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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2000, 2025 유란시아 재단
번역: © 2001, 2007 Urantia Society of Greater New York
THE FAITH OF JESUS
제 196 편예수의 믿음
제196편: 예수의 신앙
제 196 편: 예수의 신앙
예수의 믿음
1955 196:0.1 JESUS enjoyed a sublime and wholehearted faith in God. He experienced the ordinary ups and downs of mortal existence, but he never religiously doubted the certainty of God’s watchcare and guidance. His faith was the outgrowth of the insight born of the activity of the divine presence, his indwelling Adjuster. His faith was neither traditional nor merely intellectual; it was wholly personal and purely spiritual.
2000 196:0.1 예수는 숭고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녔다. 필사 존재에서 생기는 평범한 부침(浮沈)을 겪었지만, 하나님이 확실히 보살피고 안내하심을 결코 종교적으로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신성한 존재, 그에게 깃든 조절자의 활동에서 생겨난 통찰력의 결과였다. 그의 믿음은 전통적이거나 단순히 지적 믿음이 아니었고, 온전히 개인적이고 순수한 영적 믿음이었다.
2001 CM 196:0.1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숭고하게 전심전력으로 믿는 신앙을 향유했다. 필사자 실존이 보통 겪는 오르내리는 체험을 했지만,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와 인도하심에 대해 종교적으로 의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수의 신앙은, 신성한 현존, 즉 내주하는 섭리사의 활동에서 생겨난 통찰력의 결과였다. 예수의 신앙은, 전통적인 것도, 단순히 지적인 것도 아니었으며;전적으로 개인적이고 순전히 영적이었다.
2007 URKA 196:0.1 예수는 하느님에 대하여 고귀하고 진심으로의 신앙을 향유(享有)하였다. 그는 필사 실존의 일반적인 부침(浮沈)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확실한 보호와 인도하심에 대해 신앙적으로 의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신앙은 신성한 현존, 내재(內在)하는 조절자의 활동으로 태어난 통찰력의 결과였다. 그의 신앙은 전통적인 것 또는 단지 지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적 그리고 순전히 영적인 것이었다.
2025 196:0.1 예수는 숭고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녔다. 필사 존재에서 생기는 평범한 부침(浮沈)을 겪었지만, 하나님이 확실히 보살피고 안내하심을 결코 종교적으로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신성한 존재, 그에게 깃든 조절자의 활동에서 생겨난 통찰력의 결과였다. 그의 믿음은 전통적이거나 단순히 지적인 믿음이 아니었고, 온전히 개인적이고 순수한 영적 믿음이었다.
1955 196:0.2 The human Jesus saw God as being holy, just, and great, as well as being true, beautiful, and good. All these attributes of divinity he focused in his mind as the “will of the Father in heaven.” Jesus’ God was at one and the same time “The Holy One of Israel” and “The living and loving Father in heaven.” The concept of God as a Father was not original with Jesus, but he exalted and elevated the idea into a sublime experience by achieving a new revelation of God and by proclaiming that every mortal creature is a child of this Father of love, a son of God.
2000 196:0.2 인간 예수는 하나님이 참되고 아름답고 선할 뿐 아니라, 거룩하고 공정(公正)하고 위대하다고 보았다. 신의 이 모든 속성을 머리 속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으로 한데 집중하였다. 예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요, 동시에 “하늘에 계신, 생명과 사랑의 아버지”였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개념을 예수가 창시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새로이 계시(啓示)함으로, 그리고 모든 필사 인간이 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식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함으로 그 생각을 숭고한 체험으로 높이고 들어올렸다.
2001 CM 196:0.2 인간 예수는 하나님을,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하신 분일뿐 아니라, 거룩하고 정확하고 위대하신 분으로 여겼다. 예수께서는 이런 모든 신성{神性}dml 속성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으로 마음 속에 깊이 간직했다. 예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인 동시에, “살아계시고 사랑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셨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개념을 예수가 창시하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을 새롭게 드러냄으로써, 또한 모든 필사 피조물이 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녀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관념을 숭고한 체험으로 강화시키고 격상시켰다.
2007 URKA 196:0.2 인간 예수는 하느님을 거룩하고 정의(正義)롭고 위대한 분일뿐만 아니라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한 분으로 보았다. 이러한 모든 신성의 속성들을 예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으로써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였다. 예수의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시며 동시에 “살아 계시며 사랑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일치하였다.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의 개념이 예수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성취하고 또한 모든 필사 창조체들이 이 사랑 넘치는 아버지의 자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함으로서, 이것을 숭고한 체험의 관념으로 고양시키고 높였다.
2025 196:0.2 인간 예수는 하나님이 참되고 아름답고 선할 뿐 아니라, 거룩하고 공정(公正)하고 위대하다고 보았다. 신의 이 모든 속성을 머리 속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으로 한데 집중하였다[1]. 예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요, 동시에 “하늘에 계신, 생명과 사랑의 아버지”였다
[2].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개념을 예수가 창시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새로이 계시(啓示)함으로, 그리고 모든 필사 인간이 이 사랑의 아버지의 자식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함으로 그 생각을 숭고한 체험으로 높이고 들어올렸다
[3][4].
1955 196:0.3 Jesus did not cling to faith in God as would a struggling soul at war with the universe and at death grips with a hostile and sinful world; he did not resort to faith merely as a consolation in the midst of difficulties or as a comfort in threatened despair; faith was not just an illusory compensation for the unpleasant realities and the sorrows of living. In the very face of all the natural difficulties and the temporal contradictions of mortal existence, he experienced the tranquillity of supreme and unquestioned trust in God and felt the tremendous thrill of living, by faith, in the very presence of the heavenly Father. And this triumphant faith was a living experience of actual spirit attainment. Jesus’ great contribution to the values of human experience was not that he revealed so many new ideas about the Father in heaven, but rather that he so magnificently and humanly demonstrated a new and higher type of living faith in God. Never on all the worlds of this universe, in the life of any one mortal, did God ever become such a living reality as in the human experience of Jesus of Nazareth.
2000 196:0.3 예수는 우주와 투쟁하느라고 허덕이는 사람, 적대하는 죄 많은 세상과 결사적으로 씨름하는 사람처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매달리지 않았다. 어려움의 한가운데서 단지 위안으로서, 또는 절망의 위협 속에서 위로로서 믿음에 의존하지 않았다. 믿음은 그저 불쾌한 현실과 생활의 슬픔을 보상(報償)해 주는 망상이 아니었다. 필사 존재에서 생기는 모든 자연스러운 곤경과 이 세상의 모순에 직면하여 최고로,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평안함을 맛보고, 하늘 아버지의 바로 그 계심 가운데서, 믿음으로 엄청난 생활의 기쁨을 느꼈다. 이 승리한 믿음은 실제로 영적으로 얻은 생생한 체험이었다. 인간적 체험의 가치에 예수가 크게 기여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하여 대단히 많은 새 관념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팔팔한 믿음, 새로운 상급 종류의 믿음을 아주 훌륭하게, 인간답게 보여준 것이다. 이 우주의 어떤 세상에서도, 어느 한 필사자의 일생에서, 나사렛 예수의 인간 체험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생생한 실체가 된 적이 없었다.
2001 CM 196:0.3 예수께서는, 마치 우주와 투쟁하느라 허덕이고, 적대하는 죄 많은 세상과 결사적으로 씨름하는 혼처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붙들지는 않았으며;신앙을 단순히 어려움 속에서 피난처로 삼거나 절망 속에서 안식처로 삼지 않았으며;신앙은 단지 불쾌한 현실 또는 삶의 슬픔을 보상해주는 착각이 아니었다. 필사자 실존이 당연히 겪는 모든 어려움과 일시적 모순에 직면해서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최상의 평안을 체험했고, 하늘 아버지의 바로 그 현존하심 속에서, 신앙으로 엄청난 삶의 짜릿함을 느꼈다. 그리고 승리를 거둔 이 신앙은, 실제 영 달성을 이룩한 생생한 체험이었다. 예수가 인간 체험의 가치에 가장 위대하게 공헌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하여 대단히 많은 새 관념을 보여준 것이라기보다, 새롭고 높은 유형의 하나님을 믿는 생생한 신앙을, 대단히 격조 높게 인간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 우주의 어느 세상에서든지 어떤 한 필사자 생애에서, 나사렛 예수의 인간 체험에서처럼, 하나님이 그토록 생생한 실체가 되신 적이 결코 없었다.
2007 URKA 196:0.3 예수는 분투하는 혼이 우주와의 전쟁에서 그리고 적의에 차고 죄로 가득 찬 세상과의 사생결투에서 하듯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신앙에 단지 어려움 속에서 위로로 위협받는 절망에서 위안으로 호소하지 않았다; 신앙은 단지 즐겁지 못한 현실이나 혹은 삶의 슬픔들을 위한 환상(幻相)적인 보상이 아니었다. 필사 실존의 자연적 어려움과 현세적인 모순들에 바로 직면하여, 그는 최극의 평온과 하느님에 대한 명백한 신뢰를 체험하였으며 그리고, 신앙으로 하늘에 아버지의 바로 그 현존 속에서 살아가는 엄청난 감격을 느꼈다. 그리고 이 승리한 신앙은 실재 영 달성의 살아있는 체험이었다. 인간 체험의 가치들에 예수의 커다란 공헌은 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하여 많은 새로운 관념들을 계시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새롭고 더 높은 유형의 하느님께 대한 살아있는 신앙을 장엄하게 그리고 인간적으로 실증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우주의 모든 세상들 어디에서, 어느 한 필사자의 일생 속에, 나사렛 예수의 인간 체험 속에서처럼 하느님이 그토록 살아있는 실체가 되신 적은 없었다.
2025 196:0.3 예수는 우주와 투쟁하느라고 허덕이는 사람, 적대하는 죄 많은 세상과 결사적으로 씨름하는 사람처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매달리지 않았다. 어려움의 한가운데서 단지 위안으로서, 또는 절망의 위협 속에서 위로를 얻고자 믿음에 의존하지 않았다. 믿음은 그저 불쾌한 현실과 생활의 슬픔을 보상(報償)해 주는 망상이 아니었다. 필사 존재에서 생기는 모든 자연스러운 곤경과 이 세상의 모순에 직면하여 최고로,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평안함을 맛보고, 하늘 아버지의 바로 그 계심 가운데서, 믿음으로 엄청난 생활의 기쁨을 느꼈다. 이 승리한 믿음은 실제로 영적으로 얻은 생생한 체험이었다. 인간적 체험의 가치에 예수가 크게 기여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관하여 대단히 많은 새 관념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팔팔한 믿음, 새로운 상급 종류의 믿음을 아주 훌륭하게, 인간답게 보여준 것이다. 이 우주의 어떤 세상에서도, 어느 한 필사자의 일생에서, 나사렛 예수의 인간적 체험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생생한 실체가 된 적이 없었다.
1955 196:0.4 In the Master’s life on Urantia, this and all other worlds of the local creation discover a new and higher type of religion, religion based on personal spiritual relations with the Universal Father and wholly validated by the supreme authority of genuine personal experience. This living faith of Jesus was more than an intellectual reflection, and it was not a mystic meditation.
