus became the meeting place, or crossroads, of three continents. The travel, trade, and armies of Babylonia, Assyria, Egypt, Syria, Greece, Parthia, and Rome successively swept over Palestine. From time immemorial, many caravan routes from the Orient passed through some part of this region to the few good seaports of the eastern end of the Mediterranean, whence ships carried their cargoes to all the maritime Occident. And more than half of this caravan traffic passed through or near the little town of Nazareth in Galilee.
2000 121:2.2 고대의 나라들을 연결하는 많은 큰 도로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갔고, 이처럼 이 지역은 세 대륙이 만나는 자리, 교차로가 되었다. 여행, 무역, 그리고 바빌로니아ㆍ아씨리아ㆍ에집트ㆍ시리아ㆍ그리스ㆍ파르티아ㆍ로마의 군대가 잇달아 팔레스타인을 휩쓸었다. 기억할 수도 없이 아득한 시절부터, 허다한 카라반 길이 동양으로부터 이 지역의 어느 부분을 거쳐서, 지중해 동쪽 끝에 좋은 몇 항구까지 이르렀고, 거기서부터, 배들은 그 화물을 온 서양의 해안으로 날랐다. 이 카라반 교통의 반 이상이 갈릴리의 작은 마을 나사렛을 거치거나 그 근처를 지나갔다.
2001 CM 121:2.2 옛 국가들을 연결하는 큰 대로들 가운데 다수가 팔레스틴 지역을 통과했으므로, 이 지역은 세 대륙이 서로 만나는 장소 곧 교차로가 됐다. 바빌로니아, 앗수르, 이집트, 시리아, 그리스, 파르티아, 그리고 로마의 여행객과 상인{商人}과 군대가 연달아 팔레스틴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여러 대상{隊商} 경로가 동양으로부터 이 지역 가운데 어느 부분을 거쳐서, 지중해 동쪽 끝에 있는 몇몇 우수한 항구까지 이르렀고, 거기서 배들이 서양의 연안{沿岸} 전역으로 짐을 운반했다. 그리고 이런 대상 행렬 가운데 반 이상이, 갈릴리에서 나사렛 마을을 통과하거나 그 근처를 지나갔다.
2007 URKA 121:2.2 옛 국가들을 연결하는 많은 큰 간선도로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은 세 개의 대륙이 서로 만나고 교차되는 장소가 되었다.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이집트, 시리아, 그리스, 파르티아, 그리고 로마의 여행객이나 카라반들 그리고 집단들이 계속적으로 팔레스타인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동방에서 오는 많은 대상들이 이 지역들 중 어떤 곳을 거쳐 지중해 동쪽 끝에 있는 미약한 항구로 통행하였으며, 그곳으로부터 선박들이 해로를 통해 화물을 서양의 전체 연해 지역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이러한 대상들의 행렬 중 반 이상이 갈릴리 안에 있는 나사렛의 작은 성읍을 통과하거나 그 근처를 경유해 지나갔다.
2025 121:2.2 고대의 나라들을 연결하는 많은 큰 도로가 팔레스타인을 거쳐 갔고, 이처럼 이 지역은 세 대륙이 만나는 자리, 교차로가 되었다. 여행, 무역, 그리고 바빌로니아ㆍ아씨리아ㆍ에집트ㆍ시리아ㆍ그리스ㆍ파르티아ㆍ로마의 군대가 잇달아 팔레스타인을 휩쓸었다. 기억할 수도 없이 아득한 시절부터, 허다한 카라반 길이 동양으로부터 이 지역의 어느 부분을 거쳐서, 지중해 동쪽 끝에 좋은 몇 항구까지 이르렀고, 거기서부터, 배들은 그 화물을 온 서양의 해안으로 날랐다. 이 카라반 교통의 반 이상이 갈릴리의 작은 마을 나사렛을 거치거나 그 근처를 지나갔다.
1955 121:2.3 Although Palestine was the home of Jewish religious culture and the birthplace of Christianity, the Jews were abroad in the world, dwelling in many nations and trading in every province of the Roman and Parthian states.
2000 121:2.3 비록 팔레스타인이 유대인의 종교 문화의 고향이요 기독교가 태어난 곳이었지만, 유대인은 세계에서 바깥으로 나가 있었고, 여러 나라에서 살면서 로마 국가와 파르티아 국가의 어느 지방에서나 장사하고 있었다.
2001 CM 121:2.3 팔레스틴이 유대교 문화의 본향이자 그리스도교의 탄생지였지만, 유대인은 세계에 널리 퍼져있었는데, 여러 나라에서 살았고, 로마 국가와 파르티아 국가 전역에서 무역을 하고 있었다.
2007 URKA 121:2.3 팔레스타인이 유대교 문화의 본향이자 그리스도교의 탄생지이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여러 나라에 살고 있었으며, 로마와 파르티아 국가들의 전체 지역에서 무역을 하였다.
2025 121:2.3 비록 팔레스타인이 유대인의 종교 문화의 고향이요 기독교가 태어난 곳이었지만, 유대인은 세계에서 바깥으로 나가 있었고, 여러 나라에서 살면서 로마 국가와 파르티아 국가의 어느 지방에서나 장사하고 있었다.
1955 121:2.4 Greece provided a language and a culture, Rome built the roads and unified an empire, but the dispersion of the Jews, with their more than two hundred synagogues and well-organized religious communities scattered hither and yon throughout the Roman world, provided the cultural centers in which the new gospel of the kingdom of heaven found initial reception, and from which it subsequently spread to the uttermost parts of the world.
2000 121:2.4 그리스는 언어와 문화를 제공했고, 로마는 길을 만들고 하나의 제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유대인이 분산된 것은 로마 세계에 두루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2백이 넘는 회당과 잘 조직된 종교 공동체와 함께, 문화의 중심들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 곳에서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초기에 받아들였고, 거기서부터 후일에 복음이 세상의 가장 먼 구석까지 퍼졌다.
2001 CM 121:2.4 그리스는 언어와 문화를 제공했고, 로마는 도로를 건설하고 제국을 통합했으나, 흩어진 유대인은 로마 세계 전역 여기저기 퍼져있는 200개 이상의 회당과 잘-조직된 종교 공동체를 갖추고, 문화 중심지를 제공했는데, 거기서 하늘 나라의 새 복음이 처음으로 받아들여져서 그 기초를 다졌고, 나중에는 거기로부터 온 세계 땅 끝까지 퍼져나갔다.
2007 URKA 121:2.4 그리스는 언어와 문화를 제공하였고, 로마는 도로와 통합된 제국을 건설하였지만, 흩어진 유대인들은 로마 세계 전 지역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200개 이상의 회당과 잘 조직된 종교적 공동체를 갖추고, 문화적 중심의 역할을 하였으며, 하늘의 왕국에 대한 새로운 복음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받아들여져서 그 기초를 다졌고, 나중에는 이곳으로부터 전 세계의 변두리 지역까지 퍼져나갔다.
2025 121:2.4 그리스는 언어와 문화를 제공했고, 로마는 길을 만들고 하나의 제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유대인이 분산된 것은 로마 세계에 두루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2백이 넘는 회당과 잘 조직된 종교 공동체와 함께, 문화의 중심들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 곳에서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초기에 받아들였고, 거기서부터 후일에 복음이 세상의 가장 먼 구석까지 퍼졌다.
1955 121:2.5 Each Jewish synagogue tolerated a fringe of gentile believers, “devout” or “God-fearing” men, and it was among this fringe of proselytes that Paul made the bulk of his early converts to Christianity. Even the temple at Jerusalem possessed its ornate court of the gentiles. There was very close connection between the culture, commerce, and worship of Jerusalem and Antioch. In Antioch Paul’s disciples were first called “Christians.”
2000 121:2.5 유대인 회당은 각자 소수의 이방인 신도(信徒), “경건한”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였는데, 바로 이 소수의 전향자들 사이에서 바울은 초기에 기독교로 개종한 신자들의 대부분을 얻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도, 화려한 이방인의 마당이 있었다. 예루살렘과 안티옥에서는 문화ㆍ상업ㆍ예배 사이에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안티옥에서 바울의 제자들을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렀다.
2001 CM 121:2.5 각 유대인 회당은 비주류 이방인 신자 곧 “헌신적인” 사람들 또는 “하나님을-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였고, 바울이 초기에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 대부분의 사람은 바로 이 비주류 개종자에 속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에도, 화려하게 장식된 이방인의 뜰이 있었다. 예루살렘과 안디옥의 문화와 상업과 경배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바울의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불렸다.
2007 URKA 121:2.5 각각의 유대인 회당은 이방인 신자들의 분파집단, “헌신적”이거나 아니면 “하느님을-두려워하는” 자들을 받아들였으며, 바울이 초기에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 일단의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분파집단의 이 개종자들이었다. 심지어는 예루살렘 성전에도 화려하게 장식된 이방인들의 뜰이 있었다. 예루살렘과 안디옥의 문화와 상업 그리고 경배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안디옥에서 바울의 제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1955 121:2.6 The centralization of the Jewish temple worship at Jerusalem constituted alike the secret of the survival of their monotheism and the promise of the nurture and sending forth to the world of a new and enlarged concept of that one God of all nations and Father of all mortals. The temple service at Jerusalem represented the survival of a religious cultural concept in the face of the downfall of a succession of gentile national overlords and racial persecutors.
2000 121:2.6 유대인의 성전 예배를 예루살렘에 집중한 것은 그들의 일신교가 살아남게 만든 비결이었고, 마찬가지로 만국의 그 유일한 하나님, 만인의 아버지를 전하는 새롭고 확대된 개념을 육성하고 세계에 전파하는 것을 보장했다.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는 이방 국가의 군주와 종족 박해자들이 잇달아 몰락하는 가운데 종교 문화의 개념이 살아남아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2001 CM 121:2.6 유대인의 성전 경배가 예루살렘에 집중된 것은, 그들의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살아남게 한 비결이었고, 마찬가지로, 모든 나라의 유일한 하나님인 동시에 모든 필사자의 아버지라는, 새롭고 확장된 개념을 육성하여 세계로 내보내겠다는 약속을 만들어냈다. 예루살렘 성전 예배는, 이어지는 이방 국가의 지배자들과 인종적 박해자들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문화 개념이 살아남아있음을 보여줬다.
2007 URKA 121:2.6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 성전 경배 집중은, 그들의 유일신 사상이 존속되도록 하는 비결이자 동시에 그들을 양육하여 모든 나라들의 유일한 하느님이고 모든 필사자들의 아버지라는 새롭고도 확대된 개념의 세계로 그들을 보내 주시리라는 약속의 비결이었다. 예루살렘에서의 성전 예배봉사는, 이방의 국가 군주들과 인종적 박해자들의 계속되는 몰락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종교 문화적 개념은 살아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2025 121:2.6 유대인의 성전 예배를 예루살렘에 집중한 것은 그들의 일신교가 살아남게 만든 비결이었고, 마찬가지로 만국의 그 유일한 하나님, 만인의 아버지를 전하는 새롭고 확대된 개념을 육성하고 세계에 전파하는 것을 보장했다.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는 이방 국가의 군주와 종족 박해자들이 잇달아 몰락하는 가운데 종교 문화의 개념이 살아남아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1955 121:2.7 The Jewish people of this time, although under Roman suzerainty, enjoyed a considerable degree of self-government and, remembering the then only recent heroic exploits of deliverance executed by Judas Maccabee and his immediate successors, were vibrant with the expectation of the immediate appearance of a still greater deliverer, the long-expected Messiah.
2000 121:2.7 이 시절의 유대 민족은, 로마의 치하에 있었어도 상당한 정도로 자치를 누렸고, 유다 마카비, 그리고 직후에 계승한 자들이 수행한 공적, 당시로 보아서 최근에 영웅답게 나라를 구원한 공적을 기억하면서, 더욱 큰 구원자, 오래도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곧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로 활기에 넘쳐 있었다.
2001 CM 121:2.7 이 시기에 유대 민족은, 로마의 종주권 아래 있었음에도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을 누렸는데, 유다 마카비 및 그의 직속 후계자들이 이룩한, 그 당시로는 최근에 영웅적으로 나라를 구출한 업적을 기억하면서, 더 위대한 구원자 곧 오랫동안-대망{待望}했던 메시야의 임박한 출현에 대한 기대감으로 활기에 넘쳐있었다.
2007 URKA 121:2.7 이 시기의 유대 민족은,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 마카비와 그 직속 후계자들이 당대에 획득한 해방에 대한 영웅적인 공적을 기리면서, 상당한 정도의 자아-관리를 즐기고 있었으며, 더욱 위대한 해방자, 오랫동안 대망해 오던 메시아의 즉각적인 출현에 대한 기대로 활기에 넘쳐 있었다.
1955 121:2.8 The secret of the survival of Palestine, the kingdom of the Jews, as a semi-independent state was wrapped up in the foreign policy of the Roman government, which desired to maintain control of the Palestinian highway of travel between Syria and Egypt as well as the western terminals of the caravan routes between the Orient and the Occident. Rome did not wish any power to arise in the Levant which might curb her future expansion in these regions. The policy of intrigue which had for its object the pitting of Seleucid Syria and Ptolemaic Egypt against each other necessitated fostering Palestine as a separate and independent state. Roman policy, the degeneration of Egypt, and the progressive weakening of the Seleucids before the rising power of Parthia, explain why it was that for several generations a small and unpowerful group of Jews was able to maintain its independence against both Seleucidae to the north and Ptolemies to the south. This fortuitous liberty and independence of the political rule of surrounding and more powerful peoples the Jews attributed to the fact that they were the “chosen people,” to the direct interposition of Yahweh. Such an attitude of racial superiority made it all the harder for them to endure Roman suzerainty when it finally fell upon their land. But even in that sad hour the Jews refused to learn that their world mission was spiritual, not political.
2000 121:2.8 팔레스타인, 즉 유대인의 왕국이 반 독립된 국가로서 살아남은 것은 로마 정부의 대외 정책에 그 비결이 있었다. 로마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카라반 길의 서부 종착역 뿐 아니라, 시리아와 에집트 사이에 팔레스타인의 여행 도로를 계속 장악하기를 바랐다. 레반트에서 로마가 미래에 확장하는 것을 억제할 수도 있는 어떤 강대국이라도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것을 로마는 바라지 않았다. 술책을 쓰는 정책의 목적은 실루시드의 시리아와 프톨레미의 에집트가 서로 맞서서 다투게 하는 것이었고, 그런 정책은 팔레스타인을 하나의 따로 독립된 국가로 양육하는 것을 필요하게 만들었다. 로마의 정책과 에집트의 붕괴, 그리고 파르티아의 강성해지는 힘 앞에 실루시드 왕조가 차츰 쇠약해진 것은, 어째서 몇 세대 동안 작고도 힘없는 유대인 무리가 북으로 실루시드 왕조와 남으로 프톨레미 왕조, 이 두 나라에 대항하여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설명한다. 둘러싼 강대 민족들의 통치로부터 어쩌다가 얻은 이 자유와 독립을 유대인은 그들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야웨가 직접 간섭한 덕분으로 돌렸다. 자기 민족이 우월하다는 그런 태도는 로마의 압제가 마침내 그들의 땅에 닥쳤을 때, 이를 더욱 견디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슬픈 시점에도, 유대인은 세상에서 그들이 정치적 사명이 아니라 영적 사명을 가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2001 CM 121:2.8 팔레스틴 곧 유대인 왕국이 준{準}독립 국가로서 생존한 비결은, 시리아와 이집트를 잇는 팔레스틴 대로{大路}뿐 아니라,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대상{隊商} 노선들의 서쪽 기착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로마 정부의 외교 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레반트에서 로마가 장차 확장하려는 계획을 방해할 수 있는 어떤 세력이든지 이 지역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을 로마는 원치 않았다. 숨겨진 정치적 의도는 셀류시드의 시리아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가 서로 대립하도록 만드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팔레스틴을 분리된 독립 국가로 키워서 완충 지역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작고 힘없는 유대인 집단이 이렇게 여러 세대에 걸쳐서, 북으로는 셀류시드에 대적하고, 남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에 대항하면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로마의 정책 때문이었는데, 로마는 파르티아 세력이 부상하기 전에 이집트를 쇠퇴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셀류시드를 점차 약화시키려고 했다. 둘러싼 더 강력한 민족들의 정치적 지배로부터 이렇게 운 좋은 자유와 독립을 누린 것에 대해, 유대인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사실 덕분이라고, 즉 야훼가 직접 개입한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로마의 압제가 마침내 그들의 영토에 임했을 때, 그런 인종적 우월감의 태도가 그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처럼 비참한 때에도, 유대인은 자신의 지상 사명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배우려하지 않았다.
2007 URKA 121:2.8 유대인들의 왕국인 팔레스타인이 반(半)독립국가로서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시리아와 이집트를 잇는 팔레스타인대로 뿐만 아니라, 서양과 동양을 잇는 카라반 통로들의 서쪽 기착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로마 정부의 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로마는 레반트 지역에서 어떤 세력이 커져서, 장차 이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자신들의 계획이 방해받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셀류시드가 관할하는 시리아와 프톨레마이오스가 관할하는 이집트가 서로 배척하고 있는 상태에 있어서 완충 지역으로, 팔레스타인을 분리되고 독립된 국가로 키우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었다. 작고 힘없는 유대인 집단이 이렇게 여러 세대에 걸쳐서 북으로는 셀류시드에 배척되고 남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배척되면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파르티아가 강력한 세력이 부상하기 전에 이집트를 쇠퇴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셀류시드를 점차 약화시키려 했던 로마의 정책 때문이었다. 이러한 강력한 세력을 가진 주변의 정치적 조건으로 인하여 운 좋게도 해방과 독립을 누렸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백성”이므로 야훼가 직접적으로 관여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인종적 우월성의 태도는 결국에 가서 자신들의 영토를 점령해버린 로마의 통치를 도저히 견디어 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비참한 시기에 처했을 때에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지상 사명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2025 121:2.8 팔레스타인, 즉 유대인의 왕국이 반 독립된 국가로서 살아남은 것은 로마 정부의 대외 정책에 그 비결이 있었다. 로마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카라반 길의 서부 종착역만 아니라, 시리아와 에집트 사이에 팔레스타인의 여행 도로를 계속 장악하기를 바랐다. 레반트에서 로마가 미래에 확장하는 것을 억제할 수도 있는 어떤 강대국이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것을 로마는 바라지 않았다. 술책을 쓰는 정책의 목적은 실루시드의 시리아와 프톨레미의 에집트가 서로 맞서서 다투게 하는 것이었고, 그런 정책은 팔레스타인을 하나의 따로 독립된 국가로 육성하는 것을 필요하게 만들었다. 로마의 정책과 에집트의 붕괴, 그리고 파르티아의 강성해지는 힘 앞에 실루시드 왕조가 차츰 쇠약해진 것은, 어째서 몇 세대 동안 작고도 힘없는 유대인 무리가 북으로 실루시드 왕조와 남으로 프톨레미 왕조, 이 두 나라에 대항하여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설명한다[8]. 둘러싼 강대 민족들의 통치로부터 어쩌다가 얻은 이 자유와 독립을 유대인은 그들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야웨가 직접 간섭한 덕분으로 돌렸다. 자기 민족이 우월하다는 그런 태도는 로마의 압제가 마침내 그들의 땅에 닥쳤을 때, 이를 더욱 견디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슬픈 시점에도, 유대인은 세상에서 그들이 정치적 사명이 아니라 영적 사명을 가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1955 121:2.9 The Jews were unusually apprehensive and suspicious during the times of Jesus because they were then ruled by an outsider, Herod the Idumean, who had seized the overlordship of Judea by cleverly ingratiating himself with the Roman rulers. And though Herod professed loyalty to the Hebrew ceremonial observances, he proceeded to build temples for many strange gods.
2000 121:2.9 그때 외부 사람, 이두미아인 헤롯이 유대인을 다스렸기 때문에, 예수가 살던 시절에 유대인은 특별히 조심스럽고 의심이 많았다. 헤롯은 영리하게 로마 통치자들의 비위를 맞춤으로 유대 땅의 통치권을 손에 넣었다. 헤롯은 히브리인의 예식 절차에 충실할 것을 공언했으나, 낯선 신들을 위하여 여러 신전의 건축을 진행했다.
2001 CM 121:2.9 로마 관리들에게 아부함으로써 유대지방의 지배권을 갖게 된, 이두메 사람으로서 외부인인 헤롯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 당시의 유대인은 유별나게 걱정과 의심이 많았다. 그리고 헤롯은 히브리 예식 행사에 충실하겠다고 공언했음에도, 여러 낯선 신을 섬기는 신전{神殿}을 계속 건설했다.
2007 URKA 121:2.9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유별나게 걱정이 많고 의심이 많았는데, 왜냐하면 외국인이면서도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아부함으로써 유대지역에 대한 주권을 갖게 된 이두미아인 헤롯이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헤롯은 히브리의 제사 의식들을 존중하겠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야릇한 많은 하느님들을 섬기는 신전들을 계속 건축하였다.
1955 121:2.10 The friendly relations of Herod with the Roman rulers made the world safe for Jewish travel and thus opened the way for increased Jewish penetration even of distant portions of the Roman Empire and of foreign treaty nations with the new gospel of the kingdom of heaven. Herod’s reign also contributed much toward the further blending of Hebrew and Hellenistic philosophies.
2000 121:2.10 헤롯과 로마의 지배자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유대인이 세계를 여행하기에 안전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로마 제국 및 조약을 맺은 여러 외국의 먼 구석까지도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가지고 유대인이 더욱 침투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헤롯의 통치는 또한 히브리 철학과 헬라파 철학이 더욱 섞이는 방향으로 크게 기여했다.
2001 CM 121:2.10 헤롯과 로마 관리들 간의 우호적인 관계로 인해, 유대인은 온 세계를 안전하게 여행하게 됐으며, 그리하여 점점 더 많은 유대인이 로마 제국의 먼 지역은 물론, 다른 여러 동맹국들에게까지 하늘 나라의 새 복음을 지니고 침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또한 헤롯의 통치는, 히브리와 헬라 철학이 더욱 섞이는 데에도 많이 기여했다.
2007 URKA 121:2.10 헤롯과 로마 통치자들 간의 우호적인 관계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온 세계를 안전하게 여행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점점 더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의 먼 지역들은 물론 다른 여러 동맹국들에게까지 하늘의 왕국의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스며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또한 헤롯의 지배는 히브리와 그리스의 철학들이 더욱 융화되는 데에도 많이 기여하였다.
2025 121:2.10 헤롯과 로마의 지배자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유대인이 세계를 여행하기에 안전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로마 제국 및 조약을 맺은 여러 외국의 먼 구석까지도 하늘나라의 새 복음을 가지고 유대인이 더욱 침투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헤롯의 통치는 또한 히브리 철학과 헬라파 철학이 더욱 섞이는 방향으로 크게 기여했다.
1955 121:2.11 Herod built the harbor of Caesarea, which further aided in making Palestine the crossroads of the civilized world. He died in 4 B.C., and his son Herod Antipas governed Galilee and Perea during Jesus’ youth and ministry to A.D. 39. Antipas, like his father, was a great builder. He rebuilt many of the cities of Galilee, including the important trade center of Sepphoris.