2000 196:0.4 지역 우주의 이 세계와 어느 다른 세계에서도 유란시아에서 사신 주의 일생에서 새로운 상급의 종교를 발견하는데, 이것은 우주의 아버지와 개인적으로 영적 관계를 가지는 데 기초를 두고, 진정한 개인적 체험을 거친 최고의 권한으로 온전히 인정받은 종교이다. 예수의 이 살아 있는 믿음은 지적(知的) 숙고보다 더한 것이요, 신비스러운 명상이 아니었다.
2001 CM 196:0.4 지방 창조계에서 이 세상이나 어느 다른 세상에서든지, 예수의 유란시아 생애에서 새롭고 고귀한 유형의 종교를 발견하는데, 이 종교는 우주 아버지와 개인적으로 영적 관계를 갖는 데 기초를 두고, 순전히 몸소 체험한 최상의 권한으로 온전히 인정받은 종교다. 예수의 이 살아있는 신앙은 지적 되새김 이상이었고, 신비적 명상이 아니었다.
2007 URKA 196:0.4 주(主)의 유란시아 일생 속에서, 지역 창조의 이 세계와 다른 모든 세계들은 새롭고 더 높은 유형의 종교, 우주 아버지와의 개인적인 영적 관계에 근거하고, 순수한 개인적 체험의 최극 권위에 의해 전적으로 확인된 종교를 발견한다. 예수의 이 살아있는 신앙은 지적(知的)인 반영 이상이었으며, 그리고 신비한 명상이 아니었다.
2025 196:0.4 지역 우주의 이 세계와 어느 다른 세계에서도 유란시아에서 사신 주의 일생에서 새로운 상급 종교를 발견하는데, 이것은 우주의 아버지와 개인적으로 영적 관계를 가지는 데 기초를 두고, 진정한 개인적 체험을 거친 최고의 권한으로 온전히 인정받은 종교이다. 예수의 이 살아 있는 믿음은 지적(知的) 숙고보다 더한 것이요, 신비스러운 명상이 아니었다.
1955 196:0.5 Theology may fix, formulate, define, and dogmatize faith, but in the human life of Jesus faith was personal, living, original, spontaneous, and purely spiritual. This faith was not reverence for tradition nor a mere intellectual belief which he held as a sacred creed, but rather a sublime experience and a profound conviction which securely held him. His faith was so real and all-encompassing that it absolutely swept away any spiritual doubts and effectively destroyed every conflicting desire. Nothing was able to tear him away from the spiritual anchorage of this fervent, sublime, and undaunted faith. Even in the face of apparent defeat or in the throes of disappointment and threatening despair, he calmly stood in the divine presence free from fear and fully conscious of spiritual invincibility. Jesus enjoyed the invigorating assurance of the possession of unflinching faith, and in each of life’s trying situations he unfailingly exhibited an unquestioning loyalty to the Father’s will. And this superb faith was undaunted even by the cruel and crushing threat of an ignominious death.
2000 196:0.5 신학(神學)은 신앙을 고정시키고 형성하고 정의하고 교리로 만들지 모르지만, 예수의 인생에서 신앙은 개인적이고, 살아 있고, 독창성 있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순전히 영적 믿음이었다. 이 믿음은 전통을 존경하는 마음도, 신성한 신조로 지녔던 한낱 지적 관념도 아니었지만, 오히려 숭고한 체험이요 그를 단단히 붙든 깊은 확신이었다. 그의 믿음은 너무 참되고 모든 것을 포함했기 때문에, 어떤 영적 의심도 절대로 쓸어버리고, 어떤 상반되는 욕구도 효과적으로 없애버렸다. 아무것도 뜨겁고 숭고한 믿음, 기가 꺾이지 않는 이 믿음의 영적 정박지에서 그를 몰아낼 수 없었다. 명백한 패배를 당하거나 실망과 끔찍한 절망이 한창일 때도, 그는 전혀 두려움 없이, 영적 불굴(不屈)을 가득히 의식하면서 신이 계신 앞에서 차분하게 섰다. 예수는 확고한 믿음을 소유한다는 힘찬 확신을 지녔고, 인생의 벅찬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아버지의 뜻에 의심하지 않고 충성함을 어김없이 보였다. 더할 나위 없는 이 믿음은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잔인하고 정신을 짓밟는 위협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2001 CM 196:0.5 신학은 신앙을 고정시키거나 공식화하거나 정의하거나 교리화할 수 있어도, 인간의 삶에서 보여준 예수의 신앙은, 개인적이고, 생생하고, 독창적이고, 자발적이고, 순전히 영적이었다. 이 신앙은, 전통을 숭상하는 것도, 단지 신성시되는 신조{信條}로서 그가 붙잡았던 지적 믿음에 불과한 것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를 단단히 붙잡은 숭고한 체험이자 심오한 신념이었다. 예수의 신앙은 확실히 실제적이고 포괄적이어서, 모든 영적 의구심을 확실히 떨쳐버리게 했고, 모든 상반된 욕망을 부숴버렸다. 열렬하고 숭고하고 굽히지 않는 이 신앙의 영적 정박지{碇泊地}에서, 아무것도 그를 떼어 놓을 수 없었다. 명백한 패배에 직면하거나, 낙담과 끔찍한 절망의 진통을 겪을 때에도, 그는 전혀 두려움 없이 영적 불패{不敗}를 온전히 인식하면서 신의 임재 앞에 고요히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굳건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는 분명한 확신을 향유했고, 생활 속에서 고된 환경에 처할 때마다 항상 아버지 뜻에 대한 의심의 여지없는 충성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 놀라운 신앙은, 굴욕적으로 죽임 당할 것이라는, 잔인하게 짓밟는 위협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2007 URKA 196:0.5 신학은 신앙을 고정시키고, 정형화하고, 정의하고, 독단적으로 단정하겠지만, 그러나 예수의 인간 일생에서 신앙은 개인적이고, 살아있고, 근본적이고, 자발적이었으며, 순전히 영적이었다. 이 신앙은 전통에 대한 존경이 아니었고, 그가 경건한 신조로 가졌던 단순한 지적 믿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를 단단하게 붙잡은 숭고한 체험이자 심오한 신념이었다. 그의 신앙은 너무나 실제적이고 모든 것을-감싸 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영적 의심들도 절대적으로 날려버리고, 상충되는 모든 욕망을 실질적으로 파괴하였다. 아무 것도 이 열렬하고 숭고하며 확실한 신앙의 이 영적 정박지(碇泊地)로부터 그를 떼어놓을 수 없었다. 명백한 패배에 직면하거나 또는 실망과 위협적인 절망의 심한 고통 속에서조차도, 그는 두려움 없이 그리고 영적 불굴성(不屈性)을 충분히 의식하면서 신성한 현존 안에 차분하게 서 있었다. 예수는 위축되지 않는 신앙 소유의 활력을 불어넣는 확신을 향유하였으며, 그리고 일생의 시험적인 각각의 환경들에서 그는 아버지의 뜻에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 충성을,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장엄한 신앙은 치욕스러운 죽음의 압도하는 위협에까지도 꺾어지지 않았다.
2025 196:0.5 신학(神學)은 신앙을 고정시키고 형성하고 정의하고 교리로 만들지 모르지만, 예수의 인생에서 신앙은 개인적이고, 살아 있고, 독창성 있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순전히 영적 믿음이었다. 이 믿음은 전통을 존경하는 마음도, 신성한 신조로 지녔던 한낱 지적 관념도 아니었지만, 오히려 숭고한 체험이요 그를 단단히 붙든 깊은 확신이었다. 그의 믿음은 너무 참되고 모든 것을 포함했기 때문에, 어떤 영적 의심도 절대로 쓸어 버리고, 어떤 상반되는 욕구도 효과적으로 없애 버렸다. 아무것도 뜨겁고 숭고한 믿음, 기가 꺾이지 않는 이 믿음의 영적 정박지에서 그를 몰아낼 수 없었다. 명백한 패배를 당하거나 실망과 끔찍한 절망이 한창일 때도, 그는 전혀 두려움 없이, 영적 불굴(不屈)을 가득히 의식하면서 신이 계신 앞에서 차분히 섰다. 예수는 확고한 믿음을 소유한다는 힘찬 확신을 지녔고, 인생의 벅찬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아버지의 뜻에 의심하지 않고 충성함을 어김없이 보였다. 더할 나위 없는 이 믿음은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잔인하고 정신을 짓밟는 위협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1955 196:0.6 In a religious genius, strong spiritual faith so many times leads directly to disastrous fanaticism, to exaggeration of the religious ego, but it was not so with Jesus. He was not unfavorably affected in his practical life by his extraordinary faith and spirit attainment because this spiritual exaltation was a wholly unconscious and spontaneous soul expression of his personal experience with God.
2000 196:0.6 종교적 천재(天才)의 경우에, 강한 영적 믿음은 비참한 광신으로, 종교적 자부심의 과장으로 이끄는 일이 허다하지만, 예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실지 생활에서 그는 자신의 특별한 믿음과 영적 달성으로 인하여 불리한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영적 승진이 하나님과 친히 겪는 체험의 표현, 온전히 무의식이자 저절로 일어나는, 혼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2001 CM 196:0.6 종교적으로 비범한 자의 경우에, 강력한 영적 신앙이 파괴적 광신{狂信}으로, 즉 종교적 자부심을 과장하는 쪽으로 직접 이끄는 일이 허다하지만,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실생활에서 그는 자신의 특별한 신앙이나 영 달성으로 인한 불리한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 영적 희열은, 그가 하나님을 몸소 체험한 것에 대한 전혀 무의식적이고 자발적인, 혼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2007 URKA 196:0.6 종교의 특질에는, 강력한 영적 신앙은 너무나 많은 경우에 비참한 광신, 종교적 자기의 과장으로 직접 이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에게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이 영적 고양(高揚)은 하느님과 그의 개인적 체험의 전혀 무의식적이고 자연적인 혼의 표현이었기 때문에, 그는 실천적 일생에서, 그의 비범한 신앙이나 영 달성으로 인하여. 불리하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2025 196:0.6 종교적 천재(天才)의 경우에, 강한 영적 믿음은 비참한 광신으로, 종교적 자부심의 과장으로 이끄는 일이 허다하지만, 예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실지 생활에서 그는 자신의 특별한 믿음과 영적 달성으로 인하여 불리한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영적 승진이 하나님과 친히 겪는 체험의 표현, 온전히 무의식이자 저절로 일어나는, 혼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1955 196:0.7 The all-consuming and indomitable spiritual faith of Jesus never became fanatical, for it never attempted to run away with his well-balanced intellectual judgments concerning the proportional values of practical and commonplace social, economic, and moral life situations. The Son of Man was a splendidly unified human personality; he was a perfectly endowed divine being; he was also magnificently co-ordinated as a combined human and divine being functioning on earth as a single personality. Always did the Master co-ordinate the faith of the soul with the wisdom-appraisals of seasoned experience. Personal faith, spiritual hope, and moral devotion were always correlated in a matchless religious unity of harmonious association with the keen realization of the reality and sacredness of all human loyalties—personal honor, family love, religious obligation, social duty, and economic necessity.
2000 196:0.7 모든 것을 다 바치고 굽힐 줄 모르는 예수의 영적 믿음은 결코 광신이 되지 않았는데, 이 믿음이 실제적이고 보통 일어나는 사회ㆍ경제ㆍ도덕적 생활 상황의 조화된 가치에 대하여 공정한 지적 판단을 부인하려고 결코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눈부시게 조화된 인격이었다. 완전하게 갖춘 신다운 존재였다. 그는 또한 땅에서 하나의 인격으로서 활동하는 존재, 인간답고 신다운 하나의 통합된 존재로서, 훌륭하게 조정되었다. 주는 언제나 혼의 믿음을 성숙한 경험으로 얻은 지혜 및 평가와 조정했다. 인간적으로 충성하는 모든 일―개인의 명예, 가족 사랑, 종교적 의무, 사회적 임무, 경제적 필요―의 현실과 신성함을 날카롭게 깨닫는 것과 조화된 관계에서, 개인적 믿음, 영적 희망, 도덕적 헌신은 언제나 비할 데 없이 종교적으로 통일되어 서로 관련되었다.
2001 CM 196:0.7 온전히-다-바치고 굽힐 줄 모르는 예수의 영적 신앙은 결코 광신에 빠지지 않았는데, 그의 신앙은 실용적이고 평범한 사회적, 경제적, 및 도덕적 생활환경의 조화된 가치에 관한 잘-균형잡힌 지적 판단을, 한 번도 피해가려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눈부시게 통합된 인간 인격이었으며;완전하게 갖춘 신성한 존재였으며;또한 이 땅에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활동하는, 인간답고 신성한 통합된 존재로서 놀라울 정도로 조화를 이뤘다. 주님은, 혼에 속하는 신앙을, 노련한 체험으로 얻은 지혜로운-평가{評價}과 항상 조화시켰다. 모든 인간적 충실함--곧 개인의 명예, 가족의 사랑, 종교적 책무, 사회적 의무, 및 경제적 필요성--의 실체와 신성함을 예리하게 깨닫는 것과 조화롭게 어울린, 개인 신앙과 영적 희망과 도덕적 헌신은 비길 데 없이 종교적으로 통일되어 서로 연관됐다.
2007 URKA 196:0.7 예수의 온몸을-불태우고 그리고 불굴의 영적 신앙은 절대로 광신적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천적 그리고 평범한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도덕적 일생의 환경에서의 비례적인 가치에 대한 그의 잘-균형 잡힌 지적 판단들을 가지고 결코 벗어나려고 시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눈부시게 통합된 인간 개인성이었다; 그는 완전하게 자질로서 부여된 신성한 존재였다; 그는 또한 이 땅에서 단일 개인성으로 기능하는 병합된 인간으로서 그리고 신성한 존재로서 장엄하게 조화-협동되었다. 주(主)는 혼의 신앙과 성숙되는 체험의 지혜로운-평가를 항상 조화-협동시키셨다. 개인적 신앙과 영적 소망 그리고 도덕적 헌신은 항상, 실체에 대한 예리한 실현과 모든 인간적 충성들─개인적 명예, 가족적 사랑, 종교적 의무, 사회적 의무, 그리고 경제적 필요성─에서의 성스러움과의 조화로운 관계적-연합으로 이루어지는 비할 데 없는 종교적 합일 안에 상관되어 있다.
2025 196:0.7 모든 것을 다 바치고 굽힐 줄 모르는 예수의 영적 믿음은 결코 광신이 되지 않았는데, 이 믿음이 실제적이고 보통 일어나는 사회ㆍ경제ㆍ도덕적 생활 상황의 조화된 가치에 대하여 공정한 지적 판단을 부인하려고 결코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눈부시게 조화된 인격이었다. 완전하게 갖춘 신다운 존재였다. 그는 또한 땅에서 하나의 인격으로서 활동하는 존재, 인간답고 신다운 하나의 통합된 존재로서, 훌륭하게 조정되었다. 주는 언제나 혼의 믿음을 성숙한 경험으로 얻은 지혜 및 평가와 조정했다. 인간적으로 충성하는 모든 일 ― 개인의 명예, 가족 사랑, 종교적 의무, 사회적 임무, 경제적 필요 ― 의 현실과 신성함을 날카롭게 깨닫는 것과 조화된 관계에서, 개인적 믿음, 영적 희망, 도덕적 헌신은 언제나 비할 데 없이 종교적으로 통일되어 서로 관련되었다.
1955 196:0.8 The faith of Jesus visualized all spirit values as being found in the kingdom of God; therefore he said, “Seek first the kingdom of heaven.” Jesus saw in the advanced and ideal fellowship of the kingdom the achievement and fulfillment of the “will of God.” The very heart of the prayer which he taught his disciples was,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Having thus conceived of the kingdom as comprising the will of God, he devoted himself to the cause of its realization with amazing self-forgetfulness and unbounded enthusiasm. But in all his intense mission and throughout his extraordinary life there never appeared the fury of the fanatic nor the superficial frothiness of the religious egotist.
2000 196:0.8 예수의 믿음은 모든 영적 가치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발견된다고 상상했고, 따라서 “먼저 하늘나라를 찾으라”고 하였다. 예수는 진보된 이상적 하늘나라 친교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완성되는 것을 보았다.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의 바로 그 핵심은 이것이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그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처럼 하늘나라가 하나님의 뜻을 구성한다고 상상했기 때문에, 놀랍게 자기를 잊고 한없는 열심으로 이를 실현하는 운동에 몸을 바쳤다. 하지만 열심히 일했던 어떤 임무에도, 그리고 특별한 그의 일생 전체를 통해서, 광신자의 격분이나 자기 본위 종교인의 피상적 천박성이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2001 CM 196:0.8 예수의 신앙은, 하나님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영 가치관을 보여줬으며;따라서 그는, “먼저 하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했다. 예수께서는, 천국의 진보되고 이상적인 친교에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고 충족되는 것을 봤다.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의 최고 핵심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고 당신의 뜻이 이뤄지소서”였다. 예수께서는, 천국이 하나님 뜻에 합당하다고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놀랄만한 자기-망각과 끝없는 의욕으로 이를 실현하는 데 자신을 바쳤다. 그러나 열렬히 감당한 모든 사명에서, 그리고 이례적인 그의 생애 내내, 광신자의 격렬함이나 종교적으로 강한 자부심을 지닌 자의 피상적 천박함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2007 URKA 196:0.8 예수의 신앙은 모든 영적 가치들을 하느님의 왕국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그렇게 눈에 보여주었다; 따라서 그는 “너희는 먼저 하늘의 왕국을 찾으라.”고 말씀하였다. 예수는 발전되고 이상적인 왕국의 동료관계로 “하느님의 뜻”의 성취와 달성을 보았다.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의 가장 핵심은 “당신의 왕국이 임하시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이었다. 이와 같이 왕국이 하느님의 뜻을 포함하는 것임을 이해하면서, 그는 그것의 실현에 원인이 되도록, 놀랄만한 자아-잊어버림과 끝없는 열정으로 자신을 헌신하셨다. 그러나 모든 그의 극심한 임무와 그리고 그의 특별한 일생을 통하여 광신자들의 격분이나 종교적 이기주의자들의 피상적인 공허가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2025 196:0.8 예수의 믿음은 모든 영적 가치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발견된다고 상상했고, 따라서 “먼저 하늘나라를 찾으라”고 하였다[5]. 예수는 진보된 이상적 하늘나라 친교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완성되는 것을 보았다
[6].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의 바로 그 핵심은 이것이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그 뜻이 이루어지이다
[7].” 이처럼 하늘나라가 하나님의 뜻을 구성한다고 상상했기 때문에, 놀랍게 자기를 잊고 한없는 열심으로 이를 실현하는 운동에 몸을 바쳤다. 하지만 열심히 일했던 어떤 임무에도, 그리고 특별한 그의 일생 전체를 통해서, 광신자의 격분이나 자기 본위 종교인의 피상적 천박성이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1955 196:0.9 The Master’s entire life was consistently conditioned by this living faith, this sublime religious experience. This spiritual attitude wholly dominated his thinking and feeling, his believing and praying, his teaching and preaching. This personal faith of a son in the certainty and security of the guidance and protection of the heavenly Father imparted to his unique life a profound endowment of spiritual reality. And yet, despite this very deep consciousness of close relationship with divinity, this Galilean, God’s Galilean, when addressed as Good Teacher, instantly replied, “Why do you call me good?” When we stand confronted by such splendid self-forgetfulness, we begin to understand how the Universal Father found it possible so fully to manifest himself to him and reveal himself through him to the mortals of the realms.
2000 196:0.9 주의 일생 전부가 이 살아 있는 믿음, 이 숭고한 종교적 체험으로 인하여 한결같이 조절되었다. 이 영적 태도가 완전히 그의 생각과 느낌, 믿음과 기도, 가르침과 설교를 지배했다. 한 아들이 하늘 아버지의 안내와 보호가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믿는 이 개인적 믿음은 그의 독특한 인생에 영적 실체의 심오한 자질을 부어주었다. 그래도, 신과 가까운 관계를 이렇게 아주 깊이 의식했는데도, 이 갈릴리 사람, 하나님의 갈릴리 사람은, 누가 그를 “선한 선생”이라 일컬었을 때, 그 순간에 대답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자아를 잊어버리는 그러한 눈부신 태도를 구경할 때, 어떻게 우주의 아버지가 자신을 그에게 충만히 나타내고, 그를 통해서 자신을 그 영역의 필사자들에게 드러낼 수 있었는가 우리는 비로소 이해한다.
2001 CM 196:0.9 주님의 생애 전체는, 살아있는 이 신앙, 숭고한 이 종교 체험으로 인해 한결같이 조절됐다. 이 영적 태도가, 그의 생각과 기분, 믿음과 기도, 가르침과 설교를 전적으로 지배했다. 하늘 아버지의 인도와 보호가 확실하고 안전하다고 믿는, 한 아들의 이런 개인 신앙이, 영적 실체라는 심오한 천부재능을 그의 독특한 생애에 부여했다. 그렇지만 이 갈릴리인 곧 하나님의 갈릴리인은 신성과 밀접한 관계를 아주 깊이 의식하면서도, 자신이 선한 선생님이라고 일컬음 받았을 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일컫느냐?”라고 바로 응답했다. 그런 굉장한 자기-망각을 대할 때, 예수 안에서 우주 아버지가 어떻게 그토록 온전히 자신을 나타내셨고, 또한 그를 통해서 이 영역의 필사자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지를, 우리는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2007 URKA 196:0.9 주(主)의 일생 전체는 한결같이 이 살아있는 신앙, 이 숭고한 종교적 체험에 의해 조절되었다. 이 영적 태도는 그의 사고와 느낌, 그의 믿음과 기도, 그의 가르침과 설교들을 전적으로 지배하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인도와 보호의 확신과 보장에 대한 아들의 이 개인적 신앙은 그의 독특한 일생에 영적 실체의 심오한 자질을 주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신성과 가까운 관계의 이 깊은 의식에도 불구하고, 이 갈릴리인, 하느님의 갈릴리인은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렸을 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일컫느냐?”라고 바로 응답하였다. 우리가 그처럼 찬란한 자아-잊어버림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떻게 우주 아버지가 그에게 자신을 그렇게 충분히 현시하고 그리고 그를 통하여 영역들의 필사자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는지 납득하기 시작한다.