2000 121:2.11 헤롯은 케자리아 항구를 지었고, 이것은 팔레스타인을 문명 세계의 교차로로 만드는 데 더욱 도움이 되었다. 헤롯은 기원전 4년에 죽었고, 그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가 어렸을 때와 봉사하던 기간에, 서기 39년까지 갈릴리와 페레아를 다스렸다. 안티파스는 아버지처럼 위대한 건축가였고, 중요한 무역 중심 세포리스를 포함하여, 갈릴리의 많은 도시를 다시 지었다.
2001 CM 121:2.11 헤롯이 가이사랴 항구를 건설했는데, 이것은 팔레스틴이 나중에 문명세계의 교차로가 되는 데 더욱 기여했다. 그는 기원전 4년에 죽었고,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의 청년기와 공생애 기간에, 그리고 서기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렸다. 안티파스는 아버지처럼 훌륭한 건축가였다. 그는 중요한 무역중심지인 세포리를 비롯하여, 갈릴리 지역에서 많은 도시를 개축했다.
2007 URKA 121:2.11 헤롯은 케자리아 항구를 건설하였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팔레스타인이 나중에 문명세계의 교차점이 되었다. 그는 기원전 4년에 죽었으며,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의 유년 시절 그리고 사명활동 기간 동안, 그리고 기원후 39년까지 갈릴리와 페레아 지역을 통치하였다. 안티파스는 자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건축가였다. 그는 세포리에 중요한 무역중심지를 세운 것을 포함하여, 갈릴리 지역에 있는 많은 도시들을 개축하였다.
2025 121:2.11 헤롯은 케자리아 항구를 지었고, 이것은 팔레스타인을 문명 세계의 교차로로 만드는 데 더욱 도움이 되었다. 헤롯은 기원전 4년에 죽었고, 그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가 어렸을 때와 봉사하던 기간에, 서기 39년까지 갈릴리와 페레아를 다스렸다. 안티파스는 아버지처럼 위대한 건축가였고, 중요한 무역 중심 세포리스를 포함하여, 갈릴리의 많은 도시를 다시 지었다.
1955 121:2.12 The Galileans were not regarded with full favor by the Jerusalem religious leaders and rabbinical teachers. Galilee was more gentile than Jewish when Jesus was born.
2000 121:2.12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와 율법 선생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갈릴리는 유대인 지역이기보다 이방(異邦)에 더 가까웠다.
2001 CM 121:2.12 갈릴리인은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과 율법학자 선생들로부터 충분한 호감을 얻지 못했다. 예수가 태어날 당시의 갈릴리는 유대보다 오히려 이방에 가까웠다.
2007 URKA 121:2.12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종교영도자들과 랍비라고 불리는 선생들로부터 호감을 사지 못하였다. 예수가 태어나실 당시의 갈릴리는 유대인의 지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방인의 지역이었다.
2025 121:2.12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와 율법 선생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갈릴리는 유대인 지역이기보다 이방(異邦)에 더 가까웠다.
3. AMONG THE GENTILES
3. 이방인의 형편
3. 이방인 가운데서
3. 이방인의 형편
3. 이방인의 형편
1955 121:3.1 Although the social and economic condition of the Roman state was not of the highest order, the widespread domestic peace and prosperity was propitious for the bestowal of Michael. In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the society of the Mediterranean world consisted of five well-defined strata:
2000 121:3.1 로마 국가의 사회 및 경제 조건은 가장 높은 수준은 아니었어도, 안으로 평화와 번영이 널리 퍼진 것은 미가엘의 수여에 적당하였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에, 지중해 세계의 사회는 분명히 구분이 된 다섯 계층으로 이루어졌다:
2001 CM 121:3.1 로마 국가의 사회 및 경제 조건이 가장 높은 수준은 아니었더라도, 국내에 널리 퍼진 평화와 풍요는 미가엘이 증여되기에 대단히 적합했다. 그리스도 이후 첫 세기 동안, 지중해 지역 사회에는 다음과 같이 잘-구분된 다섯 계층이 있었다:
2007 URKA 121:3.1 로마국가의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가장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국내에 널리 퍼져있던 평화와 번영은 미가엘이 증여되는 데 있어서 매우 적합하였다. 그리스도 이후 첫 세기 동안 지중해 지역의 공동체 속에는, 다음과 같이 잘 조직된 다섯 개의 사회계급들이 있었다:
2025 121:3.1 로마 국가의 사회 및 경제 조건은 가장 높은 수준은 아니었어도, 안으로 평화와 번영이 널리 퍼진 것은 미가엘의 수여에 적당하였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에, 지중해 세계의 사회는 분명히 구분이 된 다섯 계층으로 이루어졌다:
1955 121:3.2 1. The aristocracy. The upper classes with money and official power, the privileged and ruling groups.
2000 121:3.2 1. 귀족 계급. 돈과 공식 권력을 가진 상류 계급, 특권을 가진 통치 집단.
2001 CM 121:3.2 1. 귀족.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상위계층으로, 특권을 누리면서 통치하는 집단.
2007 URKA 121:3.2 1. 귀족 계급. 돈과 힘을 쥐고 있는 상위등급으로 특권을 가진 지배계층.
2025 121:3.2 1. 귀족 계급. 돈과 공식 권력을 가진 상류 계급, 특권을 가진 통치 집단.
1955 121:3.3 2. The business groups. The merchant princes and the bankers, the traders—the big importers and exporters—the international merchants.
2000 121:3.3 2. 상업 집단. 거상(巨商)과 은행가, 무역상―큰 수입ㆍ수출상―국제 상인.
2001 CM 121:3.3 2. 사업자 집단. 거상{巨商}, 은행가, 무역업자--큰 규모의 수출입 업자-- 곧 국제 상인.
2007 URKA 121:3.3 2. 사업자 집단들. 부유한 상인들과 은행가들, 무역업자들─큰 규모의 수입, 수출업자들─과 그리고 국제적인 상인들.
2025 121:3.3 2. 상업 집단. 거상(巨商)과 은행가, 무역상 ― 큰 수입ㆍ수출상 ― 국제 상인.
1955 121:3.4 3. The small middle class. Although this group was indeed small, it was very influential and provided the moral backbone of the early Christian church, which encouraged these groups to continue in their various crafts and trades. Among the Jews many of the Pharisees belonged to this class of tradesmen.
2000 121:3.4 3. 작은 중류 계급. 이 집단은 정말로 작기는 했어도 아주 영향력이 있었고, 초대 기독교 교회의 정신적 뼈대를 마련해 주었으며, 교회는 이 집단에게 다양한 기술과 상업을 계속할 것을 권장했다. 유대인 가운데 많은 바리새인이 이 계급의 상인에 속했다.
2001 CM 121:3.4 3. 소수의 중산 계층. 이 집단은 정말로 작기는 했지만 매우 영향력이 있었고,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도덕적 중추 역할을 했는데, 교회는 이 집단이 다양한 생산과 교역을 계속하도록 장려했다. 유대인 가운데 많은 바리새인이 이 계층의 무역업자에 속했다.
2007 URKA 121:3.4 3. 소수의 중산층 계급. 이 집단은 규모는 매우 작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매우 영향력이 있었고 도덕적인 중추 역할을 하였으며, 교회는 이 집단들이 계속하여 다양한 생산과 교역을 하도록 장려하였다. 유대인들 중에서 많은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상인 등급에 속하였다.
2025 121:3.4 3. 작은 중류 계급. 이 집단은 정말로 작기는 했어도 아주 영향력이 있었고, 초대 기독교 교회의 정신적 뼈대를 마련해 주었으며, 교회는 이 집단에게 다양한 기술과 상업을 계속할 것을 권장했다. 유대인 가운데 많은 바리새인이 이 계급의 상인에 속했다.
1955 121:3.5 4. The free proletariat. This group had little or no social standing. Though proud of their freedom, they were placed at great disadvantage because they were forced to compete with slave labor. The upper classes regarded them disdainfully, allowing that they were useless except for “breeding purposes.”
2000 121:3.5 4. 자유로운 노동자 계급. 이 집단은 거의 또는 아무런 사회적 지위가 없었다. 비록 자유를 자랑스럽게 느꼈지만, 노예 노동과 경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크게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상류 계급은 이들이 “번식하는 목적” 외에 쓸모 없음을 인정하면서 이들을 경멸하였다.
2001 CM 121:3.5 4. 자유 무산 계층. 사회적 지위가 아주 낮거나 없는 집단. 자유를 누린다는 자부심은 있었으나, 노예 노동자와 경쟁하도록 내몰렸기 때문에 몹시 불리한 입장에 놓여있었다. 상위 계층들은 이들을 경멸했으며, “자손을 번성시키는 목적”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여겼다.
2007 URKA 121:3.5 4. 자유 무산 계급.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거나 없는 집단.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자부심은 있으나 노예 노동자와 경쟁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상위 등급들은 이들을 경멸하였으며, “자손을 번성시키는 목적” 이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여겼다.
2025 121:3.5 4. 자유로운 노동자 계급. 이 집단은 거의 또는 아무런 사회적 지위가 없었다. 비록 자유를 자랑스럽게 느꼈지만, 노예 노동과 경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크게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상류 계급은 이들이 “번식하는 목적” 외에 쓸모 없음을 인정하면서 이들을 경멸하였다.
1955 121:3.6 5. The slaves. Half the population of the Roman state were slaves; many were superior individuals and quickly made their way up among the free proletariat and even among the tradesmen. The majority were either mediocre or very inferior.
2000 121:3.6 5. 노예. 로마 국가 인구의 절반은 노예였고, 다수가 우수한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빨리 진출해서 자유 노동자, 그리고 상인(商人)들 틈에도 끼었다. 대다수는 평범하거나 아주 열등했다.
2001 CM 121:3.6 5. 노예 계층. 로마 국가 인구의 절반이 노예였으며;자유 무산 계층 또는 무역업자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향상시키는 통로를 재빨리 개척할 만큼, 개인적으로 우수한 자들도 있었다. 대다수는 뒤떨어졌거나 매우 열등했다.
2007 URKA 121:3.6 5. 노예들 로마제국 인구의 절반이 노예였으며; 많은 자들이 우월한 개별존재였고, 자유 무산 계급으로, 혹은 상인 계급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의 신분을 향상시키는 통로를 재빨리 개척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예들은 평범하거나 열등한 상태에 있었다.
2025 121:3.6 5. 노예. 로마 국가 인구의 절반은 노예였고, 다수가 우수한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빨리 진출해서 자유 노동자, 그리고 상인(商人)들 틈에도 끼었다. 대다수는 평범하거나 아주 열등했다.
1955 121:3.7 Slavery, even of superior peoples, was a feature of Roman military conquest. The power of the master over his slave was unqualified. The early Christian church was largely composed of the lower classes and these slaves.
2000 121:3.7 우수한 민족들이 노예가 되었어도, 노예 제도는 로마의 군사(軍事) 정복의 특징이었다. 노예에 대한 주인의 권한은 무제한이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하층 계급과 이 노예들로 구성되었다.
2001 CM 121:3.7 우수한 사람들조차 노예가 된 것은, 로마의 군사 정복으로 인한 특색이었다. 노예에 대한 주인의 권력은 무제한이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는 주로 낮은 계층과 이 노예들로 구성됐다.
2007 URKA 121:3.7 우월한 국민들조차 노예가 된 것은 로마의 군사적 정복으로 인한 하나의 특징이었다. 노예에 대한 주인의 힘은 분별불가적 이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 교회는 주로 하층 등급들과 이러한 노예들로 구성되었다.
2025 121:3.7 우수한 민족들이 노예가 되었어도, 노예 제도는 로마의 군사(軍事) 정복의 특징이었다. 노예에 대한 주인의 권한은 무제한이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하층 계급과 이 노예들로 구성되었다.
1955 121:3.8 Superior slaves often received wages and by saving their earnings were able to purchase their freedom. Many such emancipated slaves rose to high positions in state, church, and the business world. And it was just such possibilities that made the early Christian church so tolerant of this modified form of slavery.
2000 121:3.8 우수한 노예들은 흔히 임금을 받았고, 소득을 저축해서 자유를 살 수 있었다. 해방된 많은 그런 노예는 국가ㆍ교회ㆍ상업계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다. 바로 그런 가능성이 초대 기독교 교회가 이 수정된 형태의 노예 제도를 그토록 묵인하게 만들었다.
2001 CM 121:3.8 우수한 노예는 임금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벌어들인 돈을 저축해서 자유를 살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방된 노예 가운데 다수가, 국가나 교회나 상업 분야에서 높은 지위로 올라갔다. 변경된 이 노예제도를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가 쉽게 용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가능성 때문이었다.
2007 URKA 121:3.8 우수한 노예들은 종종 임금을 받았으며 자신들의 수입을 저축하여 돈으로 자유를 살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해방된 많은 노예들이 국가와 교회 그리고 상업세계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러한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초기의 그리스도교 교회는 변형된 이 노예제도를 쉽게 용납할 수 있었다.
2025 121:3.8 우수한 노예들은 흔히 임금을 받았고, 소득을 저축해서 자유를 살 수 있었다. 해방된 많은 그런 노예는 국가ㆍ교회ㆍ상업계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다. 바로 그런 가능성이 초대 기독교 교회가 이 수정된 형태의 노예 제도를 그토록 묵인하게 만들었다.
1955 121:3.9 There was no widespread social problem in the Roman Empire in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The major portion of the populace regarded themselves as belonging in that group into which they chanced to be born. There was always the open door through which talented and able individuals could ascend from the lower to the higher strata of Roman society, but the people were generally content with their social rank. They were not class conscious, neither did they look upon these class distinctions as being unjust or wrong. Christianity was in no sense an economic movement having for its purpose the amelioration of the miseries of the depressed classes.
2000 121:3.9 서기 1세기에 로마 제국에는 널리 퍼진 사회 문제가 없었다. 민중의 대부분은 그들이 어쩌다 태어난 집단에 자신들이 속한다고 여겼다. 재능 있고 유능한 사람들이 로마 사회의 낮은 계층에서 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이 언제나 열려 있었으나,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의 사회적 지위에 만족했다. 그들은 계급 의식이 없었고, 이 계급의 차별이 부당하거나 그릇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도 억압받는 계급의 곤경을 개선(改善)하는 목적을 가진 경제 운동이 아니었다.
2001 CM 121:3.9 그리스도 이후 첫 세기 동안, 로마 제국에 널리 퍼진 사회 문제는 없었다. 다수의 서민은 자신이 우연히 태어난 그 집단에 소속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재주 있고 유능한 개인들이 로마 사회의 낮은 계층에서 높은 계층으로 상승할 수 있는 문이 항상 열려 있었으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사회 직급에 만족했다. 그들은 계층을 의식하지 않았고, 이런 계층 구분이 정당하지 못하거나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는, 억압받는 계층의 고통을 개선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경제 운동이 전혀 아니었다.
2007 URKA 121:3.9 그리스도 이후 첫 세기 동안, 로마제국 안에는 널리 퍼져있는 사회적인 문제가 없었다. 대부분의 일반 대중들은 자신들이 우연히 태어난 그 집단 안에 소속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재능 있고 유능한 개별존재들에게는 낮은 계급에서 로마 사회의 높은 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는 문이 언제나 열려 있었지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계급에 만족하였다. 그들은 등급을 의식하거나 이러한 등급 구분이 그릇되거나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는 억압받는 계층들의 고통을 개선시키는 그것의 목적을 위한 경제적인 움직임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2025 121:3.9 서기 1세기에 로마 제국에는 널리 퍼진 사회 문제가 없었다. 민중의 대부분은 그들이 어쩌다 태어난 집단에 자신들이 속한다고 여겼다. 재능 있고 유능한 사람들이 로마 사회의 낮은 계층에서 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이 언제나 열려 있었으나,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의 사회적 지위에 만족했다. 그들은 계급 의식이 없었고, 이 계급의 차별이 부당하거나 그릇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도 억압받는 계급의 곤경을 개선(改善)하는 목적을 가진 경제 운동이 아니었다.
1955 121:3.10 Although woman enjoyed more freedom throughout the Roman Empire than in her restricted position in Palestine, the family devotion and natural affection of the Jews far transcended that of the gentile world.
2000 121:3.10 여자는 팔레스타인에서 신분에 제한을 받은 것보다 로마 제국 전역에서 더 자유를 누렸지만, 유대인이 가족에게 바치는 헌신과 자연스러운 애정은 이방 세계보다 훨씬 나았다.
2001 CM 121:3.10 여자는, 팔레스틴에서 제한된 지위에 있었던 것에 비해, 로마 제국 전역에서 더 많은 자유를 누렸지만, 가족에 대한 유대인의 헌신과 자연스런 애정은 이방인 세계의 수준을 훨씬 능가했다.
2007 URKA 121:3.10 여자들은 비록 팔레스타인에서의 제한된 지위에 비하여, 로마제국 전역에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가족에 대한 헌신과 자연스러운 애정은 이방인 세계의 그것을 훨씬 초월했다.
2025 121:3.10 여자는 팔레스타인에서 신분에 제한을 받은 것보다 로마 제국 전역에서 더 자유를 누렸지만, 유대인이 가족에게 바치는 헌신과 자연스러운 애정은 이방 세계보다 훨씬 나았다.
4. GENTILE PHILOSOPHY
4. 이방인의 철학
4. 이방 철학
4. 이방인의 철학
4. 이방인의 철학
1955 121:4.1 The gentiles were, from a moral standpoint, somewhat inferior to the Jews, but there was present in the hearts of the nobler gentiles abundant soil of natural goodness and potential human affection in which it was possible for the seed of Christianity to sprout and bring forth an abundant harvest of moral character and spiritual achievement. The gentile world was then dominated by four great philosophies, all more or less derived from the earlier Platonism of the Greeks. These schools of philosophy were:
2000 121:4.1 도덕적 견지에서, 이방인은 유대인보다 얼마큼 못했지만, 고상한 이방인들의 가슴 속에는 타고난 선한 자질과 잠재하는 인간적 애정을 기를 비옥한 토양이 있었고, 거기서 기독교의 씨앗이 싹트고, 도덕적 인격과 영적 성취의 수확을 풍부히 거두는 것이 가능했다. 그때 이방 세계에는 4대 철학이 유행하였는데, 모두가 전에 있었던 그리스인의 플라톤 사상에서 어느 정도 파생되었다. 이 철학 학파들은 다음과 같다:
2001 CM 121:4.1 도덕적 관점에서, 이방인은 유대인보다 어느 정도 열등했으나, 더 고상한 이방인의 마음 속에는 천부적인 선함과 잠재적인 인간 애정의 풍부한 토양이 나타났는데, 그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씨앗이 싹트고 자라나서, 도덕적 성품과 영적 성취를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었다. 이방 세계는 그때 네 가지 중요한 철학에 지배됐는데, 그것들은 모두, 어느 정도 그리스인의 초기 플라톤주의에서 파생됐다. 이 철학 학파는 다음과 같다:
2007 URKA 121:4.1 도덕적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 비해 어느 정도 열등하였으나, 보다 고상한 이방인들의 가슴 속에는 선천적인 선함과 잠재적인 인간 애정의 풍부한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씨앗이 싹트고 자라나서 도덕적인 성격과 영적 성취에 대한 풍성한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다. 이방의 세계는 그 때 네 가지의 중요한 철학들에 의해서 지배되었는데, 이들 모두는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주의로부터 파생된 것이었다. 이 철학 학파들은 다음과 같다:
2025 121:4.1 도덕적 견지에서, 이방인은 유대인보다 얼마큼 못했지만, 고상한 이방인들의 가슴 속에는 타고난 선한 자질과 잠재하는 인간적 애정이 자랄 비옥한 토양이 있었고, 거기서 기독교의 씨앗이 싹트고, 도덕적 인격과 영적 성취의 수확을 풍부히 거두는 것이 가능했다. 그때 이방 세계에는 4대 철학이 유행하였는데, 모두가 전에 있었던 그리스인의 플라톤 사상에서 어느 정도 파생되었다. 이 철학 학파들은 다음과 같다:
1955 121:4.2 1. The Epicurean. This school of thought was dedicated to the pursuit of happiness. The better Epicureans were not given to sensual excesses. At least this doctrine helped to deliver the Romans from a more deadly form of fatalism; it taught that men could do something to improve their terrestrial status. It did effectually combat ignorant superstition.
2000 121:4.2 1. 쾌락주의자. 이 사상의 학파는 행복의 추구에 마음을 쏟았다. 상급 쾌락주의자들은 지나친 육욕에 빠지지 않았다. 적어도, 이 교리는 그보다 더 치명적 형태의 숙명론으로부터 로마인을 벗어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무엇인가 노력하면 현세에서 지위를 개선할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지한 미신(迷信)을 효과적으로 퇴치하였다.
2001 CM 121:4.2 1. 에피쿠로스학파. 이 사고{思考} 학파는 행복 추구에 전념했다. 절반 이상의 에피쿠로스인은 지나친 육욕{肉慾}에 빠지려하지 않았다. 이 교리는, 적어도 로마인이 치명적 숙명론 틀에서 해방되도록 도왔으며;사람이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노력하면 신분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무지한 미신을 효과적으로 퇴치했다.
2007 URKA 121:4.2 1. 쾌락주의 학파. 이 학파는 행복 추구에 전념하였다. 상급의 쾌락주의자들은 감각적 무절제에 빠지지 않았다. 이 신조는 적어도 절망적인 숙명론으로부터 로마인들을 구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사람들이 그들의 땅에서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무지몽매한 미신과 효과적으로 싸워나갔다.
2025 121:4.2 1. 쾌락주의자. 이 사상의 학파는 행복의 추구에 마음을 쏟았다. 상급 쾌락주의자들은 지나친 육욕에 빠지지 않았다. 적어도, 이 교리는 그보다 더 치명적 형태의 숙명론에서 로마인을 벗어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무엇인가 노력하면 현세에서 지위를 개선할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지한 미신(迷信)을 효과적으로 퇴치하였다.
1955 121:4.3 2. The Stoic. Stoicism was the superior philosophy of the better classes. The Stoics believed that a controlling Reason-Fate dominated all nature. They taught that the soul of man was divine; that it was imprisoned in the evil body of physical nature. Man’s soul achieved liberty by living in harmony with nature, with God; thus virtue came to be its own reward. Stoicism ascended to a sublime morality, ideals never since transcended by any purely human system of philosophy. While the Stoics professed to be the “offspring of God,” they failed to know him and therefore failed to find him. Stoicism remained a philosophy; it never became a religion. Its followers sought to attune their minds to the harmony of the Universal Mind, but they failed to envisage themselves as the children of a loving Father. Paul leaned heavily toward Stoicism when he wrote, “I have learned in whatsoever state I am, therewith to be content.”
2000 121:4.3 2. 금욕주의자. 금욕주의는 상류 계층이 지녔던 우수한 철학이었다. 금욕주의자는 통제하는 이성(理性)과 운명이 모든 자연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이들은 사람의 혼은 신성하며 육체의 성품을 가진 악한 몸 속에 갇혀 있다고 가르쳤다. 사람의 혼은 자연, 곧 하나님과 조화되어 삶으로 해방을 얻으며, 따라서 미덕은 그 자체가 보상이었다. 금욕주의는 숭고한 도덕 수준까지 올라갔고 그 후에 어떤 순전한 인간적 철학 체계도 결코 뛰어넘지 못한 이상이었다. 금욕주의자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공언했으나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하나님을 찾아내지 못했다. 금욕주의는 하나의 철학으로 남았고, 결코 종교가 되지 못했다. 그 추종자들은 그들의 지성을 우주 지성과 조화시키려고 애썼지만, 그들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녀인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어떤 상태에 처해 있든지, 그에 만족하기를 배웠노라”하고 기록했을 때, 바울은 금욕주의에 깊이 젖어 있었다.
2001 CM 121:4.3 2. 스토아학파. 금욕주의는 상류 계층이 지녔던 우수한 철학이었다. 금욕주의자는 통제하는 이성-숙명이 자연계 전체를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사람의 혼이 신성하며;물질 본성의 악한 육체 속에 혼이 갇혀있다고 가르쳤다. 사람의 혼은, 자연계 곧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통해서 자유를 성취할 수 있으며;따라서 미덕은 그 자체가 보상이었다. 금욕주의는 탁월한 도덕 수준까지 상승했고, 그후에 어떤 순전한 인간적 철학체계도 결코 뛰어넘지 못한 이상이었다. 금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자손”이 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를 알아내기에 실패했고, 따라서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금욕주의는 철학으로 남게 됐고;결코 종교가 되지 못했다. 그 추종자들은 우주 정신의 조화에 자신의 정신을 조율시키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녀임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바울은, “나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만족하기를 배웠다”는 글을 썼을 때, 금욕주의에 많이 쏠려있었다.
2007 URKA 121:4.3 2. 금욕주의 학파. 금욕주의는 상위 계급 사람들의 우월한 철학이었다. 금욕주의자들은 통제하고 있는 이성-숙명이 모든 본성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사람의 혼이 신성한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물질적 본성을 갖는 악한 육체 속에 그것이 속박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사람의 혼은 자연적인 본성, 하느님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통하여 해방을 성취할 수 있으며, 따라서 덕행은 스스로 보상을 가져오게 한다. 금욕주의는 이전의 어떤 순전한 인간의 철학체계도 초월하지 못하였던 숭고한 도덕성, 이상들로 상승하였다. 금욕주의자들은 “하느님의 자손”이 되겠다고 선언하였지만, 그를 알아내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따라서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금욕주의는 하나의 철학으로 남아있게 되고; 종교가 되지못하였다. 그 추종자들은 우주적 마음과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자기들의 마음을 조율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자녀임을 직시하지 못하였다. 바울은 “나는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만족하는 것을 배웠다.”라는 글을 썼을 때, 그는 금욕주의에 상당히 의존되어 있었다.
2025 121:4.3 2. 금욕주의자. 금욕주의는 상류 계층이 지녔던 우수한 철학이었다. 금욕주의자는 통제하는 이성(理性)과 운명이 모든 자연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이들은 사람의 혼은 신성하며 육체의 성품을 가진 악한 몸 속에 갇혀 있다고 가르쳤다. 사람의 혼은 자연, 곧 하나님과 조화되어 삶으로 해방을 얻으며, 따라서 미덕은 그 자체가 보상이었다. 금욕주의는 숭고한 도덕 수준까지 올라갔고 그 후에 어떤 순전한 인간적 철학 체계도 결코 뛰어넘지 못한 이상이었다. 금욕주의자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공언했으나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하나님을 찾아내지 못했다[10]. 금욕주의는 하나의 철학으로 남았고, 결코 종교가 되지 못했다. 그 추종자들은 그들의 지성을 우주 지성과 조화시키려고 애썼지만, 그들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녀인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어떤 상태에 처해 있든지, 그에 만족하기를 배웠노라”하고 기록했을 때, 바울은 금욕주의에 깊이 젖어 있었다
[11].
1955 121:4.4 3. The Cynic. Although the Cynics traced their philosophy to Diogenes of Athens, they derived much of their doctrine from the remnants of the teachings of Machiventa Melchizedek. Cynicism had formerly been more of a religion than a philosophy. At least the Cynics made their religio-philosophy democratic. In the fields and in the market places they continually preached their doctrine that “man could save himself if he would.” They preached simplicity and virtue and urged men to meet death fearlessly. These wandering Cynic preachers did much to prepare the spiritually hungry populace for the later Christian missionaries. Their plan of popular preaching was much after the pattern, and in accordance with the style, of Paul’s Epistles.
2000 121:4.4 3. 견유학파. 견유학파의 철학은 아테네의 디오게네스까지 유래를 추적할 수 있으나, 교리의 상당 부분은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가르침의 잔재로부터 파생되었다. 이전에 견유주의는 철학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였다. 적어도 견유학파는 그들의 종교 철학을 민주화하였다. 들에서 시장에서, 이들은 “사람은 자기가 원하면 자신을 구할 수 있다”는 교리를 줄곧 전파했다. 단순과 미덕을 가르쳤고, 사람들에게 겁 없이 죽음을 맞이하라고 권했다. 이 떠돌이 견유학파(犬儒學派) 전도사들은 영적으로 갈급한 민중을 후일에 기독교 선교사들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들 사이에 유행한 설교 순서는 바울 서한의 형식과 그 문체를 많이 따랐다.
2001 CM 121:4.4 3. 견유{犬儒}학파. 견유학파는 그 철학 자취가 아덴의 디오게네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들의 교리 중에서 많은 부분은 마키벤타 멜기세덱 교훈의 잔재에서 유래됐다. 견유주의는 초기에는 철학이라기보다 종교에 더 가까웠다. 견유학파는 적어도 그들의 종교-철학을 대중적{大衆的}이 되게 했다. 그들은 들에서나 시장에서,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교리를 줄곧 전파했다. 검소함과 덕행을 전파했고,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했다. 이런 방랑하는 견유학파 설교자들은, 후대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을 위하여 영적으로 배고픈 민중을 준비시키기에 많이 공헌했다. 그들의 대중 설교 방식은 바울 서신의 형식과 문체를 많이 따랐다.
2007 URKA 121:4.4 3. 견유(犬儒)학파. 견유학파는 그들의 철학의 자취가 아덴의 디오게네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갔지만, 그들의 교리들 대부분은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가르침들 중에서 남아있는 부분으로부터 유래되었다. 견유주의는 초기에는 철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종교였다. 견유주의자들은 적어도 자기들의 종교적-철학을 민주적인 체제로 만들었다. 벌판에서나 시장에서 그들은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자신들의 신조를 설파하였다. 그들은 단순성과 선행을 가르쳤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하도록 가르쳤다. 이러한 방랑하는 견유주의 전도자들은, 영적으로 배고픈 대중들이 나중에 그리스도교적 교리와 만날 수 있도록 많이 준비시켜 주었다. 그들의 대중 설교 계획은 바울 서신들을 주로 본 땄고 그것들의 문체와 흡사하였다.
2025 121:4.4 3. 견유학파. 견유학파의 철학은 아테네의 디오게네스까지 유래를 추적할 수 있으나, 교리의 상당 부분은 마키벤타 멜기세덱의 가르침의 잔재에서 파생되었다. 이전에 견유주의는 철학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였다. 적어도 견유학파는 그들의 종교 철학을 민주화하였다. 들에서 시장에서, 이들은 “사람은 자기가 원하면 자신을 구할 수 있다”는 교리를 줄곧 전파했다. 단순과 미덕을 가르쳤고, 사람들에게 겁 없이 죽음을 맞이하라고 권했다. 이 떠돌이 견유학파(犬儒學派) 전도사들은 영적으로 갈급한 민중을 후일에 기독교 선교사들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들 사이에 유행한 설교 순서는 바울 서한의 형식과 그 문체를 많이 따랐다.
1955 121:4.5 4. The Skeptic. Skepticism asserted that knowledge was fallacious, and that conviction and assurance were impossible. It was a purely negative attitude and never became widespread.
2000 121:4.5 4. 회의주의자. 회의주의(懷疑主義)는 지식은 허위요, 확신과 보장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순전히 부정적 태도였고, 결코 널리 퍼지지 않았다.
2001 CM 121:4.5 4. 회의론{懷疑論}학파. 회의론은, 지식이란 그릇된 것이며 신념이나 확신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순전히 부정적인 태도였고, 널리 전파된 적이 전혀 없었다.
2007 URKA 121:4.5 4. 회의주의 학파. 회의주의는 지식이란 그릇된 것이며 신념이나 믿음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순전히 부정적인 태도였으며 널리 전파된 적이 없었다.
2025 121:4.5 4. 회의주의자. 회의주의(懷疑主義)는 지식은 허위요, 확신과 보장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순전히 부정적 태도였고, 결코 널리 퍼지지 않았다.
1955 121:4.6 These philosophies were semireligious; they were often invigorating, ethical, and ennobling but were usually above the common people. With the possible exception of Cynicism, they were philosophies for the strong and the wise, not religions of salvation for even the poor and the weak.
2000 121:4.6 이 여러 철학은 종교에 준하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흔히, 활력을 불어넣고 윤리적이고 사람을 고상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대개는 서민의 수준을 넘었다. 아마도 견유주의를 제외하고, 이것들은 강한 자와 지혜로운 자를 위한 철학이었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도 구원을 주는 종교는 아니었다.
2001 CM 121:4.6 이런 철학들은 반{半}종교적이었으며;종종 기운을 북돋우고 윤리적이고 고상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지만, 대개는 평범한 사람이 받아들이기에 벅찬 것이었다. 아마도 견유주의는 제외될 수 있겠으나, 이것들은 강한 자와 현명한 자를 위한 것이었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위한 구원의 종교가 아니었다.
2007 URKA 121:4.6 이러한 철학들은 반(半)-종교적인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종종 사람들을 활기 있게 하고 윤리적이며 고귀하게 만들기도 하였으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아마도 견유주의는 제외될 수 있겠지만, 이것들은 강한 자들과 현명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향한 구원의 종교는 아니었다.
2025 121:4.6 이 여러 철학은 종교에 준하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흔히, 활력을 불어넣고 윤리적이고 사람을 고상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대개는 서민의 수준을 넘었다. 아마도 견유주의를 제외하고, 이것들은 강한 자와 지혜로운 자를 위한 철학이었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게도 구원을 주는 종교는 아니었다.
5. THE GENTILE RELIGIONS
5. 이방인의 종교
5. 이방 종교
5. 이방의 종교들
5. 이방인의 종교
1955 121:5.1 Throughout preceding ages religion had chiefly been an affair of the tribe or nation; it had not often been a matter of concern to the individual. Gods were tribal or national, not personal. Such religious systems afforded little satisfaction for the individual spiritual longings of the average person.
2000 121:5.1 이전의 시대 전체를 통해서, 종교는 주로 부족이나 국가의 일이었고, 흔히 개인이 아랑곳할 문제가 아니었다. 신들은 개인이 아니라, 부족이나 민족을 상대하였다. 그러한 종교 체계는 보통 사람이 개인으로서 가진 영적 열망을 거의 채워주지 못했다.
2001 CM 121:5.1 이전{以前} 시대들 내내, 종교는 주로 부족 또는 국가의 관심사였으며;개인과 관련되는 문제일 경우는 드물었다. 신{神}들은 부족적이거나 국가적이었고, 개인적이지 않았다. 그런 종교 체계는, 일반 사람의 개인적인 영적 동경에는 별다른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2007 URKA 121:5.1 이전의 모든 시대를 통하여 종교는 주로 한 부족이나 또는 국가의 문제였으며; 개별존재에게 관심을 두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방 신들은 부족 또는 국가를 위한 존재였고, 개인을 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한 종교 체계들은 보통 개인의 개별적인 영적 소망에 대한 만족을 조금도 잘 제공하지 못하였다.
2025 121:5.1 이전의 시대 전체를 통해서, 종교는 주로 부족이나 국가의 일이었고, 흔히 개인이 아랑곳할 문제가 아니었다. 신들은 개인이 아니라, 부족이나 민족을 상대하였다. 그러한 종교 체계는 보통 사람이 개인으로서 가진 영적 열망을 거의 채워주지 못했다.
2000 121:5.2 예수의 시절에 서양의 종교는 다음과 같았다.
2001 CM 121:5.2 예수 시대에 서양에 있던 종교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2007 URKA 121:5.2 예수 시대에 서양의 종교들에는 다음이 포함 된다:
2025 121:5.2 예수의 시절에 서양의 종교는 다음과 같았다.
1955 121:5.3 1. The pagan cults. These were a combination of Hellenic and Latin mythology, patriotism, and tradition.
2000 121:5.3 1. 이교도의 종파. 이 종파들은 헬라인과 라틴 족의 신화(神話)ㆍ애국심, 그리고 전통의 조합이었다.
2001 CM 121:5.3 1. 이교{異敎} 종파들. 이것들은 헬라와 라틴의 신화와 애국심과 전통의 조합이었다.
2007 URKA 121:5.3 1. 이교도 예배종파. 이것들 속에는 그리스와 라틴의 신화, 애국심, 그리고 전통이 뒤섞여 있었다.
2025 121:5.3 1. 이교도의 종파. 이 종파들은 헬라인과 라틴 족의 신화(神話)ㆍ애국심ㆍ전통의 조합이었다.
1955 121:5.4 2. Emperor worship. This deification of man as the symbol of the state was very seriously resented by the Jews and the early Christians and led directly to the bitter persecutions of both churches by the Roman government.
2000 121:5.4 2. 황제 숭배. 유대인과 초대 기독교인들은 국가의 상징으로서 이렇게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을 몹시 분개하였고, 이러한 신격화는 이 두 종파의 교회가 로마 정부의 모진 핍박을 받게 만드는 직접 원인이었다.
2001 CM 121:5.4 2. 황제숭배. 유대인과 초기 그리스도교인은, 이렇게 사람을 국가의 상징으로서 신격화하는 것에 심히 분개했으며, 이런 신격화는, 로마 정부가 두 종파의 교회를 혹독하게 박해하도록 직접 유도했다.
2007 URKA 121:5.4 2. 황제숭배. 국가의 상징으로서 사람을 이렇게 신성화하는 것에 대하여 유대교인들과 초기 그리스도교인 들은 매우 분개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로마 정부로 하여금 이 양쪽 교회들에 대하여 혹독한 박해를 가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025 121:5.4 2. 황제 숭배. 유대인과 초대 기독교인들은 국가의 상징으로서 이렇게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을 몹시 분개하였고, 이러한 신격화는 이 두 종파의 교회가 로마 정부의 모진 핍박을 받게 만드는 직접 원인이었다.
1955 121:5.5 3. Astrology. This pseudo science of Babylon developed into a religion throughout the Greco-Roman Empire. Even in the twentieth century man has not been fully delivered from this superstitious belief.
2000 121:5.5 3. 점성술. 바빌론의 이 사이비(似而非) 과학은 그리스와 로마 제국에 두루, 종교로 발전되었다. 20세기에도 사람은 이 미신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2001 CM 121:5.5 3. 점성술. 바벨론의 이 사이비 과학은, 그리스-로마 제국 전역에서 종교로 발전했다. 심지어 20세기에도, 사람들은 이 미신적인 믿음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2007 URKA 121:5.5 3. 점성술. 바빌론의 이 사이비 과학은 그리스-로마제국에 두루 종교로 발전하였다. 심지어 20세기 사람들도 이 미신적인 믿음으로부터 충분하게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2025 121:5.5 3. 점성술. 바빌론의 이 사이비(似而非) 과학은 그리스와 로마 제국에 두루, 종교로 발전되었다. 20세기에도 사람은 이 미신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1955 121:5.6 4. The mystery religions. Upon such a spiritually hungry world a flood of mystery cults had broken, new and strange religions from the Levant, which had enamored the common people and had promised them individual salvation. These religions rapidly became the accepted belief of the lower classes of the Greco-Roman world. And they did much to prepare the way for the rapid spread of the vastly superior Christian teachings, which presented a majestic concept of Deity, associated with an intriguing theology for the intelligent and a profound proffer of salvation for all, including the ignorant but spiritually hungry average man of those days.
2000 121:5.6 4. 신비 종파. 그토록 영적으로 갈급한 세계에 신비 종파들의 홍수가 밀려 들어왔는데, 레반트에서 온 새롭고 이상한 종교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이들에게 개인의 구원을 약속했다. 이 종교들은 급속히 그리스ㆍ로마 세계의 하류 계급이 받아들인 신앙이 되었다. 이 종교들은 훨씬 우수한 기독교의 가르침이 급속히 퍼지도록 길을 예비하는 데 많이 이바지하였다. 지적인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신학, 그리고 그 시절에 무지하지만 영적으로 갈급한 서민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엄청난 제안과 관련하여, 기독교의 가르침은 신에 관하여 탁월한 개념을 제시했다.
2001 CM 121:5.6 4. 신비 종교들. 영적으로 몹시 갈급한 세상 사람들에게, 신비 종파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왔는데, 레반트에서 온 새롭고 색다른 종교들은, 평범한 인간을 매혹시키고 그들에게 개인 구원을 약속했다. 이 종교들은 재빨리, 그리스-로마 세계의 낮은 계층이 받아들인 믿음이 됐다. 그리고 이 종교들은, 훨씬 뛰어난 그리스도교 교훈이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줬으며, 그리스도교 교훈은, 지성인에게 흥미를 자아내는 신학, 그리고 무지하기는 했어도 영적으로 갈급해있던 당시의 평민을 포함해서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심오한 제안과 관련하여, 웅대한 신격 개념을 제시했다.
2007 URKA 121:5.6 4. 신비 예배종파. 그토록 영적으로 굶주린 세계에, 신비 예배종파들, 레반트 지역으로부터 생겨난 새롭고 낯선 종교들의 홍수가 덮쳐 들어왔었고 이들 종교들은 일반 대중들을 홀리게 만들고 그들에게 개별적 구원을 약속했다. 이들 종교는 급속하게 그리스-로마 세계의 하위 계층의 인정을 받는 믿음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리스도교 가르침들, 신(神)에 대한 장엄한 개념을 제시하는, 광대하게 우월한 그리스도교 가르침들이 급속하게 확산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그리스도교 가르침들은, 부수적으로는 지식인에게 흥미를 이끄는 신학을, 그리고 무지하였지만 영적으로 굶주린 평범한 사람을 포함하는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에 대한 심오한 제안을 제시하였다.
2025 121:5.6 4. 신비 종파. 그토록 영적으로 갈급한 세계에 신비 종파들의 홍수가 밀려 들어왔는데, 레반트에서 온 새롭고 이상한 종교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이들에게 개인의 구원을 약속했다. 이 종교들은 급속히 그리스ㆍ로마 세계의 하류 계급이 받아들인 신앙이 되었다. 이 종교들은 훨씬 우수한 기독교의 가르침이 급속히 퍼지도록 길을 예비하는 데 많이 기여하였다. 지적인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신학, 그리고 그 시절에 무지하지만 영적으로 갈급한 서민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 받는다는 엄청난 제안과 관련하여, 기독교의 가르침은 신에 관하여 탁월한 개념을 제시했다.
1955 121:5.7 The mystery religions spelled the end of national beliefs and resulted in the birth of the numerous personal cults. The mysteries were many but were all characterized by:
2000 121:5.7 신비 종교들은 민족 신앙의 종말을 가져왔고, 개인을 상대하는 수많은 종파를 탄생하게 하였다. 수가 많았어도 신비교는 모두 다음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2001 CM 121:5.7 신비 종교들은 국가적 믿음의 종말을 초래했고, 그 결과로 수많은 개인 종파를 탄생시켰다. 신비교가 많이 있었지만, 모두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
2007 URKA 121:5.7 신비 종교들은 민족적 믿음들의 종말을 가져왔고, 수많은 개인적 예배종파들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신비교는 수가 많았지만 모두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
2025 121:5.7 신비 종교들은 민족 신앙의 종말을 가져왔고, 개인을 상대하는 수많은 종파를 탄생하게 하였다. 수가 많았어도 신비교는 모두 다음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1955 121:5.8 1. Some mythical legend, a mystery—whence their name. As a rule this mystery pertained to the story of some god’s life and death and return to life, as illustrated by the teachings of Mithraism, which, for a time, were contemporary with, and a competitor of, Paul’s rising cult of Christianity.
2000 121:5.8 1. 어떤 신화(神話) 같은 전설, 즉 신비―여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미트라교의 가르침이 보여주다시피, 대체로, 이 신비는 어떤 신(神)의 일생ㆍ죽음ㆍ부활 이야기와 상관이 있었다. 이 미트라교는 한동안 바울이 세운, 팽창하는 기독교와 같은 시대에 존재했고, 함께 자리를 다투었다.
2001 CM 121:5.8 1. 약간의 신화적 전설, 일종의 신비--그것으로부터 그들의 이름이 유래됐다. 일반적으로 이런 신비교는, 미드라 신교{神敎}의 교훈으로 설명되듯이, 신{神}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됐는데, 그리스도교라는 바울의 신흥 종파와 한동안 공생{共生}하면서 서로 경쟁했다.
2007 URKA 121:5.8 1. 어떤 신화같은 전설, 일종의 신비─그것으로부터 그 이름이 유래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신비교는 미트라교의 가르침에 의하여 묘사되듯이 어떤 하느님의 일생과 죽음, 그리고 일생으로 되돌아오는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으며, 한동안 그리스도교의 바울의 떠오르는 예배종파와 동시대에서 함께, 경쟁자로 있었다.
2025 121:5.8 1. 어떤 신화(神話) 같은 전설, 즉 신비 ― 여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미트라교의 가르침이 보여주다시피, 대체로, 이 신비는 어떤 신(神)의 일생ㆍ죽음ㆍ부활 이야기와 상관이 있었다. 이 미트라교는 한동안 바울이 세운, 팽창하는 기독교와 같은 시대에 존재했고, 함께 자리를 다투었다.
1955 121:5.9 2. The mysteries were nonnational and interracial. They were personal and fraternal, giving rise to religious brotherhoods and numerous sectarian societies.
2000 121:5.9 2. 신비교들은 민족 종교가 아니고 종족을 초월하였다. 개인적이고 친교하는 종파였고, 그 결과로 종교적 친목 사회와 수많은 종파 사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2001 CM 121:5.9 2. 신비교는 민족이나 종족에 매이지 않았다. 개인적이고 우애 있는 종파였으며, 그 결과로 종교 협회들과 수많은 분파의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2007 URKA 121:5.9 2. 신비교들은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다. 그들은 개인적이고 우애적이었고, 종교적 형제신분과 수많은 교파적 사회를 나타나게 만들었다.
2025 121:5.9 2. 신비교들은 민족 종교가 아니고 종족을 초월하였다. 개인적이고 친교하는 종파였고, 그 결과로 종교적 친목 사회와 수많은 종파 사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1955 121:5.10 3. They were, in their services, characterized by elaborate ceremonies of initiation and impressive sacraments of worship. Their secret rites and rituals were sometimes gruesome and revolting.