2025 196:0.9 주의 일생 전부가 이 살아 있는 믿음, 이 숭고한 종교적 체험으로 인하여 한결같이 조절되었다. 이 영적 태도가 완전히 그의 생각과 느낌, 믿음과 기도, 가르침과 설교를 지배했다. 한 아들이 하늘 아버지의 안내와 보호가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믿는 이 개인적 믿음은 그의 독특한 인생에 영적 실체의 심오한 자질을 부어주었다. 그래도, 신과 가까운 관계를 이렇게 아주 깊이 의식했는데도, 이 갈릴리 사람, 하나님의 갈릴리 사람은, 누가 그를 “선한 선생”이라 일컬었을 때, 그 순간에 대답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자아를 잊어버리는 그러한 눈부신 태도를 구경할 때, 어떻게 우주의 아버지가 자신을 그에게 충만히 나타내고, 그를 통해서 자신을 그 영역의 필사자들에게 드러낼 수 있었는가 우리는 비로소 이해한다[8].
1955 196:0.10 Jesus brought to God, as a man of the realm, the greatest of all offerings: the consecration and dedication of his own will to the majestic service of doing the divine will. Jesus always and consistently interpreted religion wholly in terms of the Father’s will. When you study the career of the Master, as concerns prayer or any other feature of the religious life, look not so much for what he taught as for what he did. Jesus never prayed as a religious duty. To him prayer was a sincere expression of spiritual attitude, a declaration of soul loyalty, a recital of personal devotion, an expression of thanksgiving, an avoidance of emotional tension, a prevention of conflict, an exaltation of intellection, an ennoblement of desire, a vindication of moral decision, an enrichment of thought, an invigoration of higher inclinations, a consecration of impulse, a clarification of viewpoint, a declaration of faith, a transcendental surrender of will, a sublime assertion of confidence, a revelation of courage, the proclamation of discovery, a confession of supreme devotion, the validation of consecration, a technique for the adjustment of difficulties, and the mighty mobilization of the combined soul powers to withstand all human tendencies toward selfishness, evil, and sin. He lived just such a life of prayerful consecration to the doing of his Father’s will and ended his life triumphantly with just such a prayer. The secret of his unparalleled religious life was this consciousness of the presence of God; and he attained it by intelligent prayer and sincere worship—unbroken communion with God—and not by leadings, voices, visions, or extraordinary religious practices.
2000 196:0.10 예수는 그 영역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모든 헌물 가운데 가장 큰 것을 가져왔으니, 즉 신(神)의 뜻을 행하는 훌륭한 봉사에 자신의 뜻을 거룩히 드리고 바친 것이다. 예수는 언제나, 한결같이,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견지에서 종교를 풀이했다. 기도나 종교 생활에서 어떤 다른 모습에 관하여 주의 생애를 연구할 때,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가가 아니라 무슨 일을 했는가 보라. 그에게 기도(祈禱)는 영적 태도의 성실한 표현이요, 혼의 충성 선언, 개인적 헌신의 낭독, 감사의 표시, 긴장된 감정의 방지이다. 갈등의 예방이요, 지적 사고(思考)의 승화요, 소망을 고귀하게 만들고, 도덕적 결심을 확신하고, 값진 생각을 하며, 상급 성향에 활력을 붓고, 충동을 거룩히 바치는 것이다. 관점의 해명이요, 믿음의 선언, 의지의 초월적 항복, 확신의 숭고한 주장, 용기의 전시, 발견의 선언이요, 최고의 헌신을 고백하는 것이다. 거룩히 헌신함을 확인하는 것, 어려움을 조정하는 기법이요, 이기심ㆍ악ㆍ죄를 향한 인간의 모든 성향을 물리치려고 혼의 통합된 능력을 힘차게 동원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헌신적으로 거룩히 바친 바로 그러한 인생을 살았고, 바로 그러한 기도로 일생을 승리로 마쳤다. 견줄 데 없는 그의 종교 생활의 비결은 하나님의 계심을 이렇게 의식하는 것이었다. 계몽이나 목소리나 환상이나 특별한 종교적 버릇이 아니라, 총명한 기도와 성실한 예배로―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함으로―그 비결을 얻었다.
2001 CM 196:0.10 예수께서는 이 영역의 한 사람으로서 가장 큰 예물을 하나님께 바쳤는데:신의 뜻을 수행하는 장엄한 봉사에 자기 뜻을 성별{聖別}하여 봉헌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항상 일관되게, 전적으로 아버지 뜻에 의거하여 종교를 해석했다. 너희가 종교 생활 중에 기도 또는 다른 어떤 면이든지 고려하면서 예수의 생애를 연구할 때, 그가 가르쳤던 것보다는, 그가 행했던 것을 더 눈여겨봐야한다. 예수께서는 종교적 의무라서 기도한 적이 결코 없었다. 그에게 기도란, 영적 태도를 진지하게 표현함, 혼이 충성하겠다는 선언, 개인적 헌신을 설명함, 감사의 표현, 감정적 긴장 상태의 피난처, 갈등에 대한 예방, 지적{知的} 작용에 대한 찬미, 욕구를 고상하게 바꾸는 것, 도덕적 결정을 변호하는 것, 사고{思考}를 풍성하게 하는 것, 높은 차원의 성향으로 이끄는 것, 자극을 정화시키는 것, 관점을 순수하게 해주는 것, 신앙의 선언, 의지의 초월적 복종, 확신에 대한 최고의 표현, 용기를 드러냄, 발견했다는 선포, 최상의 헌신을 고백함, 성별{聖別}의 정당성, 어려움에 대처하는 기법이었으며, 이기심과 악과 죄를 향해 달려가는 모든 인간 성향을 물리치려고, 통합된 혼의 능력을 강력하게 동원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 뜻을 행하려고 기도드리면서 헌신하는 바로 그런 생애를 살았고, 바로 그런 기도와 함께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마쳤다. 어디에도 비교될 수 없는 그의 종교적 생애의 비결은, 하나님 현존을 자각함에 있었으며;그는 그 비결을, 통솔력이나 음성이나 선견{先見} 또는 특별한 종교 습관이 아니라, 지성적인 기도와 진지한 경배로--곧 하나님과 중단 없이 교통함으로-- 달성했다.
2007 URKA 196:0.10 예수는 그 영역의 사람으로서 모든 헌물 중에서 가장 큰 것; 신성한 뜻을 행하는 장엄한 봉사에, 자신의 뜻을 헌납하고 봉헌하는 것, 바로 그것을 하느님에게 가져다 드렸다. 예수는 언제나 일관되게 종교를 전적으로 아버지의 의지라는 의미에서 해석하였다. 주(主)의 생애를 공부할 때, 기도나 혹은 종교적 생활의 다른 면들에 관하여, 그가 무엇을 가르쳤나를 보기보다는, 그가 무엇을 행하였나를 바라보라. 예수는 종교적 의무로서 기도를 한 적이 결코 없었다. 그에게 기도는 영적 태도의 진지한 표현, 혼의 충성에 대한 선언. 개인적 헌신에 대한 낭송, 감사의 표현, 감정적 긴장의 방지, 갈등의 예방, 지능의 고양(高揚), 욕망을 고귀하게 만듦, 도덕적 결정의 입증, 생각의 풍성함, 더욱 높은 성향의 활력화, 충동의 봉헌, 관점들의 명백함, 신앙의 선언, 의지의 초월적 양도, 자신감의 숭고한 단언, 용기의 계시, 발견의 선언, 최극 헌신의 고백, 봉헌의 당위성, 어려움에서의 조절기법, 그리고 이기심, 악, 죄를 향해 달려가는 인간 성향을 물리치려는 병합된 혼의 힘들의 힘찬 동원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서, 기도하며 헌신하는 바로 그러한 일생을 사셨으며, 그러한 기도와 함께 자신의 일생을 승리로 마치셨다. 그의 비교될 수없는 종교적 일생의 비밀은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이 의식(意識) 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지능적 기도와 진지한 경배─하느님과의 긴밀한 교제─에 의하여 얻었으며 인도됨이나, 음성이나, 상상력 또는 비범한 종교적 실천 관행에 의해 얻으신 것이 아니었다.
2025 196:0.10 예수는 그 영역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모든 헌물 가운데 가장 큰 것을 가져왔으니, 즉 신(神)의 뜻을 행하는 훌륭한 봉사에 자신의 뜻을 거룩하게 만들고 바친 것이다. 예수는 언제나, 한결같이,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견지에서 종교를 풀이했다[9]. 기도나 종교 생활에서 어떤 다른 모습에 관하여 주의 생애를 연구할 때,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가가 아니라 무슨 일을 했는가 보라. 그에게 기도(祈禱)는 영적 태도의 성실한 표현이요, 혼의 충성 선언, 개인적 헌신의 낭독, 감사의 표시, 긴장된 감정의 방지이다. 갈등의 예방이요, 지적 사고(思考)의 승화요, 소망을 고귀하게 만들고, 도덕적 결심을 확신하고, 값진 생각을 하며, 상급 성향에 활력을 붓고, 충동을 거룩히 바치는 것이다. 관점의 해명이요, 믿음의 선언, 의지의 초월적 항복, 확신의 숭고한 주장, 용기의 전시, 발견의 선언이요, 최고의 헌신의 고백이다. 거룩히 헌신함을 확인하는 것, 어려움을 조정하는 기법이요, 이기심ㆍ악ㆍ죄를 향한 인간의 모든 성향을 물리치려고 혼의 통합된 능력을 힘차게 동원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헌신적으로 거룩히 바친 바로 그러한 인생을 살았고, 바로 그러한 기도로 일생을 승리로 마쳤다. 견줄 데 없는 그의 종교 생활의 비결은 하나님의 계심을 이렇게 의식하는 것이었다. 계몽이나 목소리나 환상이나 특별한 종교적 버릇이 아니라, 총명한 기도와 성실한 예배로 ―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함으로 ― 그 비결을 얻었다.
1955 196:0.11 In the earthly life of Jesus, religion was a living experience, a direct and personal movement from spiritual reverence to practical righteousness. The faith of Jesus bore the transcendent fruits of the divine spirit. His faith was not immature and credulous like that of a child, but in many ways it did resemble the unsuspecting trust of the child mind. Jesus trusted God much as the child trusts a parent. He had a profound confidence in the universe—just such a trust as the child has in its parental environment. Jesus’ wholehearted faith in the fundamental goodness of the universe very much resembled the child’s trust in the security of its earthly surroundings. He depended on the heavenly Father as a child leans upon its earthly parent, and his fervent faith never for one moment doubted the certainty of the heavenly Father’s overcare. He was not disturbed seriously by fears, doubts, and skepticism. Unbelief did not inhibit the free and original expression of his life. He combined the stalwart and intelligent courage of a full-grown man with the sincere and trusting optimism of a believing child. His faith grew to such heights of trust that it was devoid of fear.