2000 121:5.10 3. 이들의 예배는 정교한 입회 예식, 그리고 예배 드릴 때 인상적인 성찬식의 특징을 가졌다. 이들의 비밀 의식과 예식은 때때로 끔찍스럽고 메스꺼운 것이었다.
2001 CM 121:5.10 3. 예배에서 복잡한 입장 예식과 엄숙한 성례{聖禮}가 특징이었다. 그들의 은밀한 제례와 제례식은 때때로 무시무시하고 혐오스런 경우도 있었다.
2007 URKA 121:5.10 3. 그들의 예배봉사는 화려한 입장 의식과 감동적인 성찬이 특징 이었다. 은밀하게 행해지는 그들의 의식과 예식은 때로는 무시무시하고 혐오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2025 121:5.10 3. 이들의 예배는 정교한 입회 예식, 그리고 예배 드릴 때 인상적인 성찬식의 특징을 가졌다. 이들의 비밀 의식과 예식은 때때로 끔찍스럽고 메스꺼운 것이었다.
1955 121:5.11 4. But no matter what the nature of their ceremonies or the degree of their excesses, these mysteries invariably promised their devotees salvation, “deliverance from evil, survival after death, and enduring life in blissful realms beyond this world of sorrow and slavery.”
2000 121:5.11 4. 그러나 예식의 성질이나 지나친 정도와 상관 없이, 이 신비교들은 변함없이 신도들에게 구원, “악에서 벗어나고, 사후에 살아남고, 슬픔과 노예 제도가 있는 이 세상을 넘어서 행복한 나라에서 오래오래 살 것”을 약속했다.
2001 CM 121:5.11 4. 그러나 그 예식의 본질 또는 그것이 얼마나 지나칠 정도였는지에 상관없이, 이 신비교들은 신봉자에게, 구원, 즉 “악으로부터 구출됨, 죽음 이후의 생존, 그리고 슬픔과 속박이 가득한 이 세상을 초월하여, 복이 넘치는 세계에서 오래도록 살아감”을 똑같이 약속했다.
2007 URKA 121:5.11 4. 그러나 그들의 예식들의 본질이나 그것들의 지나친 정도가 어떠하였는지에 상관없이, 이러한 신비교들은 하나같이 그것들의 신봉자들에게 구원, “악으로부터의 해방, 죽음 이후의 생존, 그리고 슬픔과 속박이 가득한 이 세상을 초월한 가장 행복한 세계에서의 항구적 일생”을 약속했다.
1955 121:5.12 But do not make the mistake of confusing the teachings of Jesus with the mysteries. The popularity of the mysteries reveals man’s quest for survival, thus portraying a real hunger and thirst for personal religion and individual righteousness. Although the mysteries failed adequately to satisfy this longing, they did prepare the way for the subsequent appearance of Jesus, who truly brought to this world the bread of life and the water thereof.
2000 121:5.12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신비교를 혼동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이런 신비교들이 유행한 것은 사람이 사후에 살아남기를 추구했다는 것을 보이며, 따라서 개인을 상대하는 종교와 개인의 올바름을 진정하게 갈망하고 목마르게 찾았음을 보여준다. 신비교들은 이런 소망을 적절히 채워주지 못했지만, 후일에 예수가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길을 예비했고, 이 예수는 참으로 이 세상에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을 가져왔다.
2001 CM 121:5.12 그러나 예수의 교훈을 이런 신비교와 혼동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 신비교가 유행한 것은, 사람이 생존을 추구했음을 드러내는데, 개인 종교와 개개인의 의로움에 실질적으로 갈급해하고 목말라했음을 나타낸다. 비록 이런 동경을 적절하게 만족시켜주기에는 실패했더라도, 이 신비교들은, 진짜 생명의 빵과 물을 이 세상에 가져온 예수께서 출현하도록, 그 길을 예비했다.
2007 URKA 121:5.12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이러한 신비교의 가르침을 혼동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신비교의 대중적 인기는 생존에 대한 사람의 탐구가 있음을 계시하는 것이며, 그와 같이 개인적 종교와 개별적 정의에 대한 실제적 굶주림과 갈증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신비교가 이러한 소망을 적절하게 만족시키는 데에는 실패하였지만, 그들은 정말로 바로 뒤이어,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을 이 세상으로 가져왔던 예수의 출현을 위하여 그 길을 예비하였던 것이다.
2025 121:5.12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신비교를 혼동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이런 신비교들이 유행한 것은 사람이 사후에 살아남기를 추구했다는 것을 보이며, 따라서 개인을 상대하는 종교와 개인의 올바름을 진정하게 갈망하고 목마르게 찾았음을 보여준다. 신비교들은 이런 소망을 적절히 채워주지 못했지만, 후일에 예수가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길을 예비했고, 예수는 참으로 이 세상에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을 가져왔다.
1955 121:5.13 Paul, in an effort to utilize the widespread adherence to the better types of the mystery religions, made certain adaptations of the teachings of Jesus so as to render them more acceptable to a larger number of prospective converts. But even Paul’s compromise of Jesus’ teachings (Christianity) was superior to the best in the mysteries in that:
2000 121:5.13 사람들이 상급의 신비 종교에 널리 집착한 것을 이용하려고, 개종(改宗)할 가망이 있는 큰 집단의 사람들이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려고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얼마큼 고쳤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바울이 절충한 것조차 (기독교) 최선의 신비 종파들보다 다음 이유로 더 우수하다:
2001 CM 121:5.13 바울은, 더 나은 유형의 신비 종교에 사람들이 널리 집착하는 것을 활용하려고 애쓰면서, 개종이 기대되는 더 많은 사람이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예수의 교훈을 어느 정도 변경시켰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의 교훈을 (그리스도교로) 절충시킨 것조차, 신비교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보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우세했다:
2007 URKA 121:5.13 바울은 널리 퍼져 있는 보다 나은 유형의 신비 종교들을 활용하고자 애쓰면서, 개종이 기대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예수의 가르침들 중 일부분을 개작(改作)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들(그리스도교)이 바울에 의해 변형되었을지라도, 신비교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보다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훨씬 우월하였다:
2025 121:5.13 사람들이 상급의 신비 종교에 널리 집착한 것을 이용하려고, 개종(改宗)할 가망이 있는 큰 집단의 사람들이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려고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얼마큼 고쳤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바울이 절충한 것조차 (기독교) 최선의 신비 종파들보다 다음 이유로 더 우수하다:
1955 121:5.14 1. Paul taught a moral redemption, an ethical salvation. Christianity pointed to a new life and proclaimed a new ideal. Paul forsook magic rites and ceremonial enchantments.
2000 121:5.14 1. 바울은 도덕의 회복, 즉 윤리적 구원을 가르쳤다. 기독교는 새로운 삶을 향하게 하고 새로운 이상을 선포했다. 바울은 요술 의식(儀式)과 예식의 마술적 요소를 버렸다.
2001 CM 121:5.14 1. 바울은 도덕적인 구속{救贖}, 윤리적인 구원을 가르쳤다.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삶을 지시하고 새 이상{理想}을 선포했다. 바울은 마술적인 제례와 예식적인 요술을 거부했다.
2007 URKA 121:5.14 1. 바울은 도덕적인 대속(代贖)과 윤리적인 구원을 가르쳤다.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생명을 지적하고 새로운 이상을 선포하였다. 바울은 마법적인 의식과 제의적인 매력들을 거부하였다.
2025 121:5.14 1. 바울은 도덕의 회복, 즉 윤리적 구원을 가르쳤다. 기독교는 새로운 삶을 향하게 하고 새로운 이상을 선포했다. 바울은 요술 의식(儀式)과 예식의 마술적 요소를 버렸다.
1955 121:5.15 2. Christianity presented a religion which grappled with final solutions of the human problem, for it not only offered salvation from sorrow and even from death, but it also promised deliverance from sin followed by the endowment of a righteous character of eternal survival qualities.
2000 121:5.15 2. 기독교는 인간의 문제에서 궁극의 답을 얻으려고 애쓰는 종교를 제시했는데, 이는 이 종교가 슬픔, 그리고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구원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죄에서 구원받는 것도 약속했고, 이에는 영원히 살아남는 올바른 인품의 부여가 뒤따랐다.
2001 CM 121:5.15 2.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을 붙잡은 종교를 출현시켰는데, 이는 슬픔, 심지어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구원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벗어난 후에 영원히 생존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의로운 성품의 부여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2007 URKA 121:5.15 2. 그리스도교는 슬픔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존 본질성의 정의로운 성격 자질에 의하여 이어지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하는, 인간 문제의 최종적인 해답을 움켜쥔 하나의 종교를 출현시켰다.
2025 121:5.15 2. 기독교는 인간의 문제에서 궁극의 답을 얻으려고 애쓰는 종교를 제시했는데, 이는 이 종교가 슬픔, 그리고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구원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죄에서 구원받는 것도 약속했고, 이에는 영원히 살아남는 올바른 인품의 부여가 뒤따랐다.
1955 121:5.16 3. The mysteries were built upon myths. Christianity, as Paul preached it, was founded upon a historic fact: the bestowal of Michael, the Son of God, upon mankind.
2000 121:5.16 3. 신비교는 신화(神話)에 기초를 두고 세워졌다. 바울이 전파한 바와 같이, 기독교는 인류에게 미가엘, 즉 하나님의 아들이 수여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를 두었다.
2001 CM 121:5.16 3. 신비교들은 신화{神話}에 기초했다. 그리스도교는 바울이 전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인 미가엘이 인류에게 증여됐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했다.
2007 URKA 121:5.16 3. 신비교들은 신화에 기반을 두었다. 그리스도교는 바울이 가르쳤듯이, 하느님의 아들인 미가엘이 인류에게 증여되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기반을 두었다.
2025 121:5.16 3. 신비교는 신화(神話)에 기초를 두고 세워졌다. 바울이 전파한 바와 같이, 기독교는 인류에게 미가엘, 즉 하나님의 아들이 수여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를 두었다.
1955 121:5.17 Morality among the gentiles was not necessarily related to either philosophy or religion. Outside of Palestine it not always occurred to people that a priest of religion was supposed to lead a moral life. Jewish religion and subsequently the teachings of Jesus and later the evolving Christianity of Paul were the first European religions to lay one hand upon morals and the other upon ethics, insisting that religionists pay some attention to both.
2000 121:5.17 이방인 사이에서 도덕은 반드시 철학이나 종교와 관련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바깥에서는, 종교의 사제(司祭)가 도덕적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에 반드시 떠오르지는 않았다. 유대인의 종교, 다음에 예수의 가르침, 그리고 그 뒤에 발전하는 바울 판의 기독교는 한 손에 도덕을 다른 손에는 윤리를 쥐고서, 신자들이 이 두 가지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최초로 주장한 유럽의 종교였다.
2001 CM 121:5.17 이방인 사이에서, 도덕성은 종교나 철학과 반드시 관련돼있지는 않았다. 팔레스틴 이외 지역의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가 도덕적 삶 역시 인도해야하는 것으로 항상 간주하지는 않았다. 유대의 종교와, 뒤를 이은 예수의 교훈, 그리고 바울이 나중에 발전시킨 그리스도교는, 한 손은 도덕 위에, 다른 한 손은 윤리 위에 놓고, 신자들이 이 두 가지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최초로 주장한 유럽 종교가 됐다.
2007 URKA 121:5.17 이방인들 사이에서 도덕성은 종교나 철학과 반드시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역에서는, 종교의 사제가 도덕적 일생도 역시 인도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일은 사람들에게 항상 발생하지는 않았다. 유대의 종교와, 그 뒤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 그리고 바울에 의해 나중에 발전된 그리스도교는, 한 손은 도덕 위에 다른 한 손은 윤리 위에 놓고 종교인들로 하여금 이 두 가지 일에 모두 어떤 관심을 가질 것을 주장하는, 첫 번째로 전 유럽에 퍼진 종교가 되었다.
2025 121:5.17 이방인 사이에서 도덕은 반드시 철학이나 종교와 관련되지는 않았다. 팔레스타인 바깥에서는, 종교의 사제(司祭)가 도덕적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에 반드시 떠오르지는 않았다. 유대인의 종교, 다음에 예수의 가르침, 그리고 그 뒤에 발전하는 바울 판의 기독교는 한 손에 도덕, 다른 손에는 윤리를 쥐고서, 신자들이 이 두 가지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최초로 주장한 유럽의 종교였다.
1955 121:5.18 Into such a generation of men, dominated by such incomplete systems of philosophy and perplexed by such complex cults of religion, Jesus was born in Palestine. And to this same generation he subsequently gave his gospel of personal religion—sonship with God.
2000 121:5.18 그토록 어설픈 철학 체계에 영향을 받고, 그렇게 복잡한 종교의 종파들 때문에 갈피를 못 잡는 그런 세대의 사람들 가운데, 예수는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그는 개인적 종교―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르치는―복음을 바로 이 세대에게 주었다.
2001 CM 121:5.18 예수는, 이런 미완성 철학체계와 복잡한 종파들의 종교에 지배당함으로써 혼란스러워하던 세대에 팔레스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개인 종교--곧 하나님의 아들신분--에 대한 자기 복음을 바로 이 세대에게 제시했다.
2007 URKA 121:5.18 사람들이 이러한 미완성 철학체계와 복잡한 예배종파들에 의해 지배를 받아 혼란 속에 있던 그러한 인류 세대 속에, 예수가 팔레스타인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바로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 개인적 종교─하느님과의 아들관계─에 대한 자신의 복음을 제공하였다.
2025 121:5.18 그토록 어설픈 철학 체계에 영향을 받고, 그렇게 복잡한 종교의 종파들 때문에 갈피를 못 잡는 그런 세대의 사람들 가운데, 예수는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그는 개인적 종교 ―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 가르치는 복음을 바로 이 세대에게 주었다.
6. THE HEBREW RELIGION
6. 히브리 종교
6. 히브리 종교
6. 히브리 종교
6. 히브리 종교
1955 121:6.1 By the close of the first century before Christ the religious thought of Jerusalem had been tremendously influenced and somewhat modified by Greek cultural teachings and even by Greek philosophy. In the long contest between the views of the Eastern and Western schools of Hebrew thought, Jerusalem and the rest of the Occident and the Levant in general adopted the Western Jewish or modified Hellenistic viewpoint.
2000 121:6.1 그리스도 이전 1세기가 막을 내릴 때가 되자, 예루살렘의 종교 사상은 그리스 문화의 가르침에, 그리고 그리스 철학에도, 엄청나게 영향을 받고 얼마큼 수정되었다. 히브리 사상의 동부와 서부 학파의 관점 사이에 오랜 싸움이 있다가, 예루살렘, 그리고 나머지 서양(西洋)과 레반트는 대체로 서부 유대인의 관점, 즉 수정된 헬라파 관점을 채택하였다.
2001 CM 121:6.1 기원전 1세기가 끝날 때까지, 예루살렘의 종교적 사고는 그리스 문화의 교훈에, 그리고 심지어 그리스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아왔고, 어느 정도 변경돼있었다. 히브리 사상에 대한 동방 학파들과 서방 학파들의 견해 사이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이뤄지던 중에, 예루살렘과 그 외의 서양 지역 그리고 레반트는, 일반적으로 서방의 유대 관점 또는 변경된 헬라 관점을 택했다.
2007 URKA 121:6.1 기원전 1세기가 끝날 때까지, 예루살렘의 종교적 사상은 그리스의 문화적 가르침들에 의해서, 심지어는 그리스 철학에 의해서 매우 많은 영향을 받아서 어느 정도 변형되어 있었다. 히브리 사상에 대한 동방 학파와 서방학파의 견해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대립이 이루어지던 중에, 예루살렘과 그 외의 서양과 레반트 지역은 일반적으로 서방식 유대인 즉 변형된 그리스 관점을 채택하였다.
2025 121:6.1 그리스도 이전 1세기가 막을 내릴 때가 되자, 예루살렘의 종교 사상은 그리스 문화의 가르침에, 그리고 그리스 철학에도, 엄청나게 영향을 받고 얼마큼 수정되었다. 히브리 사상의 동부와 서부 학파 관점 사이에 오랜 싸움이 있다가, 예루살렘, 나머지 서양(西洋)과 레반트는 대체로 서부 유대인의 관점, 즉 수정된 헬라파 관점을 채택하였다.
1955 121:6.2 In the days of Jesus three languages prevailed in Palestine: The common people spoke some dialect of Aramaic; the priests and rabbis spoke Hebrew; the educated classes and the better strata of Jews in general spoke Greek. The early translation of the Hebrew scriptures into Greek at Alexandria was responsible in no small measure for the subsequent predominance of the Greek wing of Jewish culture and theology. And the writings of the Christian teachers were soon to appear in the same language. The renaissance of Judaism dates from the Greek translation of the Hebrew scriptures. This was a vital influence which later determined the drift of Paul’s Christian cult toward the West instead of toward the East.
2000 121:6.2 예수의 시절에는 세 가지 말이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되었다. 서민들은 아람어의 어떤 방언을 말했고, 사제(司祭)와 랍비들은 히브리어를 썼으며, 교육받은 계급과 상류 계층의 유대인은 대체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유대 문화와 신학 중에서 그리스파가 나중에 우세하게 된 데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일찍 번역한 것이 적지 않은 원인이었다. 기독교 선생들의 기록이 바로 그 언어로 곧 나타나게 되었다. 유대주의의 부흥은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옮긴 데서 비롯된다. 이 영향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바울의 기독교 종파가 동양이 아니라 서양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2001 CM 121:6.2 예수 시대에 팔레스틴에서는 세 언어가 통용됐는데:보통사람은 아람어 방언을;제사장과 랍비는 히브리어를;교육받은 계층과 상류 계층 유대인은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초기 히브리 성서는, 그리스파의 유대 문화 및 신학이 나중에 주류{主流}를 이루게 되는 데 상당한 원인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교사들의 기록이, 같은 언어로 곧 출현하게 됐다. 유대교의 부흥은 히브리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된 데서 시작됐다. 이것은 나중에 바울의 그리스도교 종파가 동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서방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결정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2007 URKA 121:6.2 예수 시대에 팔레스타인에서는 세 가지 언어가 통용되었는데: 보통사람들은 사투리가 약간 섞인 아람어를; 사제들과 랍비들은 히브리어를; 그리고 교육받은 계층과 상류층 유대인들은 대개 그리스어를 사용하였다. 초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히브리 경전은, 나중에 유대 문화와 신학에서 그리스파가 우세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같은 언어로 기록된 그리스도교 교사들의 작품들이 곧 출현하게 되었다. 유대주의의 부흥은 히브리 경전이 그리스어로 번역되는 때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나중에 바울의 그리스도교 예배종파가 동방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서방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결정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2025 121:6.2 예수의 시절에는 세 가지 언어가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되었다. 서민들은 아람어의 어떤 방언을 말했고, 사제(司祭)와 랍비들은 히브리어를 썼으며, 교육받은 계급과 상류 계층의 유대인은 대체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유대 문화와 신학 중에서 그리스파가 나중에 우세하게 된 데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일찍 번역한 것이 적지 않은 원인이었다. 기독교 선생들의 기록이 바로 그 언어로 곧 나타나게 되었다. 유대주의의 부흥은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옮긴 데서 비롯된다. 이 영향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바울의 기독교 종파가 동양이 아니라 서양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1955 121:6.3 Though the Hellenized Jewish beliefs were very little influenced by the teachings of the Epicureans, they were very materially affected by the philosophy of Plato and the self-abnegation doctrines of the Stoics. The great inroad of Stoicism is exemplified by the Fourth Book of the Maccabees; the penetration of both Platonic philosophy and Stoic doctrines is exhibited in the Wisdom of Solomon. The Hellenized Jews brought to the Hebrew scriptures such an allegorical interpretation that they found no difficulty in conforming Hebrew theology with their revered Aristotelian philosophy. But this all led to disastrous confusion until these problems were taken in hand by Philo of Alexandria, who proceeded to harmonize and systemize Greek philosophy and Hebrew theology into a compact and fairly consistent system of religious belief and practice. And it was this later teaching of combined Greek philosophy and Hebrew theology that prevailed in Palestine when Jesus lived and taught, and which Paul utilized as the foundation on which to build his more advanced and enlightening cult of Christianity.
2000 121:6.3 헬라화된 유대인의 신앙은 쾌락주의자의 가르침에 아주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이들은 플라톤의 철학, 그리고 극기(克己)를 가르치는 금욕주의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마카비 4서는 금욕주의 세력이 크게 신장된 것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철학과 금욕주의 신조, 이 두 세력의 침투는 솔로몬의 지혜서에 나타난다. 헬라화된 유대인들은 히브리 성서를 그렇게 우화(寓話)로 풀이했기 때문에, 히브리 신학을 그들이 숭상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순응시키는 것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두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손으로 처리되기까지 비참한 혼란을 낳았는데, 필로는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간결하고 상당히 일관성 있는 하나의 종교 관념 및 관습 체계로 조화시키고 체계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바로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통합한 이 후일의 가르침이 예수가 살고 가르치던 때에 팔레스타인에 유행하였는데, 이를 바울은 더욱 진보되고 계몽적인 기독교 종파를 세우는 데 기초로 이용하였다.
2001 CM 121:6.3 헬라화된 유대인의 믿음은, 에피쿠로스학파 교훈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음에도, 플라톤 철학과, 금욕주의자의 자기-희생 교리에 매우 실질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금욕주의에 크게 잠식당했다는 사실은, 마카비서 제4권에 잘 나타나 있으며;플라톤 철학뿐 아니라 금욕주의 교리 역시 침투해있었음이, 솔로몬의 지혜서에 잘 나타나 있다. 헬라화된 유대인은, 자기들이 존경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히브리 신학에 접목시키는 일에 별로 어려움이 없음을 발견하고, 그런 우화적 해석을 히브리 성서에 적용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가 이 문제를 맡아서,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간단하고 비교적 모순 없는 종교 신념과 실천으로 조화시키고 체계화시키기 전에는, 극도의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예수께서 살아서 가르치던 시기에 팔레스틴에 성행하던 것은,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이 합쳐진 이 후기 가르침이었으며, 바울은 이것을, 좀 더 진보되고 계몽시키는 그리스도교라는 종파를 세우는 기초로 활용했다.
2007 URKA 121:6.3 그리스화된 유대인의 믿음은 쾌락주의학파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철학과, 금욕주의자들의 자아-포기 교리로부터 현저하게 영향을 받았다. 금욕주의에 의해 크게 잠식당하였다는 사실은 마카비서의 제4권에 잘 나타나 있으며: 플라톤의 철학뿐만 아니라 금욕주의의 교리 역시 침투해 있었다는 사실은 솔로몬의 지혜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스화된 유대인들은 히브리 경전에 대해 이러한 우화적인 해석을 함으로써, 자기들이 존경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히브리 신학에 접목시키는 일에 별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가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의 신학을 간단하고 비교적 모순이 없는 종교적 신앙과 실천의 체계로 조화시키고 체계화하여 이 문제들이 처리되기 전까지는 극도의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예수가 살아 있으면서 가르치던 시기에, 팔레스타인에는 이러한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이 합쳐진 후대의 가르침이 성행하고 있었으며, 바울은 이를 좀 더 진보적이고 깨우치는 그리스도교 예배종파를 세우기 위한 기초로 활용하였다.