2000 196:0.11 땅에서 사신 예수의 일생에서 종교는 생생한 체험, 즉 영적인 것의 존중을 비롯하여 올바름을 실행하기까지, 직접 몸소 행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믿음은 신성한 영의 열매, 초월적 열매를 맺었다. 그 믿음은 어린아이의 믿음처럼 미숙하고 쉽사리 믿는 태도가 아니라, 여러 면에서 어린아이의 생각처럼 의심하지 않는 믿음과 비슷하였다. 아이가 부모를 믿는 것과 비슷하게 예수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우주를 깊이 신뢰했다―어린아이가 부모의 환경을 믿는 것 같이, 바로 그렇게 믿었다. 우주가 근본적으로 선함을 예수가 진심으로 믿은 것은 어린아이가 지상의 환경이 안전함을 믿는 것과 대단히 비슷하였다. 어린아이가 땅에 있는 부모에게 기대듯 하늘 아버지를 의지하였고, 뜨거운 믿음은 결코 하늘 아버지가 확실히 보살핌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두려움이나 의심이나 회의(懷疑)에 심각하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불신(不信)이 그의 일생에서 자유로운 독창적 표현을 막지는 않았다. 성장한 어른의 굳건하고 총명한 용기, 그리고 의지하는 어린아이의 성실하고 신뢰하는 낙관, 이 두 가지를 가졌다. 그의 믿음은 전혀 두려움 없는 그러한 신뢰의 높이까지 다다랐다.
2001 CM 196:0.11 예수의 이 세상 생애에서 종교는, 생생한 체험 곧 영적 경외심에서 실천적 정의{正義}에 이르기까지 직접 몸소 행동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신앙은 신성한 영의 초월적 열매를 맺었다. 그의 신앙은, 아이들의 신앙처럼 미숙하거나 경솔한 것이 아니라, 의심하지 않고 신임하는 어린아이의 마음과 여러 면에서 비슷했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듯이 하나님을 신뢰했다. 그는 우주를 확고하게 신임했다--부모가 제공하는 환경을 어린아이가 신뢰하듯이 신뢰했다. 우주가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예수의 진정한 신앙은, 땅 위의 주변상황이 안전하다고 믿는 어린아이의 신뢰와 대단히 흡사했다. 어린아이가 이 세상 부모에게 의지하듯이 하늘 아버지께 의존했고, 그의 열렬한 신앙은 하늘 아버지의 온갖-보살피심이 확실하다는 것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두려움이나 의심이나 회의{懷疑}로 인해 심하게 동요되지 않았다. 불신 때문에 자신의 삶에 대한 자유롭고 독창적인 표현을 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는 다-자란 성인의 건장하고 지성적인 용기와, 잘 믿는 아이의 진지하고 확신에 찬 낙천성을 겸비했다. 그의 신앙은 두려움 없는 신뢰의 경지까지 발전했다.
2007 URKA 196:0.11 예수의 지상 일생 안에서 종교는 살아있는 체험, 영적 존경으로부터 실천적인 정의를 향한 직접적이고 개인적 활동이었다. 예수의 신앙은 신성한 영의 초월적 열매들을 맺었다. 그의 신앙은 아이들의 것과 같이 미숙하거나 경솔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면에서 어린이 마음의 의심하지 않는 신뢰와 비슷하였다. 예수는 어린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는 만큼이나 하느님을 신뢰하였다. 예수는 우주에 대한 심오한 자신감을 가졌다─어린아이가 자신의 부모의 환경을 신뢰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우주의 근본적인 선에 대한 예수의 전심어린 신앙은 지구 환경의 안전성에 대해 어린아이의 신뢰와 매우 흡사하였다. 그는 어린아이가 그들의 땅에서의 부모에게 의지하듯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의지하였다, 그리고 그의 열렬한 신앙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지나친 보호에 대한 확실성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두려움과 의심 그리고 회의(懷疑)로 인하여 심각하게 방해를 받지는 않았다. 불신이 그의 일생의 자유롭고 근본적인 표현을 가로막지 못하였다. 그는 다 자란 어른의 건장하고 지적인 용기를 믿는 아이의 진지하고 확신에 찬 낙천성과 병합하였다. 그의 신앙은 두려움이 없는 신뢰의 절정으로 자랐다.
2025 196:0.11 땅에서 사신 예수의 일생에서 종교는 생생한 체험, 즉 영적인 것의 존중을 비롯하여 올바름을 실행하기까지, 직접 몸소 행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믿음은 신성한 영의 열매, 초월적 열매를 맺었다. 그 믿음은 어린아이의 믿음처럼 미숙하고 쉽사리 믿는 태도가 아니라, 여러 면에서 어린아이의 생각처럼 의심하지 않는 믿음과 비슷하였다[10]. 아이가 부모를 믿는 것과 비슷하게 예수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우주를 깊이 신뢰했다 ― 어린아이가 부모의 환경을 믿는 것 같이, 바로 그렇게 믿었다. 우주가 근본적으로 선함을 예수가 진심으로 믿은 것은 어린아이가 지상의 환경이 안전함을 믿는 것과 대단히 비슷하였다. 어린아이가 땅에 있는 부모에게 기대듯 하늘 아버지를 의지하였고, 뜨거운 믿음은 결코 하늘 아버지가 확실히 보살핌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두려움이나 의심이나 회의(懷疑)에 심각하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불신(不信)이 그의 일생에서 자유로운 독창적 표현을 막지 않았다. 성장한 어른의 굳건하고 총명한 용기, 그리고 의지하는 어린아이의 성실하고 신뢰하는 낙관, 이 두 가지를 가졌다. 그의 믿음은 전혀 두려움 없는 그러한 신뢰의 높이까지 다다랐다.
1955 196:0.12 The faith of Jesus attained the purity of a child’s trust. His faith was so absolute and undoubting that it responded to the charm of the contact of fellow beings and to the wonders of the universe. His sense of dependence on the divine was so complete and so confident that it yielded the joy and the assurance of absolute personal security. There was no hesitating pretense in his religious experience. In this giant intellect of the full-grown man the faith of the child reigned supreme in all matters relating to the religious consciousness. It is not strange that he once said, “Except you become as a little child, you shall not enter the kingdom.” Notwithstanding that Jesus’ faith was childlike, it was in no sense childish.
2000 196:0.12 예수의 믿음은 어린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는 것과 같이 순수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절대로 의심없이 믿었고, 그래서 그 믿음은 동료 존재들과 접촉하는 매력에, 그리고 우주의 경이에 반응했다. 신다운 것에 기대는 감각이 아주 완벽하고 대단히 자신이 넘쳐서, 자기가 절대로 안전하다는 기쁨과 확신을 낳았다. 그의 종교적 체험에는 망설이는 겉치레가 전혀 없었다. 성장한 어른의 이 위대한 지능 속에서 어린아이의 믿음이 종교적 의식(意識)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를 최고로 다스렸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서 너희는 하늘나라로 들어가지 못할지니라”하고 한때 말한 것은 당연하다. 예수의 믿음이 어린아이 같기는 했어도, 어떤 의미에서도 유치하지는 않았다.
2001 CM 196:0.12 예수의 신앙은, 어린아이가 신뢰하는 것 같은 순결함에 도달했다. 그의 신앙은 대단히 순전하고 확실해서, 동료 존재들과 접촉하는 매력에 그리고 우주의 경이로움에 반응했다. 신성한 세계에 대한 그의 신뢰감은 아주 철저하고 무척 확신에 찼으므로, 자신이 절대로 안전할 것을 기뻐하고 안심했다. 그는 종교 체험에서 머뭇거리면서 핑계를 댄 적이 없었다. 다-자란 어른의 이런 엄청난 지능 속에서, 종교적 의식{意識}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에 어린아이의 신앙이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므로 언젠가, “너희가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한 것은 이상하지 않다. 예수의 신앙은 어린아이같았음에도, 어떤 점에서도 유치하지 않았다.
2007 URKA 196:0.12 예수의 신앙은 어린아이의 신뢰의 순수성을 가졌다. 그의 신앙은 그렇게 절대적이고 의심이 없어서 다른 동료 존재들과의 만남에 대한 매력과 우주의 경이로움들에 반응하였다. 신성한 것에 대한 그의 신뢰감은 그렇게 완벽하고 그렇게 자신하였음으로 그것은 절대적 개인적 안전에 대한 기쁨과 확신을 가져왔다. 그는 종교적 체험에서 주저하는 변명이 없었다. 충분히-자란 사람의 이 위대한 지성에서는 어린아이의 신앙이 종교적 인식에 관계되는 모든 일에서 최극을 지배하였다. 그가 언젠가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너희는 왕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예수의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뜻으로도 어린아이다운 것이 아니다.
2025 196:0.12 예수의 믿음은 어린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는 것과 같이 순수한 경지에 이르렀다[11]. 그는 절대로 의심 없이 믿었고, 그래서 그 믿음은 동료 존재들과 접촉하는 매력에, 그리고 우주의 경이에 반응했다. 신다운 것에 기대는 감각이 아주 완벽하고 대단히 자신이 넘쳐서, 자기가 절대로 안전하다는 기쁨과 확신을 낳았다. 그의 종교적 체험에는 망설이는 겉치레가 전혀 없었다. 성장한 어른의 이 위대한 지능 속에서 어린아이의 믿음이 종교적 의식(意識)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를 최고로 다스렸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서 너희는 하늘나라로 들어가지 못할지니라”하고 한때 말한 것은 당연하다. 예수의 믿음이 어린아이 같기는 했어도, 어떤 의미에서도 유치하지는 않았다.
1955 196:0.13 Jesus does not require his disciples to believe in him but rather to believe with him, believe in the reality of the love of God and in full confidence accept the security of the assurance of sonship with the heavenly Father. The Master desires that all his followers should fully share his transcendent faith. Jesus most touchingly challenged his followers, not only to believe what he believed, but also to believe as he believed. This is the full significance of his one supreme requirement, “Follow me.”
2000 196:0.13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를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함께 믿으라, 하나님의 사랑이 현실인 것을 믿고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보장이 확실한 것을 완전히 믿고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주는 모든 추종자가 그의 초월적 믿음을 충분히 함께 가지기를 바란다. 그가 믿은 것을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가 믿은 것처럼 믿으라고, 예수는 대단히 감동스럽게 추종자들을 자극했다. 이것이 “나를 따르라”하는 한 가지 최상의 요구 조건의 온전한 의미이다.
2001 CM 196:0.13 예수께서는 자기를 믿으라고 요구하기보다 자기와 함께 믿으라고, 즉 사랑의 하나님이 실존하심을 믿고, 하늘 아버지의 아들신분을 보장하는 담보물을 온전한 확신으로 받아들이라고, 제자들에게 요구했다. 주님은 따르는 자들 전체가, 그의 초월적 신앙을 온전히 나눠 갖기를 바랐다. 그가 믿었던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가 믿었던 것처럼 믿으라고, 예수께서는 따르는 자들에게 아주 진지하게 부탁했다. 이것이 바로 “나를 따르라”는 그의 유일한 최고 요구사항의 온전한 의미다.
2007 URKA 196:0.13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함께 믿으라고, 하느님 사랑의 실체를 믿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관계에 대한 확신의 보장을 충만한 자신감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였다. 주(主)는 모든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초월적 신앙을 충분히 나누어 가지기를 바라셨다. 예수는 자신이 믿었던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가 믿었던 것처럼 믿으라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가장 비장하게 촉진하였다. 이것이 바로 “나를 따르라”라는 그의 한 가지 최극 요구의 충만한 의의(意義)이다.
1955 196:0.14 Jesus’ earthly life was devoted to one great purpose—doing the Father’s will, living the human life religiously and by faith. The faith of Jesus was trusting, like that of a child, but it was wholly free from presumption. He made robust and manly decisions, courageously faced manifold disappointments, resolutely surmounted extraordinary difficulties, and unflinchingly confronted the stern requirements of duty. It required a strong will and an unfailing confidence to believe what Jesus believed and as he believed.