2025 121:6.3 헬라화된 유대인의 신앙은 쾌락주의자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이들은 플라톤의 철학, 그리고 극기(克己)를 가르치는 금욕주의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마카비 4서는 금욕주의 세력이 크게 신장된 것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철학과 금욕주의 신조, 이 두 세력의 침투는 솔로몬의 지혜서에 나타난다. 헬라화된 유대인들은 히브리 성서를 그렇게 우화(寓話)로 풀이했기 때문에, 히브리 신학을 그들이 숭상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순응시키는 것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두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손에 처리되기까지 비참한 혼란을 낳았는데, 필로는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간결하고 상당히 일관성 있는 하나의 종교 관념 및 관습 체계로 조화시키고 체계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바로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통합한 이 후일의 가르침이 예수가 살고 가르치던 때에 팔레스타인에서 유행하였는데, 이를 바울은 더욱 진보되고 계몽적인 기독교 종파를 세우는 데 기초로 이용하였다.
1955 121:6.4 Philo was a great teacher; not since Moses had there lived a man who exerted such a profound influence on the ethical and religious thought of the Occidental world. In the matter of the combination of the better elements in contemporaneous systems of ethical and religious teachings, there have been seven outstanding human teachers: Sethard, Moses, Zoroaster, Lao-tse, Buddha, Philo, and Paul.
2000 121:6.4 필로는 위대한 선생이었다. 모세 이후로 서양 세계의 윤리 및 종교 사상에 그렇게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었다. 당대의 윤리와 종교적 가르침의 체계 속에 있는 좋은 요소들을 통합하는 문제에 뛰어난 인간 선생이 일곱 사람 있었으니, 곧 세타드ㆍ모세ㆍ조로아스터ㆍ노자ㆍ부다ㆍ필로ㆍ바울이다.
2001 CM 121:6.4 필로는 위대한 선생이었으며;서양 세계의 윤리적 및 종교적 사고에 그토록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 모세 이후로는 없었다. 윤리와 종교 교훈이라는 동시 발생적 체계 속에, 더욱 훌륭한 요소를 결합하는 일에서, 일곱 명의 탁월한 인간 선생이 있었는데;쎄타드, 모세, 조로아스터, 노자, 부다, 필로, 및 바울이다.
2007 URKA 121:6.4 필로는 위대한 선생이었다; 모세 이후 서양 세계의 윤리적 그리고 종교적 사상에 그토록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었다. 윤리적인 가르침과 종교적인 가르침이라는 동시 발생적 체계들 속에서, 보다 훌륭한 요소들을 결합한 일곱 명의 탁월한 인간 선생들을 꼽자면, 쎄타드, 모세, 조로아스터, 노자, 부처, 필로, 그리고 바울이 해당된다.
2025 121:6.4 필로는 위대한 선생이었다. 모세 이후로 서양 세계의 윤리 및 종교 사상에 그렇게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었다. 당대의 윤리와 종교적 가르침의 체계 속에 있는 좋은 요소들을 통합하는 문제에 뛰어난 인간 선생이 일곱 사람 있었으니, 곧 세타드ㆍ모세ㆍ조로아스터ㆍ노자ㆍ부다ㆍ필로ㆍ바울이다.
1955 121:6.5 Many, but not all, of Philo’s inconsistencies resulting from an effort to combine Greek mystical philosophy and Roman Stoic doctrines with the legalistic theology of the Hebrews, Paul recognized and wisely eliminated from his pre-Christian basic theology. Philo led the way for Paul more fully to restore the concept of the Paradise Trinity, which had long been dormant in Jewish theology. In only one matter did Paul fail to keep pace with Philo or to transcend the teachings of this wealthy and educated Jew of Alexandria, and that was the doctrine of the atonement; Philo taught deliverance from the doctrine of forgiveness only by the shedding of blood. He also possibly glimpsed the reality and presence of the Thought Adjusters more clearly than did Paul. But Paul’s theory of original sin, the doctrines of hereditary guilt and innate evil and redemption therefrom, was partially Mithraic in origin, having little in common with Hebrew theology, Philo’s philosophy, or Jesus’ teachings. Some phases of Paul’s teachings regarding original sin and the atonement were original with himself.
2000 121:6.5 그리스의 신비주의 철학과 로마의 금욕주의 교리를 히브리인의 율법 신학과 통합하려는 노력에서 생기는 필로의 부조리를 바울은 전부는 아니라도 많이 인식했으며, 현명하게도 그가 지녔던 기독교 이전의 기본 신학에서 이 부조리를 없애버렸다. 필로는 바울이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개념을 더 충실하게 회복하도록 길을 인도했는데, 그 개념은 유대 신학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다. 바울의 오직 한 가지 문제점은 필로와 발걸음을 맞추거나, 부유하고 교육받은 이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의 가르침을 뛰어넘지 못하였으니, 곧 속죄 교리였다. 필로는 오로지 피를 흘려야 용서받는다는 교리를 벗어나라고 가르쳤다. 그는 또한 아마 바울보다 더 맑게 생각 조절자의 실체와 계심을 얼핏 본 듯하다. 그러나 바울의 원죄(原罪) 이론, 곧 물려받은 죄, 타고난 악, 그리고 그로부터 회복한다는 교리는 그 기원의 일부가 미트라교에 있고, 이는 히브리 신학이나 필로의 철학이나 또는 예수의 가르침과 거의 공통점이 없다. 원죄와 속죄(贖罪)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의 어떤 단계는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다.
2001 CM 121:6.5 필로의 모순점 가운데,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은, 그리스의 신비 철학과 로마의 금욕주의 교리를 율법적인 히브리 신학과 결합시키려는 노력에서 발생됐는데, 이것을 인식한 바울은, 그리스도교-이전에 자신이 지녔던 기본 신학에서 이를 현명하게 제거했다. 필로는, 유대 신학 안에서 오랫동안 동면해오던 낙원 삼위일체 개념을 충분히 회복시켜줄 수 있는 길로 바울을 인도했다. 바울이 필로와 보조를 맞추지 못했거나, 또는 이 부유하고 교육받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의 교훈을 넘어서지 못한 것 한 가지는, 바로 속죄에 관한 교리였는데;필로는 오직 피 흘림으로써만 용서 받는다는 교리로부터 벗어나라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사고 섭리사의 실체와 현존에 대해, 바울이 알고 있던 것보다는 좀 더 알아차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의 원죄 이론, 즉 유전적 죄와 타고난 악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구출되는 것에 관한 교리는, 부분적으로 미드라 숭배에서 기원됐고, 히브리 신학이나 필로의 철학 또는 예수의 교훈과는 거의 상관없었다. 원죄와 속죄에 대한 바울의 교훈 중에서 어떤 국면들은 자신이 창작한 것이었다.
2007 URKA 121:6.5 필로의 모순점들 중에서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들은, 그리스의 신비철학과 로마의 금욕주의 교리를 형식에 매인 히브리 신학에 병합하려는 노력으로 인하여 발생되었는데, 이 점을 인식한 바울은 그리스도교가 형성되기 이전의 그의 기초 신학에서 이러한 문제를 현명하게 제거하였다. 필로는 유대 신학 안에 오랫동안 잠재해 오고 있던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개념을 완벽하게 회복시켜줄 수 있는 길로 바울을 인도하였다. 바울이 알렉산드리아의 이 부유하고 교육받은 유대인 필로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였거나 또는 그의 가르침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속죄에 관한 교리였는데; 필로는 오직 피를 흘림으로써만 용서를 받는다는 교리로부터 해방을 가르쳤던 것이다. 또한 그는 생각 조절자의 실체와 현존에 대해 바울이 알고 있던 것보다는 조금 더 분명하게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의 원죄(原罪) 이론, 유전적인 죄와 타고난 악 그리고 그것들로부터의 속죄에 관한 교리는, 부분적으로 미트라 숭배에서 기원된 것이었으며, 히브리 신학이나 필로의 철학 또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원죄와 속죄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들 중에서 어떤 형태들은 바울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2025 121:6.5 그리스의 신비주의 철학과 로마의 금욕주의 교리를 히브리인의 율법 신학과 통합하려는 노력에서 생기는 필로의 부조리를 바울은 전부는 아니라도 많이 인식했으며, 현명하게도 그가 지녔던 기독교 이전의 기본 신학에서 이 부조리를 없애 버렸다. 필로는 바울이 파라다이스 삼위일체 개념을 더 충실하게 회복하도록 길을 인도했는데, 그 개념은 유대 신학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다. 바울의 오직 한 가지 문제점은 필로와 발걸음을 맞추거나, 부유하고 교육 받은 이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의 가르침을 뛰어넘지 못한 것, 곧 속죄 교리였다. 필로는 오로지 피를 흘려야 용서 받는다는 교리를 벗어나라고 가르쳤다. 그는 또한 아마 바울보다 더 맑게 생각 조절자의 실체와 계심을 얼핏 본 듯하다. 그러나 바울의 원죄(原罪) 이론, 곧 물려 받은 죄, 타고난 악, 그리고 그로부터 회복한다는 교리는 그 기원의 일부가 미트라교에 있고, 이는 히브리 신학이나 필로의 철학이나 또는 예수의 가르침과 거의 공통점이 없다. 원죄와 속죄(贖罪)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의 어떤 단계는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다.
1955 121:6.6 The Gospel of John, the last of the narratives of Jesus’ earth life, was addressed to the Western peoples and presents its story much in the light of the viewpoint of the later Alexandrian Christians, who were also disciples of the teachings of Philo.
2000 121:6.6 예수가 땅에서 산 생애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인 요한 복음은 서양 민족들을 향하여 말한 것이었고, 후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기독교 신자들의 관점에 많이 비추어서 그 이야기를 엮었는데, 이들은 또한 필로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2001 CM 121:6.6 예수의 이 세상 생애를 기록한 것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기록된 요한복음은, 서방 민족들을 위하여 기록된 것으로서, 그 내용은, 필로의 교훈도 동시에 따르고 있던, 후대의 알렉산드리아 그리스도교 관점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2007 URKA 121:6.6 이 세상에서의 예수의 일생을 기록한 것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기록된 요한복음은, 서방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것으로서, 그 내용은 필로의 가르침들도 동시에 따르고 있던 후대의 알렉산드리아 그리스도교인 들의 관점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2025 121:6.6 예수가 땅에서 산 생애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인 요한 복음은 서양 민족들을 향하여 말한 것이었고, 후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기독교 신자들의 관점에 많이 비추어서 그 이야기를 엮었는데, 이들은 또한 필로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1955 121:6.7 At about the time of Christ a strange reversion of feeling toward the Jews occurred in Alexandria, and from this former Jewish stronghold there went forth a virulent wave of persecution, extending even to Rome, from which many thousands were banished. But such a campaign of misrepresentation was short-lived; very soon the imperial government fully restored the curtailed liberties of the Jews throughout the empire.
2000 121:6.7 그리스도가 살던 무렵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에 대하여 이상하게 감정이 악화되었다. 이 옛 유대인 본거지로부터 지독한 박해의 물결이 퍼져 나갔고, 이것은 로마에까지도 퍼져서 거기서 수천 명이 추방되었다. 그러나 사실을 왜곡하는 그러한 투쟁은 길게 가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서 제국 정부는 제국 전역에 걸쳐 유대인의 축소된 자유를 완전히 회복시켰다.
2001 CM 121:6.7 그리스도 시대가 임할 즈음에, 유대인에 대한 이상하게 뒤집힌 정서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생됐고, 전에 유대인의 근거지였던 이곳으로부터, 지독한 유대인 박해 물결이 시작되어 심지어 로마까지 확장됐으며, 거기서 유대인 수천 명이 추방됐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운동은 오래가지 않았으며;황제가 다스리는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제국 전역에서 빼앗았던 자유를 유대인에게 온전히 되돌려줬다.
2007 URKA 121:6.7 그리스도의 시대 무렵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이상한 나쁜 감정이 다시 발생해서, 전에 유대인들의 근거지였던 이곳으로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지독한 박해의 물결이 시작되어 로마에까지 퍼지게 되었으며, 그곳으로부터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추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운동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황제가 통치하는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국 전역의 유대인들에게 빼앗은 해방을 충분히 회복시켜 주었다.
2025 121:6.7 그리스도가 살던 무렵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에 대하여 이상하게 감정이 악화되었다. 이 옛 유대인 본거지에서 지독한 박해의 물결이 퍼져 나갔고, 이것은 로마에까지 퍼져서 거기서 수천 명이 추방되었다. 그러나 사실을 왜곡하는 그러한 투쟁은 길게 가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서 제국 정부는 제국 전역에 걸쳐 유대인의 축소된 자유를 완전히 회복시켰다.
1955 121:6.8 Throughout the whole wide world, no matter where the Jews found themselves dispersed by commerce or oppression, all with one accord kept their hearts centered on the holy temple at Jerusalem. Jewish theology did survive as it was interpreted and practiced at Jerusalem, notwithstanding that it was several times saved from oblivion by the timely intervention of certain Babylonian teachers.
2000 121:6.8 넓은 온 세계에 두루, 상업이나 박해로 인하여 유대인이 어디에 흩어져 있든지 상관 없이, 모두가 하나 같이 예루살렘의 거룩한 성전에 마음을 두었다. 유대인의 신학은 어떤 바빌로니아 선생들이 때에 알맞게 개입한 덕택으로 잊혀지지 않고 몇 번이나 구조되었다. 이런 일이 있었어도, 유대인의 신학은 예루살렘에서 해석하고 실천한 대로 살아남았다.
2001 CM 121:6.8 광범한 전 세계 도처에서, 상업 또는 박해로 인해 스스로 흩어졌던 유대인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마음을 예루살렘에 있는 거룩한 성전에 일제히 집중했다. 유대 신학은, 특정한 바빌로니아 선생들이 적절한 시기에 개입함으로써, 잊어버리지 않도록 여러 번 구출됐음에도, 예루살렘에서 해석하고 실천해왔던 그대로 유지됐다.
2007 URKA 121:6.8 무역이나 혹은 박해로 인해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같이 예루살렘에 있는 거룩한 성전을 가슴 중심부에 간직하고 있음으로써 하나가 되었다. 유대인들의 신학은, 바빌로니아 선생들이 때때로 개입함으로 인하여 잊힐 뻔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해석되어지고 실천되어 왔던 그대로 유지되었다.
2025 121:6.8 넓은 온 세계에 두루, 상업이나 박해로 인하여 유대인이 어디에 흩어져 있든지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 같이 예루살렘의 거룩한 성전에 마음을 두었다. 유대인의 신학은 어떤 바빌로니아 선생들이 때에 알맞게 개입한 덕택으로 잊히지 않고 몇 번이나 구조되었다. 이런 일이 있었어도, 유대인의 신학은 예루살렘에서 해석하고 실천한 대로 살아남았다.
1955 121:6.9 As many as two and one-half million of these dispersed Jews used to come to Jerusalem for the celebration of their national religious festivals. And no matter what the theologic or philosophic differences of the Eastern (Babylonian) and the Western (Hellenic) Jews, they were all agreed on Jerusalem as the center of their worship and in ever looking forward to the coming of the Messiah.
2000 121:6.9 250만에 이르는 이 흩어진 유대인들은 민족의 종교적 축제를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오곤 했다. 동부(바빌로니아파)와 서부(헬라파) 유대인의 신학이나 철학에 무슨 의견 차이가 있든 상관 없이,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이 그들의 예배의 중심이라는 것, 그리고 메시아가 올 것을 늘 기대하는 의견이 같았다.
2001 CM 121:6.9 흩어져서 살던 250만이나 되는 이 유대인은, 민족적 종교 축제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곤 했다. 동방(곧 바빌로니아)의 유대인과 서방(곧 헬라)의 유대인이, 신학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서로 차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을 경배 중심지로 여겼고, 곧 오실 메시야를 여전히 대망했다.
2007 URKA 121:6.9 흩어져 살고 있던 이백 오십 만 명이나 되는 많은 유대인들은 민족적인 종교 축제들을 축하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동방(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과 서방(그리스)의 유대인들이 신학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예루살렘이 그들의 경배의 중심이라는 것, 그리고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을 늘 기대하는 데에 의견이 같았다.
2025 121:6.9 250만에 이르는 이 흩어진 유대인들은 민족의 종교적 축제를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오곤 했다. 동부(바빌로니아파)와 서부(헬라파) 유대인의 신학이나 철학에 무슨 의견 차이가 있든 상관없이,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이 그들의 예배의 중심이라는 것, 그리고 메시아가 올 것을 늘 기대하는 의견이 같았다.
7. JEWS AND GENTILES
7. 유대인과 이방인
7. 유대인과 이방인
7. 유대인과 이방인
7. 유대인과 이방인
1955 121:7.1 By the times of Jesus the Jews had arrived at a settled concept of their origin, history, and destiny. They had built up a rigid wall of separation between themselves and the gentile world; they looked upon all gentile ways with utter contempt. They worshiped the letter of the law and indulged a form of self-righteousness based upon the false pride of descent. They had formed preconceived notions regarding the promised Messiah, and most of these expectations envisaged a Messiah who would come as a part of their national and racial history. To the Hebrews of those days Jewish theology was irrevocably settled, forever fixed.
2000 121:7.1 예수가 살던 시절이 되자, 유대인은 그들의 기원ㆍ역사ㆍ운명에 대하여 고정된 개념에 도달하였다. 자신과 이방인 세계를 갈라놓는 굳은 벽을 쌓았고, 이방인의 모든 생활 방식을 속속들이 경멸하는 눈으로 보았다. 율법을 글자 그대로 숭상했고 일종의 독선(獨善)에 빠졌으며, 이것은 거짓된 겸손을 떠는 자만에서 생겨났다. 그들은 메시아가 온다는 약속에 관하여 선입관이 있었고, 대부분은 그들의 국가와 민족 역사의 일부로서 메시아가 온다고 생각하였다. 그 시절의 히브리인에게 유대 신학은 고칠 수 없이 확고하고 영원히 고정된 것이었다.
2001 CM 121:7.1 예수가 살던 무렵에, 유대인은 그들의 근원과 역사와 운명에 대한 확정된 개념에 도달했다. 그들은 자신과 이방세계 사이를 분리하는 견고한 벽을 쌓았으며;이방인의 방식은 무엇이든지 심하게 혐오했다. 율법의 글자 자체를 숭배했고, 혈통에 대한 그릇된 자존심에 근거해서 스스로-의롭게 여기는 틀에 빠졌다. 약속된 메시야에 대해 이미 여러 선입견을 만들었으며;이런 대부분의 기대는, 그들의 나라 및 종족 역사의 한 부분으로 오게 될 메시야를 상상하게 했다. 당시 히브리인에게 유대 신학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확정되고 영원히 고착된 상태였다.
2007 URKA 121:7.1 예수가 왔을 무렵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운명에 대해 확고한 개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이방세계 사이에 견고한 벽을 쌓아 놓고 있었다; 이방인들의 방식은 무엇이던지 심하게 경멸하였다. 그들은 글자 그대로 율법을 경배하였으며 자신들의 혈통에 대한 그릇된 자부심에 근거하여 자아-정의로운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약속된 메시아에 대하여 이미 여러 선입견들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러한 기대들 대부분은 그들의 나라와 민족 역사의 한 부분으로 오는 메시아를 상상하였다. 당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유대 신학은 돌이킬 수 없도록 정착되어지고 언제까지나 고정된 상태였다.
2025 121:7.1 예수가 살던 시절이 되자, 유대인은 그들의 기원ㆍ역사ㆍ운명에 대하여 고정된 개념에 도달하였다. 자신과 이방인 세계를 갈라놓는 굳은 벽을 쌓았고, 이방인의 모든 생활 방식을 속속들이 경멸하는 눈으로 보았다. 율법을 글자 그대로 숭상했고 일종의 독선(獨善)에 빠졌으며, 이것은 거짓된 겸손을 떠는 자만에서 생겨났다. 그들은 메시아가 온다는 약속에 관하여 선입견이 있었고, 대부분은 그들의 국가와 민족 역사의 일부로서 메시아가 온다고 생각하였다. 그 시절의 히브리인에게 유대 신학은 고칠 수 없이 확고하고 영원히 고정된 것이었다.
1955 121:7.2 The teachings and practices of Jesus regarding tolerance and kindness ran counter to the long-standing attitude of the Jews toward other peoples whom they considered heathen. For generations the Jews had nourished an attitude toward the outside world which made it impossible for them to accept the Master’s teachings about the spiritual brotherhood of man. They were unwilling to share Yahweh on equal terms with the gentiles and were likewise unwilling to accept as the Son of God one who taught such new and strange doctrines.
2000 121:7.2 관용과 친절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는 유대인이 이교도로 여긴 다른 민족들에 대하여 그들이 오랫동안 지녔던 태도와 상반되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유대인은 바깥 세계에 대하여, 사람이 서로 영적 형제라는 주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불가능하게 만든 그러한 태도를 길러 왔다. 그들은 이방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야웨를 기꺼이 함께 섬기려 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새롭고 이상한 교리를 가르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1 CM 121:7.2 아량과 친절에 관한 예수의 교훈과 실천은, 유대인이 이방인으로 간주하는 다른 민족들에 대하여 오랫동안-품어온 태도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서 유대인이 키워온 외부 세계에 대한 태도는, 사람의 영적 형제관계에 관한 주님의 교훈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방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야훼를 공유하려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그런 새롭고 생소한 교리를 가르치는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2007 URKA 121:7.2 관용과 친절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이라고 간주하는 다른 민족들에 대해 그들이 오랫동안 품어온 태도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서 유대인들이 키워온 외부 세계에 대한 태도는, 사람들의 영적 형제애에 대한 주(主)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야훼를 똑같이 공유하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따라서 이렇게 새롭고 생소한 교리를 가르치는 자를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2025 121:7.2 관용과 친절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는 유대인이 이교도로 여긴 다른 민족들에 대하여 그들이 오랫동안 지녔던 태도와 상반되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유대인은 바깥 세계에 대하여, 사람이 서로 영적 형제라는 주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불가능하게 만든 그러한 태도를 길러 왔다. 그들은 이방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기꺼이 야웨를 함께 섬기려 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새롭고 이상한 교리를 가르친 사람을 기꺼이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955 121:7.3 The scribes, the Pharisees, and the priesthood held the Jews in a terrible bondage of ritualism and legalism, a bondage far more real than that of the Roman political rule. The Jews of Jesus’ time were not only held in subjugation to the law but were equally bound by the slavish demands of the traditions, which involved and invaded every domain of personal and social life. These minute regulations of conduct pursued and dominated every loyal Jew, and it is not strange that they promptly rejected one of their number who presumed to ignore their sacred traditions, and who dared to flout their long-honored regulations of social conduct. They could hardly regard with favor the teachings of one who did not hesitate to clash with dogmas which they regarded as having been ordained by Father Abraham himself. Moses had given them their law and they would not compromise.
2000 121:7.3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의식과 율법주의의 무서운 사슬에 유대인을 묶어놓았고, 이것은 로마의 정치적 사슬보다도 더 가까이 있는 현실이었다. 예수의 시절에 유대인은 율법의 지배를 받았을 뿐 아니라, 사람을 종으로 만드는 전통의 요구에 똑같이 묶여 있었고, 이것은 개인 및 사회 생활의 모든 분야에 관계되고 침투했다. 이 자디잔 행동 규칙은 모든 충실한 유대인을 따라다니고 지배했다. 그들의 신성한 전통(傳統)을 주제넘게 무시하고, 오랫동안 지켜 왔던, 사회의 행동 규칙을 감히 조롱한 사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단번에 물리친 것은 당연하다. 바로 아버지 아브라함이 예정해 놓았다고 생각된 교리에 서슴지 않고 맞선 자의 가르침을 도저히 좋게 볼 수 없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율법을 준 것이고, 그들은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2001 CM 121:7.3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제례주의와 율법주의라는 지독한 굴레를 유대인에게 씌워 놓았는데, 이것은 로마의 정치 기준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었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은 율법에 예속됐을 뿐만 아니라 전통의 요구에 노예처럼 속박돼있었는데, 이것들은 그들의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의 모든 영역을 일일이 간섭하고 침범했다. 이런 세세한 행동 규칙이 모든 충실한 유대인을 따라다니고 지배했으며, 자신들이 신성시하는 전통을 무시하고, 오랫동안-받들어온 사회 운영 규칙을 감히 경멸한다고 생각되는,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을 그들이 즉시 제거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직접 제정한 것으로 간주하는 교리와 충돌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의 교훈을, 그들은 선의로 봐줄 수 없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율법을 줬고, 그들은 타협하려하지 않았다.
2007 URKA 121:7.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성직자들이 유대인들에게 형식주의와 율법주의라는 무서운 굴레로 씌워 놓았는데, 이러한 굴레는 실제적으로 로마의 정치적 규제보다도 더 엄한 것이었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율법에 복종 당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들의 요구에 노예처럼 속박되어 있었는데, 그것들은 그들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생활의 모든 권역을 일일이 간섭하고 침범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세한 행위성 규칙들은 모든 충실한 유대인들을 지배하였으며, 그들이 신성한 전통을 무시하거나 오랫동안 받들어 온 사회 행위성의 규율을 감히 경멸하는 그들의 동료들 중 하나를 즉시 제거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조상 아브라함이 직접 제정했다고 믿고 있던 독단들과 충돌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선의로 보아줄 수가 없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주었던 율법에 대해서 그들은 손상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2025 121:7.3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의식과 율법주의의 무서운 사슬에 유대인을 묶어 놓았고, 이것은 로마의 정치적 사슬보다도 더 현실이었다. 예수의 시절에 유대인은 율법의 지배를 받았을 뿐 아니라, 비굴한 전통의 요구에 똑같이 묶여 있었고, 이것은 개인 및 사회 생활의 모든 분야에 관계되고 침투했다. 이 자디잔 행동 규칙은 모든 충실한 유대인을 따라다니고 지배했다. 그들의 신성한 전통(傳統)을 주제넘게 무시하고, 오랫동안 지켜 왔던, 사회의 행동 규칙을 감히 조롱한 사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단번에 물리친 것은 당연하다. 바로 아버지 아브라함이 예정해 놓았다고 생각된 교리에 서슴지 않고 맞선 자의 가르침을 도저히 좋게 볼 수 없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율법을 준 것이고, 그들은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1955 121:7.4 By the time of the first century after Christ the spoken interpretation of the law by the recognized teachers, the scribes, had become a higher authority than the written law itself. And all this made it easier for certain religious leaders of the Jews to array the people against the acceptance of a new gospel.
2000 121:7.4 그리스도 이후 1세기가 되자, 이름 있는 선생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풀이한 말씀은 기록된 율법 자체보다도 더 높은 권한을 가졌다. 이 모든 이유로, 유대인의 어떤 종교 지도자들은, 새 복음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는 편으로 사람들을 더욱 쉽게 집결시킬 수 있었다.
2001 CM 121:7.4 그리스도 이후 1세기가 되자, 명망 있는 선생인 서기관들이 율법에 대해 말로 해석한 것이, 문자화된 율법 그 자체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게 됐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때문에, 특정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새 복음을 거부하는 편으로 그 민족을 끌어들이기가 더 쉬웠다.
2007 URKA 121:7.4 그리스도 이후 1세기까지, 명망 있는 선생들이나 율법학자들이 율법에 대해 말로 해석한 내용이 문자화된 율법 그 자체보다 더욱 높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몇몇 종교 영도자들은 유대인들이 새로운 복음을 배척하도록 묶어둘 수 있었던 것이다.
2025 121:7.4 그리스도 이후 1세기가 되자, 이름 있는 선생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풀이한 말씀은 기록된 율법 자체보다도 더 높은 권한을 가졌다. 이 모든 이유로, 유대인의 어떤 종교 지도자들은, 새 복음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는 편으로 사람들을 더욱 쉽게 집결시킬 수 있었다.
1955 121:7.5 These circumstances rendered it impossible for the Jews to fulfill their divine destiny as messengers of the new gospel of religious freedom and spiritual liberty. They could not break the fetters of tradition. Jeremiah had told of the “law to be written in men’s hearts,” Ezekiel had spoken of a “new spirit to live in man’s soul,” and the Psalmist had prayed that God would “create a clean heart within and renew a right spirit.” But when the Jewish religion of good works and slavery to law fell victim to the stagnation of traditionalistic inertia, the motion of religious evolution passed westward to the European peoples.
2000 121:7.5 이러한 상황은 유대인이 종교의 자유와 영적 해방을 부르짖는 새 복음의 사자(使者)가 되어 신성한 운명을 달성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전통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마음 속에 새겨야 할 율법”에 관하여 말한 적이 있고, 에스겔은 “사람의 혼 속에서 살 새 영”에 관하여 말했으며, 시편의 저자(著者)는 하나님이 “사람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고 올바른 영을 다시 새롭게 할 것”을 기도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하고 율법에 굴종할 것을 부르짖는 유대 종교가 전통적 습성의 수준까지 침체되었을 때, 종교적 발전의 움직임은 서쪽으로, 유럽 민족들에게 넘어가 버렸다.
2001 CM 121:7.5 이런 상황으로 인해, 유대인은 종교적 자유와 영적 해방이라는 새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신성한 운명을 완수할 수 없게 됐다. 그들은 전통의 족쇄를 깨뜨릴 수 없었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마음 속에 기록돼야 할 율법”을 이야기했고, 에스겔은 “사람의 혼 속에 살게 될 새 영”을 말했으며, 시편 기자는 “깨끗한 마음을 속에 창조하시고 올바른 영으로 새롭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선한 행위와 율법에 노예가 된 유대 종교가 전통적 타성에 침체되는 희생자로서 전락했을 때, 종교적 발전의 움직임은 유럽인을 향하여 서쪽으로 옮겨갔다.
2007 URKA 121:7.5 이러한 상황들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종교적인 자유와 영적 해방에 대한 새로운 복음의 메신저들로서의 그들의 신성한 운명을 완수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전통의 족쇄를 부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가슴에 기록되어진 율법”을 이야기하였고, 에스겔은 “사람의 혼 속에 거할 새로운 영”을 말하였으며, 시편 기자는 하느님에게 “깨끗한 가슴을 창조하시고 올바른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선행을 강조하고 율법의 노예가 된 유대 종교가 전통적 타성의 침체에 희생자로 전락하였을 때, 종교적 진보의 물결은 서쪽의 유럽인들에게로 옮겨갔다.
2025 121:7.5 이러한 상황은 유대인이 종교의 자유와 영적 해방을 부르짖는 새 복음의 사자(使者)가 되어 신성한 운명을 달성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전통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마음 속에 새겨야 할 율법”에 관하여 말한 적이 있고, 에스겔은 “사람의 혼 속에서 살 새 영”에 관하여 말했으며, 시편의 저자(著者)는 하나님이 “사람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고 올바른 영을 다시 새롭게 할 것”을 기도했다[16]. 그러나 선한 일을 하고 율법에 굴종할 것을 부르짖는 유대 종교가 전통적 습성의 수준까지 침체되었을 때, 종교적 발전의 움직임은 서쪽으로, 유럽 민족들에게 넘어가 버렸다
[17][18].
1955 121:7.6 And so a different people were called upon to carry an advancing theology to the world, a system of teaching embodying the philosophy of the Greeks, the law of the Romans, the morality of the Hebrews, and the gospel of personality sanctity and spiritual liberty formulated by Paul and based on the teachings of Jesus.
2000 121:7.6 그래서 진보하는 신학을 세상에 전하는 데 다른 한 민족이 부름받았다. 이 신학은 그리스인의 철학, 로마인의 법, 히브리인의 도덕과 함께, 인격의 신성함과 영적 해방을 주장하는 복음, 바울이 형성하고 예수의 가르침에 기초를 둔 복음을 담은 체계의 가르침이었다.
2001 CM 121:7.6 그리하여, 진보하는 신학, 즉 그리스인의 철학과 로마인의 법과 히브리인의 도덕성 그리고 예수의 교훈에 근거하여 바울이 조직적으로 만든, 인격의 고결함과 영적 해방을 외치는 복음 등을 포함하는 교육 체계를 세상에 전파하는 데, 다른 민족이 부름을 받게 됐다.
2007 URKA 121:7.6 그리하여 하나의 진보된 신학, 그리스인들의 철학, 로마인들의 법, 히브리인들의 도덕성,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바울에 의해 조직적으로 만들어진 개인성의 존엄성과 영적 해방에 대한 복음 등을 체현하는 하나의 교육 체계를 세계로 전파하는 일에 다른 민족이 요청 받게 되었다.
2025 121:7.6 그래서 진보하는 신학을 세상에 전하는 데 다른 한 민족이 부름받았다. 이 신학은 그리스인의 철학, 로마인의 법, 히브리인의 도덕과 함께, 인격의 신성함과 영적 해방의 복음, 바울이 형성하고 예수의 가르침에 기초를 둔 복음을 담은 계통의 가르침이었다.
1955 121:7.7 Paul’s cult of Christianity exhibited its morality as a Jewish birthmark. The Jews viewed history as the providence of God—Yahweh at work. The Greeks brought to the new teaching clearer concepts of the eternal life. Paul’s doctrines were influenced in theology and philosophy not only by Jesus’ teachings but also by Plato and Philo. In ethics he was inspired not only by Christ but also by the Stoics.
2000 121:7.7 바울이 세운 기독교 종파는, 거기에 담긴 도덕이 유대교에서 태어난 자국을 드러낸다. 유대인은 역사를 하나님―일하는 야웨―의 섭리라고 보았다. 그리스인은 좀더 뚜렷한 영생(永生) 개념을 이 새 가르침에 도입하였다. 바울의 교리에 담긴 신학과 철학은 예수의 가르침 뿐 아니라, 플라톤과 필로의 영향도 받았다. 바울의 윤리는 그리스도 뿐 아니라 금욕주의자로부터도 영감을 받았다.
2001 CM 121:7.7 바울의 그리스도교 종파는, 유대교에서 출생한 흔적을 그 종파의 도덕성으로 보여줬다. 유대인은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곧 일하시는 야훼의 섭리--로 여겼다. 영생에 대한 좀 더 분명한 개념을 새 가르침에 전해준 것은 그리스인이었다. 신학과 철학 면에서, 바울의 교리는 예수의 교훈뿐 아니라 플라톤과 필로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윤리 면에서, 그는 예수뿐 아니라 금욕주의자들에게서도 영감{靈感}을 받았다.
2007 URKA 121:7.7 바울의 그리스도교 예배종파는 그것의 도덕성이 유대로부터 왔다는 흔적을 보여주었다. 유대인들은 역사를 하느님─일하는 야훼─의 섭리로 여겼다. 그리스인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해 보다 확실한 개념들을 그 새로운 가르침 속에 전해주었다. 바울의 교리들은 신학과 철학적 면에서 예수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플라톤과 필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윤리적 면에 있어서, 그는 예수뿐만 아니라 금욕주의자들에게서도 영감을 받았다.
2025 121:7.7 바울이 세운 기독교 종파는, 거기에 담긴 도덕이 유대교에서 태어난 자국을 드러낸다. 유대인은 역사를 하나님 ― 일하는 야웨 ― 의 섭리라고 보았다. 그리스인은 좀더 뚜렷한 영생(永生) 개념을 이 새 가르침에 도입하였다. 바울의 교리에 담긴 신학과 철학은 예수의 가르침만 아니라, 플라톤과 필로의 영향도 받았다. 바울의 윤리는 그리스도뿐 아니라 금욕주의자로부터도 영감을 받았다.
1955 121:7.8 The gospel of Jesus, as it was embodied in Paul’s cult of Antioch Christianity, became blended with the following teachings:
2000 121:7.8 예수의 복음은, 바울의 안티옥 기독교 종파에 담겨 있는 바와 같이, 다음의 가르침과 섞이게 되었다:
2001 CM 121:7.8 예수의 복음은, 바울의 안디옥 그리스도교 종파에서 구체화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교훈과 혼합됐다:
2007 URKA 121:7.8 바울의 안디옥 그리스도교 예배종파에서 체현되었듯이, 예수의 복음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들과 융합되었다:유대주의로 개종한 그리스인들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그들의 개념들 중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철학적 논법.널리 퍼져 있던 신비교들의 매혹적인 가르침들, 특히 어떤 하느님이 희생됨으로써 이루어진 대속, 속죄, 그리고 구원에 대한 미트라 숭배의 교리들.이미 확립된 유대 종교의 완강한 도덕성.
2025 121:7.8 예수의 복음은, 바울의 안티옥 기독교 종파에 담겨 있는 바와 같이, 다음의 가르침과 섞이게 되었다:
1955 121:7.9 1. The philosophic reasoning of the Greek proselytes to Judaism, including some of their concepts of the eternal life.
2000 121:7.9 1. 유대교로 전향한 그리스인의 철학 논리. 이것은 영생(永生) 개념을 얼마큼 포함한다.
2001 CM 121:7.9 1. 영원한 생명에 관한 그들의 개념 가운데 일부를 포함하는, 유대주의로 개종한 그리스인의 철학적 논법.
2007 URKA 121:7.9 유대주의로 개종한 그리스인들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그들의 개념들 중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철학적 논법.
2025 121:7.9 1. 유대교로 전향한 그리스인의 철학 논리. 이것은 영생(永生) 개념을 얼마큼 포함한다.
1955 121:7.10 2. The appealing teachings of the prevailing mystery cults, especially the Mithraic doctrines of redemption, atonement, and salvation by the sacrifice made by some god.
2000 121:7.10 2. 유행하던 신비주의 종파들의 매력 있는 가르침, 특히 어떤 신이 희생물을 바침으로 사람을 되찾고, 속죄하고 구원한다는 미트라교의 교리.
2001 CM 121:7.10 2. 널리 퍼져있던 신비 종파들의 매혹적인 교훈, 특히 어떤 신이 희생됨으로써 이뤄진, 구속과 속죄와 구원에 대한 미드라교의 교리.
2007 URKA 121:7.10 널리 퍼져 있던 신비교들의 매혹적인 가르침들, 특히 어떤 하느님이 희생됨으로써 이루어진 대속, 속죄, 그리고 구원에 대한 미트라 숭배의 교리들.
2025 121:7.10 2. 유행하던 신비주의 종파들의 매력 있는 가르침, 특히 어떤 신이 희생물을 바침으로 사람을 되찾고, 속죄하고 구원한다는 미트라교의 교리.
1955 121:7.11 3. The sturdy morality of the established Jewish religion.
2000 121:7.11 3. 자리잡힌 유대 종교의 탄탄한 도덕성.
2001 CM 121:7.11 3. 이미 확립된 유대 종교의 탄탄한 도덕성.
2007 URKA 121:7.11 이미 확립된 유대 종교의 완강한 도덕성.
2025 121:7.11 3. 자리 잡힌 유대 종교의 탄탄한 도덕성.
1955 121:7.12 The Mediterranean Roman Empire, the Parthian kingdom, and the adjacent peoples of Jesus’ time all held crude and primitive ideas regarding the geography of the world, astronomy, health, and disease; and naturally they were amazed by the new and startling pronouncements of the carpenter of Nazareth. The ideas of spirit possession, good and bad, applied not merely to human beings, but every rock and tree was viewed by many as being spirit possessed. This was an enchanted age, and everybody believed in miracles as commonplace occurrences.
2000 121:7.12 예수가 살던 시절에 지중해의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왕국, 그리고 인접한 민족들은 모두, 세계의 지리(地理)ㆍ천문ㆍ건강ㆍ질병에 관하여 투박한 원시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나사렛 목수의 새롭고 경이로운 발언에 당연히 놀라워했다. 좋은 영과 나쁜 영에게 신들린다는 생각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모든 돌과 나무에도 영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이때는 마술에 홀린 시대였고, 누구나 기적(奇蹟)이 보통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었다.
2001 CM 121:7.12 예수 시대에, 지중해의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왕국 그리고 인접된 지역의 사람들은 모두, 세계 지리, 천문학, 건강, 및 질병 등에 대하여 아주 미숙하고 원시적인 관념에 사로잡혀있었으며;나사렛 목수의 새롭고 놀라운 선언을 듣고 그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선령{善靈}과 악령을 소유한다는 관념은, 단순히 인간에게만 적용되지 않았으며, 모든 바위와 나무에도 영이 들어있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다. 마법{魔法}이 성행하던 시대였으며, 기적이 보통 흔히 일어날 수 있다고 누구나 믿었다.
2007 URKA 121:7.12 예수 시대에, 지중해의 로마제국과 파르티아 왕국 그리고 인접된 지역의 민족들은 모두, 세계 지리와 천체 연구 그리고 신체 상태와 질병 등에 대해 아주 미숙하고 원시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사렛의 목수인 예수의 새롭고 놀라운 선언을 듣고 그들이 놀란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선한 영과 나쁜 영을 소유한다는 관념은, 단순히 인간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모든 바위와 나무도 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 시대는 마법이 성행하던 때였으며, 모든 사람들은 기적이 보통 흔하게 발생할 수 있는 것으로 믿었다.
2025 121:7.12 예수가 살던 시절에 지중해의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왕국, 그리고 인접한 민족들은 모두, 세계의 지리(地理)ㆍ천문ㆍ건강ㆍ질병에 관하여 투박한 원시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나사렛 목수의 새롭고 경이로운 발언에 당연히 놀라워했다. 좋은 귀신과 나쁜 귀신에 들린다는 생각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모든 돌과 나무에도 영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이때는 마술에 홀린 시대였고, 누구나 기적(奇蹟)이 보통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었다.
8. PREVIOUS WRITTEN RECORDS
8. 이전에 쓴 기록
8. 이전에 기록된 문서들
8. 이전에 쓰인 기록들
8. 이전에 쓴 기록
1955 121:8.1 As far as possible, consistent with our mandate, we have endeavored to utilize and to some extent co-ordinate the existing records having to do with the life of Jesus on Urantia. Although we have enjoyed access to the lost record of the Apostle Andrew and have benefited from the collaboration of a vast host of celestial beings who were on earth during the times of Michael’s bestowal (notably his now Personalized Adjuster), it has been our purpose also to make use of the so-called Gospels of Matthew, Mark, Luke, and John.
2000 121:8.1 받은 지침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가능한 한, 우리는 유란시아에서 예수의 일생과 상관 있는 기존의 기록을 이용하고 어느 정도 조정하려고 애썼다. 우리는 사도 안드레의 잃어버린 기록을 들여다볼 기회를 가졌고,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하던 시절에 땅에 있었던 광대한 무리의 하늘 존재들(특히 지금은 인격이 된 그의 조절자)의 협조를 받았지만, 마태ㆍ마가ㆍ누가ㆍ요한 복음이라 칭하는 복음들을 이용하는 것도 우리의 목적이었다.
2001 CM 121:8.1 우리가 받은 명령과 모순되지 않는다면 가능한 한, 예수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유란시아에 있는 기존의 기록을 활용하고, 어느 정도까지는 조화시키려고 우리는 노력해왔다. 우리는, 분실된 사도 안드레의 기록을 접할 수 있는 권한을 누렸고, 미가엘이 증여됐던 기간에 이 세상에 있었던 다양한 천상의 존재 무리(특히 이제 그의 인격화된 섭리사)의 협조를 받을 수 있는 특권도 누렸지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라고 칭하는 복음서를 잘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2007 URKA 121:8.1 우리는 유란시아에서의 예수의 일생을 다루고 있는 기존의 기록들이 우리의 임무와 모순되지 않는 한, 최대한도로 활용하고 어느 정도까지는 조화-협동시켜 보려고 노력하였다. 우리는 분실된 사도 안드레의 기록을 읽어 볼 수 있는 기쁨도 누렸고, 미가엘이 증여되었던 기간 동안 지상에 있었던 다양한 우주적 존재들의 (특히 그의 개인성구현된 조절자의) 협조를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었지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잘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기도 하였다.
2025 121:8.1 받은 지침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가능한 한, 우리는 유란시아에서 예수의 일생과 상관 있는 기존의 기록을 이용하고 어느 정도 조정하려고 애썼다. 우리는 사도 안드레의 잃어버린 기록을 들여다볼 기회를 가졌고,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하던 시절에 땅에 있었던 광대한 무리의 하늘 존재들(특히 지금은 인격이 된 그의 조절자)의 협조를 받았지만, 또한 이른바 마태ㆍ마가ㆍ누가ㆍ요한 복음들을 이용하는 것도 우리의 목적이었다.
1955 121:8.2 These New Testament records had their origin in the following circumstances:
2000 121:8.2 이러한 신약(新約) 기록은 다음 상황에서 그 기원을 가졌다:
2001 CM 121:8.2 이 신약 성경 기록들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기원됐다:
2007 URKA 121:8.2 이 신약성경의 기록들은 다음과 같은 배경 속에서 작성되었다:
2025 121:8.2 이러한 신약(新約) 기록은 다음 상황에서 그 기원을 가졌다:
1955 121:8.3 1. The Gospel by Mark. John Mark wrote the earliest (excepting the notes of Andrew), briefest, and most simple record of Jesus’ life. He presented the Master as a minister, as man among men. Although Mark was a lad lingering about many of the scenes which he depicts, his record is in reality the Gospel according to Simon Peter. He was early associated with Peter; later with Paul. Mark wrote this record at the instigation of Peter and on the earnest petition of the church at Rome. Knowing how consistently the Master refused to write out his teachings when on earth and in the flesh, Mark, like the apostles and other leading disciples, was hesitant to put them in writing. But Peter felt the church at Rome required the assistance of such a written narrative, and Mark consented to undertake its preparation. He made many notes before Peter died in A.D. 67, and in accordance with the outline approved by Peter and for the church at Rome, he began his writing soon after Peter’s death. The Gospel was completed near the end of A.D. 68. Mark wrote entirely from his own memory and Peter’s memory. The record has since been considerably changed, numerous passages having been taken out and some later matter added at the end to replace the latter one fifth of the original Gospel, which was lost from the first manuscript before it was ever copied. This record by Mark, in conjunction with Andrew’s and Matthew’s notes, was the written basis of all subsequent Gospel narratives which sought to portray the life and teachings of Jesus.