2000 196:0.14 땅에서 예수의 일생은 한 가지 큰 목적에 바쳤다―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종교적으로 그리고 신앙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예수의 믿음은 어린아이의 믿음처럼 의지했지만, 전혀 주제넘지 않았다. 그는 건전하고 당당한 결정을 내리고, 다양한 실망을 용감히 겪고, 특별한 어려움을 굳게 이겨냈으며, 의무의 엄격한 요구 조건을 주춤하지 않고 따랐다. 예수가 믿은 것을 믿고 그가 믿은 것처럼 믿는 데는 힘찬 의지와 틀림없는 확신이 필요했다.
2001 CM 196:0.14 예수는 이 세상 생애를 한 가지 목적에 바쳤다--아버지 뜻을 행하는 것, 즉 인간 생애를 종교적으로 그리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예수의 신앙은 어린아이가 신뢰하듯이 신뢰하는 것이었지만, 대강 어림짐작으로 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확고하고 용감하게 결정을 내렸고, 수많은 좌절에 용기 있게 대처했고, 이례적인 어려움을 용감히 극복했고, 엄격하게 요구된 의무에 단호하게 직면했다. 예수께서 믿었던 것을 믿고, 또한 그가 믿었듯이 믿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와 틀림없는 확신이 요구된다.
2007 URKA 196:0.14 예수의 지상 일생은 단 한 가지의 목적─아버지의 뜻을 행함, 인간의 일생을 종교적으로 그리고 신앙으로 삶─에 바쳐졌다. 예수의 신앙은 믿는 것이었다,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이,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가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강건하고 남자다운 결정을 내렸다, 수많은 실망들에 용감하게 대처하였고, 엄청난 어려움들을 단호히 극복하였으며, 의무의 엄격한 요구들에 망설임 없이 직면하였다. 예수가 믿었던 것을 믿고 그리고 그가 믿은 대로 믿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와 끊임없는 자신감이 요구되었다.
1. JESUS—THE MAN
1. 인간 예수
1. 예수--사람
1. 예수─사람
1. 인간 예수
1955 196:1.1 Jesus’ devotion to the Father’s will and the service of man was even more than mortal decision and human determination; it was a wholehearted consecration of himself to such an unreserved bestowal of love. No matter how great the fact of the sovereignty of Michael, you must not take the human Jesus away from men. The Master has ascended on high as a man, as well as God; he belongs to men; men belong to him. How unfortunate that religion itself should be so misinterpreted as to take the human Jesus away from struggling mortals! Let not the discussions of the humanity or the divinity of the Christ obscure the saving truth that Jesus of Nazareth was a religious man who, by faith, achieved the knowing and the doing of the will of God; he was the most truly religious man who has ever lived on Urantia.
2000 196:1.1 아버지의 뜻에 그리고 사람에게 봉사하는 데 바친 예수의 열정은 사람의 결심과 인간적 결의보다 더한 것이었다. 그렇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데 진심으로 바친 거룩한 열정이었다. 미가엘이 군주라는 사실이 아무리 대단해도 상관 없이, 너희는 사람들로부터 인간 예수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주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는 사람들에게 속하고, 사람들은 그에게 속한다. 인간 예수를 투쟁하는 필사자로부터 빼앗으려고 종교 자체를 잘못 해석하는 것은 얼마나 딱한 일인가! 그리스도가 인간인가 신인가 토론하면서 나사렛 예수가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한 종교적 인간이었다는 예외적 진리를 놓치지 말라. 그는 유란시아에서 일찍이 살았던 가운데 참으로 가장 종교적 인간이었다.
2001 CM 196:1.1 아버지의 뜻에 그리고 사람에게 봉사하는 데 바친 예수의 열정은, 필사자의 결심이나 인간적 결단보다 훨씬 더한 것이었으며;사랑을 그렇게 아낌없이 주기까지, 온 마음으로 자신을 바치는 것이었다. 미가엘의 주권자 신분이라는 사실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인간 예수가 사람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주님은 하나님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 높은 자리에 올라갔으며;그는 사람에게 속하고;사람은 그에게 속한다. 고뇌하는 필사자로부터 인간 예수를 멀어지게 할 만큼 종교 자체가 잘못 해석된다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그리스도가 인간인지 신인지 토론하면서, 나사렛 예수가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한 종교적 사람이었다는 예외적 진리를 손상시키지 말라;그는 일찍이 유란시아에 살았던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참되게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2007 URKA 196:1.1 아버지의 뜻과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대한 예수의 헌신은 필사자의 결정과 인간 결심 이상이었다; 그것은 그러한 아낌없는 사랑의 증여에 전심으로 그 자신의 헌신이었다. 미가엘의 주권의 사실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너희는 인간 예수를 사람들로부터 떼어놓아서는 안 된다. 주(主)는 하느님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 높은 자리에 오르셨다; 그는 사람에게 속한다; 사람들은 그에 속한다. 종교가 스스로, 분투하는 필사자들로부터 인간 예수를 떼어놓을 정도로 그렇게 잘못 해석되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신성에 대한 토론들이 나사렛 예수가 신앙이 깊은 사람이며, 신앙으로 하느님의 뜻을 알았고 행함을 성취하였다는 구원의 진리가 흐려지지 않도록 하여라; 그는 이제까지 유란시아에 살았던 최상의 참된 신앙인이었다.
2025 196:1.1 아버지의 뜻에, 그리고 사람에게 봉사하는 데 바친 예수의 열정은 사람의 결심과 인간적 결의보다 더한 것이었다. 그렇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데 진심으로 바친 거룩한 열정이었다. 미가엘이 군주라는 사실이 아무리 대단해도 상관없이, 너희는 사람들로부터 인간 예수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주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는 사람들에게 속하고, 사람들은 그에게 속한다. 인간 예수를 투쟁하는 필사자로부터 빼앗으려고 종교 자체를 잘못 해석하는 것은 얼마나 딱한 일인가! 그리스도가 인간인가 신인가 토론하면서 나사렛 예수가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한 종교적 인간이었다는 예외적 진실을 놓치지 말라. 그는 유란시아에서 일찍이 살았던 가운데 참으로 가장 종교적 인간이었다.
1955 196:1.2 The time is ripe to witness the figurative resurrection of the human Jesus from his burial tomb amidst the theological traditions and the religious dogmas of nineteen centuries. Jesus of Nazareth must not be longer sacrificed to even the splendid concept of the glorified Christ. What a transcendent service if, through this revelation, the Son of Man should be recovered from the tomb of traditional theology and be presented as the living Jesus to the church that bears his name, and to all other religions! Surely the Christian fellowship of believers will not hesitate to make such adjustments of faith and of practices of living as will enable it to “follow after” the Master in the demonstration of his real life of religious devotion to the doing of his Father’s will and of consecration to the unselfish service of man. Do professed Christians fear the exposure of a self-sufficient and unconsecrated fellowship of social respectability and selfish economic maladjustment? Does institutional Christianity fear the possible jeopardy, or even the overthrow, of traditional ecclesiastical authority if the Jesus of Galilee is reinstated in the minds and souls of mortal men as the ideal of personal religious living? Indeed, the social readjustments, the economic transformations, the moral rejuvenations, and the religious revisions of Christian civilization would be drastic and revolutionary if the living religion of Jesus should suddenly supplant the theologic religion about Jesus.
2000 196:1.2 열아홉 세기 동안 신학의 전통과 종교적 독단(獨斷) 한가운데 묻혔던 그의 무덤으로부터 인간 예수의 상징적 부활을 증언할 때가 무르익었다. 나사렛 예수는,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라는 빛나는 개념에도 이제 더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이 계시를 통해서, 사람의 아들이 전통적 신학(神學)의 무덤으로부터 회복되고, 그 이름을 지니는 교회와 모든 다른 종교에게 살아 있는 예수로서 제시된다면, 얼마나 초월적 수고가 될 것인가! 기독교 신자들의 친교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종교적으로 헌신하고, 사람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는 데 거룩히 바친 그의 참 일생을 보여주면서, 그 친교가 주를 “따를” 수 있도록, 서슴지 않고 그러한 믿음과 생활 관습을 조정할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인이라고 공언(公言)한 자들은,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경제적으로 잘못 적응된 이기적 친교, 거만하며 신성하게 되지 않은 친교가 노출될까 두려워하는가? 갈릴리의 예수가 필사 인간의 지성과 혼 속에서 개인적 종교 생활의 이상으로서 다시 자리를 찾는다면, 제도화된 기독교는 전통적 교회 권한이 위협받는 가능성을, 아니 교회 권한이 전복될까 두려워하는가? 정말로, 예수의 살아 있는 종교가 예수에 관한 신학적 종교를 갑자기 갈아치운다면, 기독교 문명에서 일어날 사회적 재조정, 경제적 변화, 도덕의 회복, 종교적 수정은 철저하고 혁신이 될 것이다.