2000 121:8.3 1. 마가가 쓴 복음. 요한 마가는 (안드레의 노트를 제쳐놓고) 예수의 일생에 관하여 가장 일찍, 가장 짧고 간단한 기록을 남겼다. 주를 봉사자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사람으로 제시했다. 마가는 자기가 묘사하는 여러 장면에 얼씬거리던 젊은이였지만, 실제로 그의 기록은 시몬 베드로에 따른 복음이다. 그는 초기에 베드로, 나중에는 바울과 관련을 가졌다. 마가는 베드로의 격려를 받고, 로마에 있던 교회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서 이 글을 썼다. 주가 땅에서 육신을 입었을 때 자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한결같이 기록하지 않으려 했는가 알았기 때문에, 마가는 사도와 기타 유력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주의 가르침을 기록하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로마 교회가 그러한 기록된 이야기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마가는 이를 준비하는 일을 떠맡기로 찬성했다. 마가는 서기 67년, 베드로가 죽기 전에 짧은 기록을 많이 적어 놓았고, 베드로가 인가한 줄거리에 따라서,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베드로가 죽고 난 바로 뒤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복음은 서기 68년이 저물 무렵에 완성되었다. 마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기억과 베드로의 기억을 살려서 썼다. 이 기록은 그 뒤에 상당히 수정되었고 수많은 구절이 삭제되었으며, 최초의 복음에서 마지막 5분의 1은 처음 원본으로부터 베끼기도 전에 없어졌는데, 이를 대신하기 위하여 후일의 어떤 사건들이 끝에 첨가되었다. 마가가 쓴 기록은, 안드레와 마태의 노트와 함께,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을 그리려고 애쓴 모든 후일의 복음 이야기 기록에 기초가 되었다.
2001 CM 121:8.3 1. 마가복음. 요한 마가는 예수의 생애에 관해 (안드레의 기록을 제외하고) 제일 먼저 가장 간결하고 가장 담백하게 기록했다. 그는 주님을 한 사역자,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했다. 마가는 자신이 서술한 대부분의 장면들 주변에 한 소년으로서 있었지만, 실제로 그의 기록은 시몬 베드로에 따른 복음서다. 그는 처음에는 베드로와;그리고 나중에는 바울과 연합했다. 마가는 베드로의 부탁으로,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회의 간곡한 청에 따라서 이것을 기록했다. 마가는, 주님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자신의 교훈을 글로 남기기를 얼마나 일관되게 거부했는지 알았으므로, 사도들 및 다른 수제자{首弟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 이런 기록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느꼈으며, 마가가 그 준비를 담당하기로 동의했다. 그는 베드로가 서기 67년에 죽기 전까지 간단한 기록을 많이 만들었으며, 베드로가 승인한 전체 윤곽에 따라서, 그리고 로마 교회를 위하여, 베드로가 죽은 직후부터 이 기록을 쓰기 시작했다. 이 복음서는 서기 68년 말쯤에 완성됐다. 마가는 순전히 자신과 베드로의 기억에 의존해서 글을 썼다. 이 기록은 그후에 상당히 변경됐는데, 첫 복음서에서 마지막 5분의 1은 첫 원본이 복사되기 전에 유실{遺失}됐고, 이를 대신하기 위하여 후일의 어떤 사건들이 끝 부분에 삽입됐다. 마가가 쓴 이 기록은, 안드레의 기록 및 마태의 기록과 함께,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묘사하려했던 차후의 모든 성문화된 복음서의 기초가 됐다.
2007 URKA 121:8.3 1. 마가복음. 요한 마가는 예수의 일생에 관하여 가장 최초로 (안드레의 단편적인 기록을 제외하고는) 가장 짧고 가장 단순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주(主)를 한 사람의 섬기는 자,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한 사람으로 소개하였다. 마가는 자신이 서술한 장면들 중에서 많은 경우에 한 소년으로서 그 현장 주변에 있었지만, 실체 안에서 그의 기록은 시몬 베드로에 의해 만들어진 복음서이다. 그는 처음에는 베드로와;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과 함께 활동하였다. 마가는 베드로의 부탁에 의해서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회의 간곡한 청에 의해 이것을 기록하였다. 마가는 주(主)가 땅에서 사신 동안 자신의 가르침들을 글로 남기는 것을 얼마나 원하지 않았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사도들과 다른 수제자(首弟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이러한 기록된 이야기가 필요함을 느꼈으며, 마가는 그 일의 준비를 담당하기로 동의하였다. 그는 베드로가 서기 67년에 죽기 전까지 간단한 기록들을 많이 만들었으며, 베드로가 승인한 전체적인 윤곽에 따라서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베드로가 죽은 직후부터 이 기록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 복음서는 서기 68년 말경에 완성되었다. 마가는 순전히 자신과 베드로의 기억에 의존하여 글을 썼다. 그 기록은 그 후에 상당히 많이 변경되었는데, 수많은 구절들이 삭제되고 후대의 문서들 일부가 끝 부분에 삽입되어 복음서 원형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후반부 부분을 대치하였으며, 최초의 원본에 있었던 그 부분은 사본이 만들어지기 전에 유실되었다. 안드레의 초고와 마태의 초고와 함께, 마가의 이 기록은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을 그려내려고 하였던, 후에 기록된 모든 복음서들에게 성문화된 기초 역할을 하였다.
2025 121:8.3 1. 마가가 쓴 복음. 요한 마가는 (안드레의 노트를 빼고) 예수의 일생에 관하여 가장 일찍, 가장 짧고 간단한 기록을 남겼다. 주를 봉사자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사람으로 제시했다. 마가는 자기가 묘사하는 여러 장면에 얼씬거리던 젊은이였지만, 실제로 그의 기록은 시몬 베드로에 따른 복음이다. 그는 초기에 베드로, 나중에는 바울과 관련을 가졌다. 마가는 베드로의 격려를 받고, 로마에 있던 교회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서 이 글을 썼다. 주가 땅에서 육신을 입었을 때 자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한결같이 기록하지 않으려 했는가 알았기 때문에, 마가는 사도와 기타 유력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주의 가르침을 기록하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로마 교회가 그러한 기록된 이야기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마가는 이를 준비하는 일을 떠맡기로 찬성했다. 마가는 서기 67년, 베드로가 죽기 전에 짧은 기록을 많이 적어 놓았고, 베드로가 인가한 줄거리에 따라서,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베드로가 죽고 난 바로 뒤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복음은 서기 68년이 저물 무렵에 완성되었다. 마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기억과 베드로의 기억을 살려서 썼다. 이 기록은 그 뒤에 상당히 수정되었고 수많은 구절이 삭제되었으며, 최초의 복음에서 마지막 5분의 1은 처음 원본으로부터 사본을 만들기도 전에 없어졌는데, 이를 대신하기 위하여 후일의 어떤 사건들이 끝에 첨가되었다. 마가가 쓴 기록은, 안드레와 마태의 노트와 함께,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을 그리려고 애쓴 모든 후일의 복음 이야기 기록에 기초가 되었다.
1955 121:8.4 2. The Gospel of Matthew. The so-called Gospel according to Matthew is the record of the Master’s life which was written for the edification of Jewish Christians. The author of this record constantly seeks to show in Jesus’ life that much which he did was that “it might be fulfilled which was spoken by the prophet.” Matthew’s Gospel portrays Jesus as a son of David, picturing him as showing great respect for the law and the prophets.
2000 121:8.4 2. 마태의 복음. 이른바 마태에 따른 복음은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주의 일생에 관하여 적은 기록이다. 이 기록의 저자는 예수의 일생에서, 그가 행한 많은 일이 “선지자들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보이려고 항상 애쓴다. 마태 복음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 묘사하고 율법과 선지자들을 크게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2001 CM 121:8.4 2. 마태복음. 소위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는, 유대 그리스도교인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쓴, 주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의 저자는, 예수의 생애에서 그가 행한 대부분의 사건이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이 성취될 것이라”는 말과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계속 애썼다. 마태의 복음서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묘사하고, 그가 율법과 선지자들을 아주 존중하고 있는 듯이 서술한다.
2007 URKA 121:8.4 2. 마태복음. 소위 마태에 의한 복음서라고 불리는 이 복음서는 유대인 그리스도교인 들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씌어진, 주(主)의 일생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의 저자는 예수의 일생 속에서 그가 행한 대부분의 사건이 “예언자에 의해서 선포된 말씀이 성취될 것이다.”라는 말과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일관된 노력을 견지하였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가 율법과 선지자들을 크게 신뢰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한다.
1955 121:8.5 The Apostle Matthew did not write this Gospel. It was written by Isador, one of his disciples, who had as a help in his work not only Matthew’s personal remembrance of these events but also a certain record which the latter had made of the sayings of Jesus directly after the crucifixion. This record by Matthew was written in Aramaic; Isador wrote in Greek. There was no intent to deceive in accrediting the production to Matthew. It was the custom in those days for pupils thus to honor their teachers.
2000 121:8.5 사도 마태는 이 복음을 쓰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이사돌이 이 복음을 썼고, 이 일에 도움되는 자료로서, 이 사건들에 관하여 마태가 개인적으로 기억한 것뿐 아니라, 예수의 말씀에 관하여, 주가 십자가에 못박힌 바로 뒤에 마태가 써놓았던 어떤 기록을 또한 가지고 있었다. 마태의 이 기록은 아람어로 썼고, 이사돌은 그리스어로 썼다. 그 저서를 마태의 것으로 돌린 데에는 아무런 속일 뜻이 없었다. 그 시절에는 제자들이 이렇게 스승에게 명예를 돌리는 것이 관습이었다.
2001 CM 121:8.5 사도 마태는 이 복음서를 쓰지 않았다. 마태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이사도르가 이것을 기록했는데, 그는 이 일을 하면서 이 사건들에 대한 마태 개인의 기억뿐 아니라, 십자가형 직후에 이사도르 자신이 예수의 말씀을 모아놓은 것들의 도움도 받았다. 마태가 기록한 것은 아람어로 돼있었으며;이사도르는 그리스어로 기록했다. 이 글을 마태의 작품이라고 공언할 때 속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제자들이 그렇게 선생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관례였다.
2007 URKA 121:8.5 사도 마태는 이 복음서를 쓰지 않았다. 마태의 제자들 중 하나인 이사도르가 이것을 기록하였는데, 그는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이 사건들에 대한 마태의 개인적 기억뿐만 아니라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직후에 이사도르 자신이 그의 말씀들을 모아놓은 것들의 도움도 받았다. 마태가 기록한 것은 아람어로 되어 있었다; 이사도르는 그리스어로 기록하였다. 이 글을 마태의 작품이라고 공언함에 있어서 속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제자들이 자기 스승에게 경의를 표하는, 당시의 관습이었다.
2025 121:8.5 사도 마태는 이 복음을 쓰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이사돌이 이 복음을 썼고, 이 일에 도움되는 자료로서, 이 사건들에 관하여 마태가 개인적으로 기억한 것뿐 아니라, 예수의 말씀에 관하여, 주가 십자가에 못박힌 바로 뒤에 마태가 써 놓았던 어떤 기록을 또한 가지고 있었다. 마태의 이 기록은 아람어로 썼고, 이사돌은 그리스어로 썼다. 그 저서를 마태의 것으로 돌린 데에는 아무런 속일 뜻이 없었다. 그 시절에는 제자들이 이렇게 스승에게 명예를 돌리는 것이 관습이었다.
1955 121:8.6 Matthew’s original record was edited and added to in A.D. 40 just before he left Jerusalem to engage in evangelistic preaching. It was a private record, the last copy having been destroyed in the burning of a Syrian monastery in A.D. 416.
2000 121:8.6 마태가 최초에 쓴 기록은 그가 복음 전도에 들어가려고 예루살렘을 떠나기 바로 전에, 서기 40년에 편집되었고 여기에 다른 것이 첨가되었다. 이것은 사사로운 기록이었고, 그 마지막 사본은 서기 416년에 시리아의 어느 수도원이 불탔을 때 사라졌다.
2001 CM 121:8.6 마태의 원래 기록은, 서기 40년에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서 복음을 전파하러 가기 직전까지 편집되고 첨가됐다. 이것은 사적{私的}인 기록이었으며, 그 마지막 사본{寫本}은, 서기 416년에 시리아 수도원이 불탔을 때 없어졌다.
2007 URKA 121:8.6 마태의 기원적 기록은 서기 40년,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 복음전도의 전파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편집되고 첨가되었다. 그 기록은 사적인 것이었으며, 마지막 사본이 서기 416년 시리아의 수도원 화재 때 소실되었다.
2025 121:8.6 마태가 최초에 쓴 기록은 그가 복음 전도에 들어가려고 예루살렘을 떠나기 바로 전에, 서기 40년에 편집되었고 여기에 다른 것이 첨가되었다. 이것은 사사로운 기록이었고, 그 마지막 사본은 서기 416년에 시리아의 어느 수도원이 불탔을 때 사라졌다.
1955 121:8.7 Isador escaped from Jerusalem in A.D. 70 after the investment of the city by the armies of Titus, taking with him to Pella a copy of Matthew’s notes. In the year 71, while living at Pella, Isador wrote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He also had with him the first four fifths of Mark’s narrative.
2000 121:8.7 이사돌은 서기 70년에 타이투스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투입된 뒤에, 그 도시로부터 피했으며 마태가 적은 기록의 사본(寫本) 하나를 펠라로 가지고 갔다. 71년에, 펠라에서 사는 동안, 이사돌은 마태에 따른 복음을 썼다. 그는 또한 마가의 이야기에서 처음 5분의 4를 가지고 있었다.
2001 CM 121:8.7 서기 70년에 티투스 장군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이사도르는 마태의 단편 기록들을 지니고 성을 빠져나와서 펠라로 도피했다. 펠라에서 살고 있던 71년에, 이사도르는 마태의 단편 기록들에 의거해서 복음서를 기록했다. 그는 또한 마가의 기록 중에서 5분의 4에 해당하는 첫 부분을 갖고 있었다.
2007 URKA 121:8.7 기원후 70년 티투스 장군의 무리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 이사도르는 마태의 단편적인 기록들을 가지고 도시를 빠져 나와 펠라로 도피하였다. 서기 71년, 펠라에 거하면서 이사도르는 마태의 단편적 기록들에 의거하여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그는 또한 마가의 기록 중 5분의 4에 해당하는 첫 부분을 갖고 있었다.
2025 121:8.7 이사돌은 서기 70년에 타이투스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투입된 뒤에, 그 도시로부터 피했으며 마태가 적은 기록의 사본(寫本) 하나를 펠라로 가지고 갔다. 71년에, 펠라에서 사는 동안, 이사돌은 마태에 따른 복음을 썼다. 그는 또한 마가의 이야기에서 처음 5분의 4를 가지고 있었다.
1955 121:8.8 3. The Gospel by Luke. Luke, the physician of Antioch in Pisidia, was a gentile convert of Paul, and he wrote quite a different story of the Master’s life. He began to follow Paul and learn of the life and teachings of Jesus in A.D. 47. Luke preserves much of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in his record as he gathered up these facts from Paul and others. Luke presents the Master as “the friend of publicans and sinners.” He did not formulate his many notes into the Gospel until after Paul’s death. Luke wrote in the year 82 in Achaia. He planned three books dealing with the history of Christ and Christianity but died in A.D. 90 just before he finished the second of these works, the “Acts of the Apostles.”
2000 121:8.8 3. 누가가 쓴 복음. 피시디아 지방의 안티옥에서 살던 의사 누가는 바울이 개종시킨 이방인이었고, 주의 일생에 대하여 아주 다른 이야기를 적었다. 그는 서기 47년에 비로소 바울을 따르고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누가는 바울 및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 여러 사실을 모은 대로, 그의 기록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하여 많은 것을 간직한다. 누가는 주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내세운다. 그는 바울이 죽을 때까지 이 기록을 복음서로 만들지 않았다. 누가는 아카이아에서 82년에 기록했다.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역사를 다루는 세 권의 책을 쓰려고 계획했으나 이 작업에서 둘째 책, “사도들의 행적”을 마치기 바로 전, 서기 90년에 죽었다.
2001 CM 121:8.8 3. 누가복음. 피시디아 안디옥의 의사였던 누가는, 바울로 인해 개종된 이방인이었고, 주님의 생애에 관하여 상당히 다른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는 서기 47년에 바울을 추종하기 시작하면서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하여 배웠다. 누가는, 바울은 물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 사실을 수집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많이 기록하고 보관했다. 주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묘사했다. 그는, 바울이 죽기 전에는 자신의 여러 단편 기록을 복음서로 조직화하지 않았다. 누가는 82년에 아가야에서 기록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다루는 세 권의 책을 쓸 계획이었으나, 둘째 책 “사도행전”이 완성되기 직전인 서기 90년에 죽었다.
2007 URKA 121:8.8 3. 누가복음. 피시디아의 안디옥에서 의사였던 누가는 바울에 의해서 개종된 이방인이었는데, 그는 주(主)의 일생에 관하여 매우 다른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그는 서기 47년 바울을 추종하기 시작하면서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대하여 배웠다. 누가는 바울은 물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 사실들을 수집하여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은혜”에 대해 많이 기록하여 보관하였다. 그는 주(主)를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로 묘사하였다. 그는 바울이 죽기 전에는 자신의 많은 단편적 기록들을 복음서로 조직화시키지 않았다. 누가는 아카이아에서 82년에 기록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에 관한 역사를 다루는 세 권의 책을 쓸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두 번째 책인, “사도행전”을 완결하기 직전인 서기 90년에 죽었다.
2025 121:8.8 3. 누가가 쓴 복음. 피시디아 지방의 안티옥에서 살던 의사 누가는 바울이 개종시킨 이방인이었고, 주의 일생에 대하여 아주 다른 이야기를 적었다. 그는 서기 47년에 비로소 바울을 따르고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누가는 바울 및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 여러 사실을 모은 대로, 그의 기록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하여 많은 것을 간직한다[21]. 누가는 주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내세운다
[22]. 그는 바울이 죽을 때까지 이 기록을 복음서로 만들지 않았다. 누가는 아카이아에서 82년에 기록했다.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역사를 다루는 세 권의 책을 쓰려고 계획했으나 이 작업에서 둘째 책, “사도들의 행적”을 마치기 바로 전, 서기 90년에 죽었다.
1955 121:8.9 As material for the compilation of his Gospel, Luke first depended upon the story of Jesus’ life as Paul had related it to him. Luke’s Gospel is, therefore, in some ways the Gospel according to Paul. But Luke had other sources of information. He not only interviewed scores of eyewitnesses to the numerous episodes of Jesus’ life which he records, but he also had with him a copy of Mark’s Gospel, that is, the first four fifths, Isador’s narrative, and a brief record made in the year A.D. 78 at Antioch by a believer named Cedes. Luke also had a mutilated and much-edited copy of some notes purported to have been made by the Apostle Andrew.
2000 121:8.9 누가는 그의 복음을 수집하기 위한 자료로서, 먼저 바울이 그에게 전해 준, 예수의 일생 이야기에 의존했다. 그러니까 누가의 복음은 어떤 면에서, 바울에 따른 복음이다. 그러나 누가는 다른 근원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누가는 예수의 일생에서 기록하는 수많은 사건의 증인을 몇십 명 만나서 물어보았을 뿐 아니라, 또한 마가의 복음, 다시 말해서 처음 5분의 4의 사본, 그리고 이사돌의 이야기, 또 세데스라는 이름을 가진 한 신도가 안티옥에서 서기 78년에 만든 간단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는 또한 사도 안드레가 적었다고 주장되는 어떤 기록들의 사본, 절단되고 많이 편집된 사본을 가지고 있었다.
2001 CM 121:8.9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편집하기 위한 재료로서, 먼저 바울이 자기 체험과 관련시켜서 말했던, 예수의 생애에 대한 자료에 의존했다. 따라서 누가 복음서는, 어떤 면에서는 바울로 말미암은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다른 정보 자료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기록한 예수의 생애 가운데 여러 사건을 목격한 많은 사람과 면담했을 뿐만 아니라, 5분의 4에 해당하는 첫 부분의 마가복음 사본을 갖고 있었고, 이사도르의 글, 그리고 서기 78년에 안디옥에서 세데스라는 한 신자가 쓴 간단한 기록도 갖고 있었다. 누가는 또한 사도 안드레가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종합적이고 많이-편집된 어떤 기록의 사본도 갖고 있었다.
2007 URKA 121:8.9 복음서의 편집을 위한 재료로서, 누가는 처음에는 바울이 자기 체험과 관련시켜 말하였던 예수의 일생에 대한 자료에 의존했었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어떤 면에서는 바울에 의한 복음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다른 정보들도 갖고 있었다. 그는 예수의 일생 가운데에서 여러 에피소드들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기록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5분의 4에 해당하는 첫 부분의 마가복음 사본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사도르의 글들과, 그리고 서기 78년 안디옥에서 세데스라는 한 신자(信者)가 쓴 간단한 기록도 가지고 있었다. 누가는 또한 사도 안드레의 것으로 여겨지는, 종합적이고 많이 편집된 단편적인 기록들의 사본도 갖고 있었다.
2025 121:8.9 누가는 그의 복음을 수집하기 위한 자료로서, 먼저 바울이 그에게 전해 준, 예수의 일생 이야기에 의존했다. 그러니까 누가의 복음은 어떤 면에서, 바울에 따른 복음이다. 그러나 누가는 다른 근원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누가는 예수의 일생에서 기록하는 수많은 사건의 증인을 몇십 명 만나서 물어보았을 뿐 아니라, 또한 마가의 복음, 다시 말해서 처음 5분의 4의 사본, 그리고 이사돌의 이야기, 또 세데스라는 이름을 가진 한 신도가 안티옥에서 서기 78년에 만든 간단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는 또한 사도 안드레가 적었다고 주장되는 어떤 기록들의 사본, 절단되고 많이 편집된 사본을 가지고 있었다.
1955 121:8.10 4. The Gospel of Joh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relates much of Jesus’ work in Judea and around Jerusalem which is not contained in the other records. This is the so-called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son of Zebedee, and though John did not write it, he did inspire it. Since its first writing it has several times been edited to make it appear to have been written by John himself. When this record was made, John had the other Gospels, and he saw that much had been omitted; accordingly, in the year A.D. 101 he encouraged his associate, Nathan, a Greek Jew from Caesarea, to begin the writing. John supplied his material from memory and by reference to the three records already in existence. He had no written records of his own. The Epistle known as “First John” was written by John himself as a covering letter for the work which Nathan executed under his direction.