2001 CM 196:1.2 열아홉 세기 동안 신학의 전통과 종교 신조{信條} 한가운데에 그를 묻어놓은 무덤에서, 인간 예수의 상징적 부활을 목격하게 될 때가 무르익었다.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라는 화려한 개념으로 말미암아, 나사렛 예수가 더 이상 희생돼서는 안 된다. 본 계시를 통해서, 전통적 신학이라는 무덤으로부터 사람의 아들이 재발견되고, 그의 이름을 간직한 교회에, 그리고 다른 모든 종교에, 살아있는 예수로서 제시된다면, 얼마나 탁월한 공헌이 되겠는가! 믿는 자들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종교적으로 헌신하는, 그리고 사람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려고 성별{聖別}하는, 실제 생활의 모범을 보여줬던 주님의 “뒤를 좇아” 가도록, 신앙과 생활 풍습을 주저하지 않고 조정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교인이라고 고백한 사람이, 사회적 체면과 이기적인 경제적 부적응으로 자기만-만족시키는 성별되지 않은 교제가 노출될까봐 두려워할까? 갈릴리의 예수께서, 필사적 사람들의 정신과 혼 속에, 개인적 종교 생활의 이상{理想}으로서 원래 상태로 회복된다면, 제도화된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인 성직의 권위가 위협 받거나 폐지될 가능성 때문에 두려워할까? 정말로, 예수의 살아있는 종교가 예수에 관한 신학적 종교를 갑자기 대체하게 된다면, 사회적 재조정과 경제적 전환과 도덕적 원상 복구 그리고 그리스도교 문명의 종교적 개편이 격렬하게 혁명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2007 URKA 196:1.2 19 세기의 신학적 전통과 종교적 독단 속에 예수를 묻어놓은 무덤으로부터, 인간 예수에 대한 상징적인 부활을 증언할 시기가 무르익었다. 나사렛 예수가 영화롭게된 그리스도라는 눈부신 개념으로 더 이상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이 계시를 통하여, 사람의 아들이 전통적 신학의 무덤으로부터 회복되어야하고 그리고 그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교회와 다른 모든 종교에게 살아 계신 예수로서 제시된다면 얼마나 초월적인 봉사일 것인가! 그리스도 신자 교인들의 형제관계는, 주(主)를 “뒤 따르는 것”이 가능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과 사람의 사심-없는 봉사에 몸을 바친 종교적 헌신이라는 그의 실제 삶의 실연 안에서 그를 따라 신앙에서의 그리고 삶의 실천에서 주저 없이 그러한 조절을 이루게 될 것이 분명하다. 자칭 그리스도교인들이, 사회적 체면과 이기적인 경제적 불균형에서의 자아-풍족과 그리고 성스럽지 못한 동료관계의 폭로를 두려워하는가? 만약 갈릴리의 예수가 개인적인 종교적 삶의 이상(理想)으로써 필사 사람들의 마음과 혼 속에 본래의 자리를 잡았을 때, 제도화된 그리스도교는 전통적 성직 권위의 위험성, 아니 심지어 전복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두려워 하는가? 만약 예수의 살아있는 종교가 예수에 대한 신학적인 종교를 갑자기 대체한다면, 그리스도교 문명에서의 사회적인 재조절, 경제적 변환, 도덕적 원기의 회복, 그리고 종교적 교정은 정말로 극적이고도 혁명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2025 196:1.2 열아홉 세기 동안 신학의 전통과 종교적 독단(獨斷) 한가운데 묻혔던 그의 무덤에서 인간 예수의 상징적 부활을 증언할 때가 무르익었다. 나사렛 예수는,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라는 빛나는 개념에도 이제 더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이 계시를 통해서, 사람의 아들이 전통적 신학(神學)의 무덤에서 회복되고, 그 이름을 지니는 교회와 모든 다른 종교에게 살아 있는 예수로서 제시된다면, 얼마나 초월적 수고가 될 것인가! 기독교 신자들의 친교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종교적으로 헌신하고, 사람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는 데 거룩히 바친 그의 참 일생을 보여주면서, 그 친교가 주를 “따를” 수 있도록, 서슴지 않고 그러한 믿음과 생활 관습을 조정할 것이 분명하다[14]. 기독교인이라고 공언(公言)한 자들은,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경제적으로 잘못 적응된 이기적 친교, 거만하며 신성하게 되지 않은 친교가 노출될까 두려워하는가? 갈릴리의 예수가 필사 인간의 지성과 혼 속에서 개인적 종교 생활의 이상으로서 다시 자리를 찾는다면, 제도화된 기독교는 전통적 교회 권한이 위협받는 가능성을, 아니 교회 권한이 전복될까 두려워하는가? 정말로, 예수의 살아 있는 종교가 예수에 관한 신학적 종교를 갑자기 갈아치운다면, 기독교 문명에서 일어날 사회적 재조정, 경제적 변화, 도덕의 회복, 종교적 수정은 철저하고 혁신이 될 것이다.
1955 196:1.3 To “follow Jesus” means to personally share his religious faith and to enter into the spirit of the Master’s life of unselfish service for man. One of the most important things in human living is to find out what Jesus believed, to discover his ideals, and to strive for the achievement of his exalted life purpose. Of all human knowledge, that which is of greatest value is to know the religious life of Jesus and how he lived it.
2000 196:1.3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의 종교적 믿음을 몸소 함께 가지고, 사람에게 사심 없이 봉사한 주의 일생의 그 정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예수가 무엇을 믿었는가를 찾아내고, 그 이상(理想)을 발견하며, 그의 드높은 인생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은 예수의 종교적 일생과 그가 어떻게 그런 일생을 살았는가를 아는 것이다.
2001 CM 196:1.3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의 종교적 신앙을 몸소 공유하고, 사람에게 사심 없이 봉사한 주님의 일생의 참뜻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예수께서 무엇을 믿었는지 찾아내고, 그의 이상을 발견하여, 그의 승화된 인생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은, 예수의 종교적 생애와 그가 어떻게 그런 생애를 살았는지를 아는 것이다.
2007 URKA 196:1.3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의 종교적인 신앙을 개인적으로 공유하고, 사람을 위하여 사심-없이 봉사한 주(主)의 일생의 영(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예수가 믿었던 것을 찾아내고, 그의 이상들을 발견하며, 그리고 그의 드높여진 일생의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커다란 가치가 있는 것은 예수의 종교적 일생과 그가 어떻게 그 삶을 사셨는지를 아는 것이다.
2025 196:1.3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의 종교적 믿음을 몸소 함께 가지고, 사람에게 사심 없이 봉사한 주의 일생의 그 정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예수가 무엇을 믿었는가 찾아내고, 그 이상(理想)을 발견하며, 그의 드높은 인생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은 예수의 종교적 일생과 그가 어떻게 그런 일생을 살았는가를 아는 것이다.
1955 196:1.4 The common people heard Jesus gladly, and they will again respond to the presentation of his sincere human life of consecrated religious motivation if such truths shall again be proclaimed to the world. The people heard him gladly because he was one of them, an unpretentious layman; the world’s greatest religious teacher was indeed a layman.
2000 196:1.4 서민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진실이 세상에 다시 선포된다면, 종교적 동기에 거룩히 바친 그의 성실한 인생을 발표하는 것에 서민들은 다시 반응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기쁘게 들은 것은 그가 그들 가운데 하나요, 꾸밈없는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적 스승은 정말로 보통 사람이었다.
2001 CM 196:1.4 평민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으며, 그런 진리가 다시 세상에 선포된다면, 종교적 동기부여에 거룩히 바친 그의 진지한 인간 생애가 제시될 때, 다시 응답할 것이다. 사람들이 기꺼이 그에게 귀를 기울인 것은, 자신과 똑같은 꾸밈없는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며;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그 종교 교사는 정말로 평신도였다.
2007 URKA 196:1.4 평민들은 예수의 말을 즐겁게 들었다, 그리고 만약에 그러한 진리들이 다시 세상에 선포된다면, 성화(聖化)된 종교적 동기를 지닌 그의 진지한 인간 일생의 발표에 그들은 다시 한 번 응답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즐겁게 듣는 것은 그가 그들 중의 하나, 겸손한 보통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 교사(敎師)는 진실로 평범한 사람이었다.
1955 196:1.5 It should not be the aim of kingdom believers literally to imitate the outward life of Jesus in the flesh but rather to share his faith; to trust God as he trusted God and to believe in men as he believed in men. Jesus never argued about either the fatherhood of God or the brotherhood of men; he was a living illustration of the one and a profound demonstration of the other.
2000 196:1.5 육체를 입은 예수의 일생, 겉에서 보이는 일생을 글자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믿음을 함께 가지는 것이 하늘나라를 믿는 사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한 것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가 사람들을 믿은 것 같이 사람들을 믿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이나 사람들이 형제인 것을 놓고 한 번도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하나를 생생하게 보여준 예이었고, 다른 하나의 심오한 시범이었다.
2001 CM 196:1.5 육신을 입은 예수의 겉으로 나타난 생활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을 공유하는 것이, 천국을 믿는 자의 목표가 돼야하며;그가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가 사람들을 믿었던 것처럼 사람들을 믿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아버지시고 사람이 형제관계인 것에 대해 반론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전자{前者}에 대해서는 산 증인이었고, 후자에 대해서는 충분한 본이 됐다.
2007 URKA 196:1.5 겉으로 나타난 육신으로 예수의 일생을 모방하는 것이 왕국을 믿는 자들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가 하느님을 신뢰하였던 것처럼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가 사람들을 믿었던 것처럼 사람들을 믿는 것; 바로 그러한 그의 신앙을 나누어야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버지신분에 대하여나 사람들의 형제신분에 대하여 논쟁한 적이 없었다; 그는 전자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예증이었고 후자에 대해서는 심오한 실증이었다.
2025 196:1.5 육체를 입은 예수의 일생, 겉에서 보이는 일생을 글자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믿음을 함께 가지는 것이 하늘나라를 믿는 사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한 것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가 사람들을 믿은 것 같이 사람들을 믿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이나 사람들이 형제인 것을 놓고 한 번도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하나를 생생하게 보여준 예이었고, 다른 하나의 심오한 시범이었다.
1955 196:1.6 Just as men must progress from the consciousness of the human to the realization of the divine, so did Jesus ascend from the nature of man to the consciousness of the nature of God. And the Master made this great ascent from the human to the divine by the conjoint achievement of the faith of his mortal intellect and the acts of his indwelling Adjuster. The fact-realization of the attainment of totality of divinity (all the while fully conscious of the reality of humanity) was attended by seven stages of faith consciousness of progressive divinization. These stages of progressive self-realization were marked off by the following extraordinary events in the Master’s bestowal experience:
2000 196:1.6 인간인 것을 의식한 때부터 신다운 것을 깨닫기까지 사람이 진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사람의 성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의식하는 데까지 올라갔다. 주는 필사 지능의 믿음, 그리고 깃드는 조절자의 행위가 함께 성취하여, 인간다운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높이 올라갔다. (그가 인간이라는 현실을 내내 충분히 의식하면서) 신성(神性)의 총체에 도달한 것을 사실로 깨닫는 데는, 차츰차츰 신답게 되는 것을 믿음으로 의식하는 일곱 단계가 따랐다. 점진적으로 자아를 각성하는 이 여러 단계는 주의 자신 수여 체험에서 다음의 특별한 여러 사건으로 구별된다:
2001 CM 196:1.6 인간 세계를 자각한 때부터 신의 세계를 깨닫기까지 사람이 진보해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사람의 본성으로부터 하나님의 본성을 자각하는 데 이르기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의 필사자 지능의 신앙과, 자신에게 내주하는 섭리사의 활동이 공동으로 성취함으로써, 인간 세계로부터 신성한 세계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높이 올라갔다. (인성의 실체를 내내 충분히 의식하면서) 신성의 총체에 도달했음을 사실로-깨닫기까지, 점차 신성화{神性化}돼가는 것을 신앙으로 의식하는 일곱 단계가 있었다. 이런 발전적 자아-실현 단계는, 주님의 증여 체험에서 다음과 같은 이례적 사건들로 구별됐다:
2007 URKA 196:1.6 사람들이 인간의 의식(意識)으로부터 신성한 것의 실현으로 진보해야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또한 사람의 본성으로부터 하느님 본성의 의식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주(主)는 그의 필사 지성의 신앙과 내재하는 조절자의 활동들의 공동 성취로 인간으로부터 신성으로의 이 위대한 상승을 이루셨다. 신성의 전체성을 달성한 사실- 실현화는 (이 기간 내내 인간성의 실체를 충분히 의식하면서) 점진적으로 신성화되는 신앙의 의식의 일곱 단계들을 따랐다. 이러한 점진적인 자아-실현의 단계들은 주(主)의 증여 체험에서 다음과 같은 특별한 사건들로 구별 지어 졌다:생각 조절자의 도착.그가 12살 때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나타난 임마누엘의 메신저.그의 세례에 부수된 현시활동들.변화 산에서의 체험들.모론시아 부활.영의 상승.그의 우주의 무제한적 주권을 수여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최종 포옹.
2025 196:1.6 인간인 것을 의식한 때부터 신다운 것을 깨닫기까지 사람이 진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사람의 성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의식하는 데까지 올라갔다. 주는 필사 지능의 믿음, 그리고 깃드는 조절자의 행위가 함께 성취하여, 인간다운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높이 올라갔다. (그가 인간이라는 현실을 내내 충분히 의식하면서) 신성(神性)의 총체에 도달한 것을 사실로 깨닫는 데는, 차츰차츰 신답게 되는 것을 믿음으로 의식하는 일곱 단계가 따랐다. 점진적으로 자아를 각성하는 이 여러 단계는 주의 자신 수여 체험에서 다음의 특별한 여러 사건으로 구별된다:
1955 196:1.7 1. The arrival of the Thought Adjuster.