2000 121:8.10 4. 요한의 복음. 요한에 따른 복음은 다른 기록에 담겨 있지 않은, 유대 땅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근처에서 예수가 하신 일을 많이 적는다. 이것이 이른바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 따른 복음이며, 비록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쓰지 않았어도 그 생각을 불어넣었다. 처음 기록된 뒤에, 바로 요한이 쓴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려고 여러 번 편집을 거쳤다. 이 기록이 만들어졌을 때,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을 가지고 있었고, 허다한 것이 빠져 있음을 알았다. 따라서, 서기 101년에 그는 케자리아에서 온 그리스계 유대인 동료 나단에게 글을 쓰기 시작하라고 격려했다. 요한은 기억을 더듬고, 이미 존재하는 세 가지 기록을 참조함으로 자신의 자료를 주었다. 그는 자신이 적은 저서가 하나도 없었다. “요한 1서”라고 알려진 편지는 그의 지도 하에서 나단이 쓴 작품을 소개하는 편지로서, 요한 자신이 썼다.
2001 CM 121:8.10 4. 요한복음.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에는, 다른 기록들에서 볼 수 없는, 예수께서 유대지방과 예루살렘 근방에서 활동하신 일이 많이 기록돼있다. 이것은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라고 불리는데, 비록 요한이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영감을 준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처음 기록된 후에, 요한이 직접 쓴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수차례에 걸쳐 편집됐다. 이 기록이 작성됐을 때,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을 갖고 있었고, 많은 것이 생략돼있음을 발견했으며;따라서 그는, 서기 101년에 가이사랴에서 온, 그리스 유대인인 동료 나단을 설득해서 이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요한은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자료를 제공했고, 이미 기록된 세 권의 기록을 참고하도록 했다. 그가 직접 쓴 기록은 없었다. “요한1서”라고 알려진 서신서는 그가 직접 쓴 것이었는데, 그의 지시에 따라서 나단이 기록한 작품의 서언{序言}에 해당하는 편지였다.
2007 URKA 121:8.10 4. 요한복음. 요한의 복음서에는 다른 기록들에서는 볼 수 없는, 유대 지역과 예루살렘 근방에서의 예수의 활동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 의한 복음서라고 불렸으며, 비록 요한이 직접 복음서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영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이 복음서가 첫 번째로 쓰인 이후, 요한 자신이 직접 쓴 것처럼 보이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편집되었다. 이 기록이 작성되었을 때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을 갖고 있었고, 많은 내용이 생략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그는 서기 101년에 케자리아에서 온 그리스 유대인인 자기 친구 나단을 설득하여 이것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요한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재료들을 그에게 제공하였고 이미 쓰인 세 권의 기록들을 참고하도록 하였다. 요한 자신이 직접 쓴 기록은 없었다. “요한1서”라고 알려진 서신서는 그가 직접 쓴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지도에 따라 나단이 기록한 작품의 서언(序言)에 해당하는 편지였다.
2025 121:8.10 4. 요한의 복음. 요한에 따른 복음은 다른 기록에 담겨 있지 않은, 유대 땅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근처에서 예수가 하신 일을 많이 적는다. 이것이 이른바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 따른 복음이며, 비록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쓰지 않았어도 그 생각을 불어넣었다. 처음 기록된 뒤에, 바로 요한이 쓴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려고 여러 번 편집을 거쳤다. 이 기록이 만들어졌을 때,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을 가지고 있었고, 허다한 것이 빠져 있음을 알았다. 따라서, 서기 101년에 그는 케자리아에서 온 그리스계 유대인 동료 나단에게 글을 쓰기 시작하라고 격려했다. 요한은 기억을 더듬고, 이미 존재하는 세 가지 기록을 참조함으로 자신의 자료를 주었다. 그는 자신이 적은 저서가 하나도 없었다. “요한 1서”라고 알려진 편지는 그의 지도 하에서 나단이 쓴 작품을 소개하는 편지로서, 요한 자신이 썼다.
1955 121:8.11 All these writers presented honest pictures of Jesus as they saw, remembered, or had learned of him, and as their concepts of these distant events were affected by their subsequent espousal of Paul’s theology of Christianity. And these records, imperfect as they are, have been sufficient to change the course of the history of Urantia for almost two thousand years.
2000 121:8.11 이 저자들은 모두 그들이 본 대로 기억한 대로, 또는 들은 대로, 그리고 바울의 기독교 신학을 나중에 옹호함으로 이 아득히 먼 사건들에 대하여 그들의 개념이 영향을 받은 대로, 예수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렸다. 어설프기는 해도, 이 기록들은 거의 2천 년 동안 유란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2001 CM 121:8.11 이 저자들은 모두, 자신이 예수를 본대로, 기억나는대로, 또는 그에 대해 들은대로, 그리고 바울의 그리스도교 신학을 나중에 지지함으로써, 오래 전의 이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개념이 영향을 받은대로, 정직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이 기록들은 거의 2,000년 동안 유란시아 역사의 진로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2007 URKA 121:8.11 이 저자들 모두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던 그대로, 기억나는 대로, 혹은 그에 대하여 배운 대로 정직하게 기록하였으며, 오래 전에 있었던 이 사건들은 나중에 지지를 받게 된 바울의 그리스도교 신학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기록들은 불완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거의 2,000년 동안 유란시아 역사의 방향을 바꾸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2025 121:8.11 이 저자들은 모두 그들이 보거나, 기억하거나, 또는 들은 대로, 그리고 바울의 기독교 신학을 나중에 옹호함으로 이 아득히 먼 사건들에 대하여 그들의 개념이 영향을 받은 대로, 예수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렸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이 기록들은 거의 2천 년 동안 유란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1955 121:8.12 [Acknowledgment: In carrying out my commission to restate the teachings and retell the doings of Jesus of Nazareth, I have drawn freely upon all sources of record and planetary information. My ruling motive has been to prepare a record which will not only be enlightening to the generation of men now living, but which may also be helpful to all future generations. From the vast store of information made available to me, I have chosen that which is best suited to the accomplishment of this purpose. As far as possible I have derived my information from purely human sources. Only when such sources failed, have I resorted to those records which are superhuman. When ideas and concepts of Jesus’ life and teachings have been acceptably expressed by a human mind, I invariably gave preference to such apparently human thought patterns. Although I have sought to adjust the verbal expression the better to conform to our concept of the real meaning and the true import of the Master’s life and teachings, as far as possible, I have adhered to the actual human concept and thought pattern in all my narratives. I well know that those concepts which have had origin in the human mind will prove more acceptable and helpful to all other human minds. When unable to find the necessary concepts in the human records or in human expressions, I have next resorted to the memory resources of my own order of earth creatures, the midwayers. And when that secondary source of information proved inadequate, I have unhesitatingly resorted to the superplanetary sources of information.
2000 121:8.12 [인정하는 말씀: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을 다시 적고 그의 행적을 다시 이야기하라는 임무를 수행하느라고 나는 모든 근원의 기록과 행성에 있는 정보를 마음대로 이용하였다. 나의 주요한 동기는 지금 살고 있는 세대의 사람들을 깨우칠 뿐 아니라, 앞날의 모든 세대에게도 도움이 될까 싶은 기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용하도록 제공된 광대한 정보의 저장으로부터, 나는 이 목적을 이루는 데 가장 적당한 것을 골랐다. 가능한 한, 나는 순전히 인간의 근원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냈다. 오로지 그러한 근원이 부족했을 때, 초인간 기록에 의존했다.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대한 생각과 개념을 한 인간의 지성이 쓸 만하게 표현했을 때, 변함없이 인간이 생각하는 형태로 보이는 것을 우대하였다. 주의 일생과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와 참 중요성에 관하여 우리의 개념에 더 잘 맞도록 언어 표현을 조정하려고 애썼지만, 가능한 한, 내 이야기 전체에서 실제의 인간적 개념과 생각 방식을 고수하였다. 인간의 머리 속에서 생겨난 개념들이 모든 다른 인간이 이해하기에 더 쓸 만하고 유익함이 입증될 것을 나는 잘 안다. 인간의 기록에서나 인간의 표현에서 필요한 개념을 찾을 수 없을 때, 다음으로 바로 내가 속한 계급의 지구 생물, 즉 중도자(中道者)들의 기억 자료에 의존했다. 그 2차 근원의 정보가 부적당한 것이 드러났을 때, 서슴지 않고 나는 행성 바깥에서 가져온 정보에 의존했다.
2001 CM 121:8.12 [감사{感謝}의 글:나사렛 예수의 교훈을 다시 진술하고 활동을 다시 이야기하는 위탁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나는 기록된 모든 자료와 행성 정보를 자유롭게 이용했다. 나의 주요 동기는, 지금 살고 있는 세대의 사람들을 계몽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세대에게도 도움 될 수 있게 하는 기록을 준비하는 데 있었다. 내가 사용할 수 있었던 방대한 양의 정보로부터, 나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에 가장 적합한 정보만 선택했다. 가능한 한, 나는 순전히 인간 세계의 자료들로부터 정보를 도출하려고 했다. 그런 자료를 구할 수 없을 경우에만, 초인적인 그 기록의 도움을 받았다.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개념과 관념을 어떤 인간 정신이 적절하게 표현했을 때, 나는 그런 명백하게 인간적인 사고 유형에 반드시 우선순위를 뒀다. 주님의 생애와 교훈의 실제 의미와 진정한 뜻에 대한 우리 개념에 더 잘 맞을 수 있도록, 단어 표현을 조정하려고 애썼지만, 그럼에도 나는 서술하는 동안 내내, 최대한 실제 인간 개념과 사고{思考} 원형에 충실했다. 인간 정신에서 생겨난 이 개념들이, 다른 모든 지성인에게도 더 잘 받아들여질 수 있고 도움 될 수 있음이 입증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인간의 기록이나 인간의 표현에서 필요한 개념을 찾아 낼 수 없을 때, 내가 소속된 지상 피조물 계층인 중도자들의 기억 자원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 2차 정보 자료가 부적당한 경우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행성의 범주를 초월하는 정보 자료의 도움을 받았다.
2007 URKA 121:8.12 [감사의 글: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을 다시 진술하고 활동을 다시 서술하는 나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나는 기록된 모든 자료들과 행성 정보를 자유롭게 이용하였다. 나는 이 기록이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의 세대들을 깨우치는 것 뿐 아니라 미래의 세대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주요 동기를 두었다. 내가 사용할 수 있었던 엄청나게 많은 모든 정보들로부터, 이 목적을 달성하는데 가장 적합한 정보들만을 선택하였다. 나는 가능하다면 순전히 인간 근원으로부터 나의 정보를 도출하였다. 그러한 근원이 없을 경우에만, 초인간적인 기록들에 의지하였다.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대한 관념과 개념들이 인간 마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표현되었을 때, 나는 명백하게 그러한 인간의 생각 원형틀을 반드시 우선하였다. 주(主)의 일생과 가르침의 실제 의미와 진정한 뜻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잘 맞을 수 있도록 단어 표현을 조절하려고 내가 애를 쓰기는 하였지만, 나의 모든 서술을 가능한 한 실재적인 인간의 개념과 생각 원형틀을 고수하여 왔다. 나는 인간 마음에 기원을 두고 있는 이런 개념들이, 모든 다른 인간 마음에도 또한 받아들여 질 수 있고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을 잘 안다. 인간의 기록이나 인간의 표현에서 필요한 개념을 찾아 낼 수 없는 경우에만, 나는 내가 소속된 계층이며 땅의 창조체들인 중도자들의 기억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의 2차 근원이 부적당한 경우에는 주저하지 않고 정보에서의 초(超)행성적 근원에 의존했다.
2025 121:8.12 [인정하는 말씀: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을 다시 적고 그의 행적을 다시 이야기하라는 임무를 수행하느라고 나는 모든 근원의 기록과 행성에 있는 정보를 마음대로 이용하였다. 나의 주요한 동기는 지금 살고 있는 세대의 사람들을 깨우칠 뿐 아니라, 앞날의 모든 세대에게도 도움이 될까 싶은 기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용하도록 제공된 광대한 정보 저장소로부터, 나는 이 목적을 이루는 데 가장 적당한 것을 골랐다. 가능한 한, 나는 순전히 인간의 근원에서 정보를 얻어냈다. 오로지 그러한 근원이 부족했을 때, 초인간 기록에 의존했다.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대한 생각과 개념을 한 인간의 지성이 쓸 만하게 표현했을 때, 변함없이 인간이 생각하는 형태로 보이는 것을 우대하였다. 주의 일생과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와 참 중요성에 관하여 우리의 개념에 더 잘 맞도록 언어 표현을 조정하려고 애썼지만, 가능한 한, 내 이야기 전체에서 실제의 인간적 개념과 생각 방식을 고수하였다. 인간의 머리 속에서 생겨난 개념들이 모든 다른 인간이 이해하기에 더 쓸 만하고 유익함이 입증될 것을 나는 잘 안다. 인간의 기록에서나 인간의 표현에서 필요한 개념을 찾을 수 없을 때, 다음으로 바로 내가 속한 계급의 지구 생물, 즉 중도자(中道者)들의 기억 자료에 의존했다. 그 2차 근원의 정보가 부적당한 것이 드러났을 때, 서슴지 않고 나는 행성 바깥에서 가져온 정보에 의존했다.
1955 121:8.13 The memoranda which I have collected, and from which I have prepared this narrative of the life and teachings of Jesus—aside from the memory of the record of the Apostle Andrew—embrace thought gems and superior concepts of Jesus’ teachings assembled from more than two thousand human beings who have lived on earth from the days of Jesus down to the time of the inditing of these revelations, more correctly restatements. The revelatory permission has been utilized only when the human record and human concepts failed to supply an adequate thought pattern. My revelatory commission forbade me to resort to extrahuman sources of either information or expression until such a time as I could testify that I had failed in my efforts to find the required conceptual expression in purely human sources.
2000 121:8.13 사도 안드레의 기록에 담긴 기억은 별도로 하고―예수의 시절부터 이 계시, 더 정확히 말하면, 다시 진술하는 이 글을 쓸 때까지, 땅에서 산 2천 명이 넘는 인간으로부터 끌어 모은,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보석 같은 생각과 우수한 개념을 담고 있는 메모, 내가 수집해온 여러 메모로부터 나는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하여 이 이야기를 준비했다. 인간의 기록과 인간의 개념이 적당한 생각 형태를 제공하지 못할 때에야 허락받은 계시를 이용했다. 계시 위원회는, 순전히 인간의 근원으로부터 필요한 개념의 표현을 찾으려는 노력이 실패했다고 증언할 수 있을 때까지, 인간 바깥 근원의 정보나 표현을 사용하지 말라고 금하였다.
2001 CM 121:8.13 사도 안드레의 기록에 대한 기억은 별도로 하고-- 예수 시대부터 이 계시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시 진술하는 이 기록을 쓸 때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2천 명 이상의 인간으로부터 수집한, 예수의 교훈에 관한 주옥같은 사상과 최고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는, 내가 수집해온 메모들로부터, 나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이 서술문을 준비했다. 인간의 기록과 인간의 개념들이 적절한 사고{思考} 원형을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에만, 허용된 계시를 활용해왔다. 내가 소속된 계시 위원단은, 요구된 개념적 표현을 순수하게 인간적인 자료로부터 찾아내고자 수고하는 일에 실패했음을 내가 증명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인간 범위 밖에 있는 어떤 정보나 표현의 자료에도 도움을 청하지 말라고 금지했다.
2007 URKA 121:8.13 내가 수집해 온,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한 이 서술을 준비하였던 메모들─사도 안드레의 기록으로부터의 기억을 제외하고─은, 예수가 왔던 날부터 이 계시들, 더욱 정확하게 다시 진술된 기록이 쓰인 시기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2,000명 이상의 인간 존재들로부터 수집된 주옥같은 생각들과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우월한 개념들을 포옹하고 있다. 인간의 기록과 인간 개념이 적절한 생각 원형틀을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에만 계시적 허용이 활용되어 왔다. 내가 소속된 계시 위원회는, 내가 순수한 인간들로부터는 필요한 개념적 표현을 찾아내지 못하였다는 것을 증명할 때까지는 내가 인간의 범위 밖에 있는 어떤 정보나 개념의 도움을 받을 수 없도록 금지하였다.
2025 121:8.13 사도 안드레의 기록에 담긴 기억은 별도로 하고 ― 예수의 시절부터 이 계시, 더 정확히 말하면, 다시 진술하는 이 글을 쓸 때까지, 땅에서 산 2천 명이 넘는 인간으로부터 끌어 모든,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보석 같은 생각과 우수한 개념을 담고 있는 메모, 내가 수집해온 여러 메모로부터 나는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하여 이 이야기를 준비했다. 인간의 기록과 인간의 개념이 적당한 생각 형태를 제공하지 못할 때에야 허락된 계시를 이용했다. 계시 위원회는, 순전히 인간의 근원에서 필요한 개념의 표현을 찾으려는 노력이 실패했다고 증언할 수 있을 때까지, 인간 바깥 근원의 정보나 표현을 사용하지 말라고 금하였다.
1955 121:8.14 While I, with the collaboration of my eleven associate fellow midwayers and under the supervision of the Melchizedek of record, have portrayed this narrative in accordance with my concept of its effective arrangement and in response to my choice of immediate expression, nevertheless, the majority of the ideas and even some of the effective expressions which I have thus utilized had their origin in the minds of the men of many races who have lived on earth during the intervening generations, right on down to those who are still alive at the time of this undertaking. In many ways I have served more as a collector and editor than as an original narrator. I have unhesitatingly appropriated those ideas and concepts, preferably human, which would enable me to create the most effective portraiture of Jesus’ life, and which would qualify me to restate his matchless teachings in the most strikingly helpful and universally uplifting phraseology. In behalf of the Brotherhood of the United Midwayers of Urantia, I most gratefully acknowledge our indebtedness to all sources of record and concept which have been hereinafter utilized in the further elaboration of our restatement of Jesus’ life on earth.]
2000 121:8.14 내 동료 중도자 11명과 함께 일하면서, 기록을 책임진 멜기세덱의 감독 하에서, 효과적으로 배열하려는 내 생각대로, 즉시 표현한 선택에 따라서, 이 이야기를 엮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이용한 대다수의 관념과 효과적인 어떤 표현조차, 이 사업을 시작할 때 아직 살아 있었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중간에 존재한 여러 세대에 걸쳐 땅에서 살았던 여러 민족의 사람들 머리 속에서 기원을 가졌다. 여러 면에서, 나는 독창적인 이야기꾼이라기보다 수집하고 편집하는 자로서 일했다. 나로 하여금 예수의 일생을 가장 효과적으로 묘사할 수 있게 만드는 생각과 개념, 그리고 가장 뛰어나게 유익하고 널리 사람을 숭고하게 만드는 표현을 써서, 견줄 데 없는 주의 가르침을 다시 진술하게 만드는, 될 수 있으면 인간다운 생각과 개념을 나는 서슴지 않고 이용했다. 유란시아 연합 중도자들을 대신하여, 땅에서 사신 예수의 일생을 다시 진술하는 자세한 글에서 다음에 이용된 모든 근원의 기록과 개념에 대하여 우리가 빚진 것을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認定)한다.]
2001 CM 121:8.14 동료 중도자 11명의 협력과, 기록을 담당하는 멜기세덱의 감독 하에, 그것을 효과적으로 정리하려는 나의 개념에 맞도록, 그리고 직접 표현하기로 내가 선택함에 따라서 이 이야기를 묘사했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렇게 해서 활용한 그 관념들 대부분, 그리고 심지어 효과적인 표현들 가운데 일부분은, 이 일을 떠맡기 시작할 때 아직 살아있던 자들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끼어있는 그 세대들 동안 지구에 살아왔던, 여러 인종에 속한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그것들의 원천을 활용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내가 직접 이야기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정보를 수집하고 편집하는 자로서 역할을 했다. 나는 인간 개념과 관념을 더 적극적으로 채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것들은 예수의 생애를 묘사할 때 가장 효과적인 창작성을 제공했고, 내가 예수의 비길 데 없는 교훈을 다시 기록할 때, 가장 현저하게 도움을 줬고, 가장 보편적인 어법{語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향상시켜줬다. 유란시아 연합 중도자 형제단체를 대신하여, 나는 이 세상에서 예수의 생애에 대해 우리가 다시 서술하는 자세한 글에서, 이어지는 다음 장들의 기록과 개념의 모든 자료를 제공한 사람들의 은혜에 심심한 감사를 표하는 바다.]
2007 URKA 121:8.14 나는 나의 11명 연관-동료 중도자들의 도움과 기록 담당 멜기세덱의 감독 하에서,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로 한 나의 선택에 따라서 그리고 그것의 효력적인 배열에 대한 나의 개념에 맞도록 이 이야기를 표현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 하여 활용한 그 관념들 대부분 그리고 심지어 효력 있는 표현들 중 일부분은, 이 일이 시작될 때 아직 살아있던 자들에 이르기까지, 개입된 그 세대들 동안에 걸쳐 지구에 살았던 여러 인종들의 사람들의 마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들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나 자신이 직접 이야기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정보를 수집하고 편집을 하는 자의 역할을 하였다. 나는 인간의 개념들과 관념들을 더 적극적으로 채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것들은 나로 하여금 예수의 일생에 대한 가장 효과있는 인물묘사를 창작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였으며, 그리고 그것은 가장 현저하게 유익하고 또 우주적으로 향상시키는 어법으로 표현된 예수의 비길 데 없는 가르침을, 다시 기록하도록 내게 자격을 갖추어 주었다. 유란시아에 있는 연합 중도자 형제단을 대신하여, 나는 이 세상에서의 예수의 일생에 대하여 우리가 다시 서술한 내용이 한층 더 정교해진, 이어지는 다음 장들에 활용되어왔던 기록과 개념에서의 모든 근원에, 우리가 빚지고 있음을 가장 감사하면서 깊이 인정한다.]
2025 121:8.14 내 동료 중도자 11명과 함께 일하면서, 기록에 남아 있는 멜기세덱의 감독 하에서, 효과적으로 배열하려는 내 생각대로, 즉시 표현한 선택에 따라서, 이 이야기를 엮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이용한 대다수의 관념과 효과적인 어떤 표현조차, 이 사업을 시작할 때 아직 살아 있었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중간에 존재한 여러 세대에 걸쳐 땅에서 살았던 여러 민족의 사람들 머리 속에서 기원을 가졌다. 여러 면에서, 나는 독창적인 이야기꾼이기보다 수집하고 편집하는 자로서 일했다. 나로 하여금 예수의 일생을 가장 효과적으로 묘사할 수 있게 만드는 생각과 개념, 그리고 가장 뛰어나게 유익하고 널리 사람을 숭고하게 만드는 표현을 써서, 견줄 데 없는 주의 가르침을 다시 진술하게 만드는, 될 수 있으면 인간다운 생각과 개념을 나는 서슴지 않고 이용했다. 유란시아 연합 중도자들을 대신하여, 땅에서 사신 예수의 일생을 다시 진술하는 자세한 글에서 다음에 이용된 모든 근원의 기록과 개념에 대하여 우리가 빚진 것을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認定)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