2000 196:1.7 1. 생각 조절자의 도착.
2001 CM 196:1.7 1. 사고 섭리사가 도래함.
2007 URKA 196:1.7 생각 조절자의 도착.
2025 196:1.7 1. 생각 조절자의 도착.
1955 196:1.8 2. The messenger of Immanuel who appeared to him at Jerusalem when he was about twelve years old.
2000 196:1.8 2. 열두 살쯤 되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나타났던 이마누엘의 사자.
2001 CM 196:1.8 2. 열두 살쯤 됐을 때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출현했던 임마누엘의 사자.
2007 URKA 196:1.8 그가 12살 때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나타난 임마누엘의 메신저.
2025 196:1.8 2. 열두 살쯤 되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나타났던 이마누엘의 사자.
1955 196:1.9 3. The manifestations attendant upon his baptism.
2000 196:1.9 3. 세례에 뒤따른 여러 표시.
2001 CM 196:1.9 3. 세례식 때 수반됐던 여러 현시{顯示}.
2007 URKA 196:1.9 그의 세례에 부수된 현시활동들.
2025 196:1.9 3. 세례에 뒤따른 여러 표시.
1955 196:1.10 4. The experiences on the Mount of Transfiguration.
2000 196:1.10 4. 변모산에서 겪은 체험.
2001 CM 196:1.10 4. 변형되신 산에서 겪은 체험.
2007 URKA 196:1.10 변화 산에서의 체험들.
2025 196:1.10 4. 변모산에서 겪은 체험.
1955 196:1.11 5. The morontia resurrection.
2000 196:1.11 5. 상물질 부활.
2001 CM 196:1.11 5. 모론시아 부활.
2007 URKA 196:1.11 모론시아 부활.
2025 196:1.11 5. 상물질 부활.
1955 196:1.12 6. The spirit ascension.
2000 196:1.12 6. 영으로서 승천.
2001 CM 196:1.12 6. 영으로서 승천{昇天}.
2007 URKA 196:1.12 영의 상승.
2025 196:1.12 6. 영으로서 승천.
1955 196:1.13 7. The final embrace of the Paradise Father, conferring unlimited sovereignty of his universe.
2000 196:1.13 7. 마침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 이것은 그의 우주를 다스리는 무제한 통치권을 부여하였다.
2001 CM 196:1.13 7. 낙원 아버지께 마침내 포용됨으로써, 자기 우주에 대한 무한한 주권을 수여받음.
2007 URKA 196:1.13 그의 우주의 무제한적 주권을 수여한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최종 포옹.
2025 196:1.13 7. 마침내 파라다이스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 이것은 그의 우주를 다스리는 무제한 통치권을 부여하였다.
2. THE RELIGION OF JESUS
2. 예수의 종교
2. 예수의 종교
2. 예수의 종교
2. 예수의 종교
1955 196:2.1 Some day a reformation in the Christian church may strike deep enough to get back to the unadulterated religious teachings of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 You may preach a religion about Jesus, but, perforce, you must live the religion of Jesus. In the enthusiasm of Pentecost, Peter unintentionally inaugurated a new religion, the religion of the risen and glorified Christ. The Apostle Paul later on transformed this new gospel into Christianity, a religion embodying his own theologic views and portraying his own personal experience with the Jesus of the Damascus road. The gospel of the kingdom is founded on the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of the Jesus of Galilee; Christianity is founded almost exclusively on the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of the Apostle Paul. Almost the whole of the New Testament is devoted, not to the portrayal of the significant and inspiring religious life of Jesus, but to a discussion of Paul’s religious experience and to a portrayal of his personal religious convictions. The only notable exceptions to this statement, aside from certain parts of Matthew, Mark, and Luke, are the Book of Hebrews and the Epistle of James. Even Peter, in his writing, only once reverted to the personal religious life of his Master. The New Testament is a superb Christian document, but it is only meagerly Jesusonian.
2000 196:2.1 언젠가 기독교회의 개혁(改革)은 충분히 깊이 파고들어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예수의 가르침, 변질되지 않은 종교적 가르침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너희는 예수에 관한 종교를 전파해도 좋지만, 예수의 종교를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오순절의 열심에 빠져, 베드로는 뜻하지 않게 새 종교, 부활하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종교를 창시했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이 새 복음을 기독교로 변화시켰는데, 이것은 그의 신학 견해를 담고 다마스커스 길에서 그가 예수를 개인적으로 체험한 것을 그리는 종교였다. 하늘나라 복음은 갈릴리의 예수가 몸소 겪은 종교적 체험에 기초를 두었으며, 기독교는 거의 순전히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겪은 종교적 체험에 기초를 두었다. 신약(新約)의 거의 전부가, 의미 있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예수의 종교 생활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종교적 체험을 토론하고 그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그리는 데 바쳐진다. 마태ㆍ마가ㆍ누가의 어떤 부분은 별도로 하고, 이 진술에 주목할 예외는 히브리서와 야고보 서한 뿐이다. 베드로도 그가 쓴 글에서, 주의 개인적 종교 생활로 겨우 한 번 되돌아갔을 뿐이다. 신약은 훌륭한 기독교 문헌이지만, 예수다운 모습이 빈약할 따름이다.
2001 CM 196:2.1 언젠가 그리스도교 교회에, 우리 신앙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의 변질되지 않은 종교 교훈으로 돌아가기에 충분한 개혁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너희는 예수에 관한 종교를 전도해도 괜찮지만, 반드시 예수의 종교를 실천해야한다. 오순절 열광 속에서,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새 종교를 탄생시켰는데, 부활하여 영광을 얻으신 그리스도를 모시는 종교였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이 새 복음을 그리스도교로 변형시켰는데, 그것은 자신의 신학 견해를 삽입시키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났던 독특한 개인 체험을 묘사한 종교였다. 천국 복음은 갈릴리 예수께서 몸소 겪은 종교 체험에 기초한 반면;그리스도교는 거의 전적으로 사도 바울의 개인 종교 체험에 기초했다. 신약 성경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의미심장하고 영감을 주는 예수의 종교적 생애를 묘사하기보다, 바울의 종교 체험에 대한 토론과 그의 개인적 종교 신념에 대한 묘사에 치우쳐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어떤 부분들은 제외하고, 이런 진술 중에서 주목할 예외는,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뿐이다. 베드로마저, 자신의 글에서 겨우 한번 예수의 개인 종교 생애에 눈길을 돌렸을 뿐이다. 신약 성경은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교 문서지만, 예수를-닮게하는{Jesusonian} 문서라고 하기에는 빈약할 뿐이다.
2007 URKA 196:2.1 언젠가는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우리들 신앙의 저자(著者)이며 완결자인, 예수의 섞이지 않은 종교적 가르침들로 돌아가려는 개혁이 충분히 깊게 일어날 것이다. 너희는 예수에 대한 종교를 전파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필연적으로 너희는 반드시 예수의 종교를 살아야만 한다. 오순절의 열광 속에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새로운 종교, 부활하고 그리고 영광된 그리스도의 종교를 시작하였다. 사도 바울은 후에 이 새로운 복음을 그리스도교, 그 자신의 신학적 견해들을 체현하면서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겪은 예수와의 그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묘사한 종교로 변환시켰다. 왕국 복음은 갈릴리 예수의 개인적 종교 체험 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거의 오로지 사도 바울의 개인적 종교 체험 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신약의 거의 모든 부분은, 의미심장하고 영감을 주는 예수의 종교적 일생에 대한 묘사보다는, 바울의 종교적 체험에 대한 토론과 그의 종교적 신념들에 대한 묘사에 치우쳐져 있다. 이 진술에 오직 두드러진 예외들은, 마태, 마가 그리고 누가 복음의 어떤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뿐이다. 베드로마저도 그의 글 속에서 단지 한번 그의 주(主)의 개인적인 종교적 일생에 눈길을 돌렸을 뿐이었다. 신약은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교 사람들의 문서이지만, 예수닮은 사람이라 하기에는 빈약할 따름이다.
2025 196:2.1 언젠가 기독교회의 개혁(改革)은 충분히 깊이 파고들어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예수의 가르침, 변질되지 않은 종교적 가르침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16]. 너희는 예수에 관한 종교를 전파해도 좋지만, 예수의 종교를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오순절의 열심에 빠져, 베드로는 뜻하지 않게 새 종교, 부활하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종교를 창시했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이 새 복음을 기독교로 변화시켰는데, 이것은 그의 신학 견해를 담고, 다마스커스 길에서 그가 예수를 개인적으로 체험한 것을 그리는 종교였다
[17]. 하늘나라 복음은 갈릴리의 예수가 몸소 겪은 종교적 체험에 기초를 두었으며, 기독교는 거의 순전히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겪은 종교적 체험에 기초를 두었다. 신약(新約)의 거의 전부가, 의미 있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예수의 종교 생활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종교적 체험을 토론하고 그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그리는 데 바쳐진다. 마태ㆍ마가ㆍ누가의 어떤 부분은 별도로 하고, 이 진술에 주목할 예외는 히브리서와 야고보 서한뿐이다. 베드로도 그가 쓴 글에서, 주의 개인적 종교 생활로 겨우 한 번 되돌아갔을 뿐이다
[18]. 신약은 훌륭한 기독교 문헌이지만, 예수다운 모습이 빈약할 따름이다.
1955 196:2.2 Jesus’ life in the flesh portrays a transcendent religious growth from the early ideas of primitive awe and human reverence up through years of personal spiritual communion until he finally arrived at that advanced and exalted status of the consciousness of his oneness with the Father. And thus, in one short life, did Jesus traverse that experience of religious spiritual progression which man begins on earth and ordinarily achieves only at the conclusion of his long sojourn in the spirit training schools of the successive levels of the pre-Paradise career. Jesus progressed from a purely human consciousness of the faith certainties of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to the sublime spiritual heights of the positive realization of his divine nature and to the consciousness of his close association with the Universal Father in the management of a universe. He progressed from the humble status of mortal dependence which prompted him spontaneously to say to the one who called him Good Teacher, “Why do you call me good? None is good but God,” to that sublime consciousness of achieved divinity which led him to exclaim, “Which one of you convicts me of sin?” And this progressing ascent from the human to the divine was an exclusively mortal achievement. And when he had thus attained divinity, he was still the same human Jesus, the Son of Man as well as the Son of God.
2000 196:2.2 육체를 입은 예수의 일생은, 원시적 경외감과 인간적 존경이 나타나는 초기의 관념으로부터, 몸소 영적 교통을 가지는 여러 해를 거쳐서, 마침내 그가 아버지와 하나임을 의식하는 높은 상급 지위에 이를 때까지 거쳐간, 뛰어난 종교적 성장을 묘사한다. 그러므로 짧은 일생 안에 예수는 사람이 땅에서 시작하고, 연속된 파라다이스 이전 생애 수준의 여러 영 훈련 학교에서[1] 오래 머무른 뒤에야 보통 이룩하는, 종교적ㆍ영적 진보 체험을 거쳤다. 예수는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서 확실히 믿는 것들을 순전히 인간으로서 의식(意識)하는 경지로부터, 자기의 신 성품을 분명히 깨닫는 숭고한 영적 높이까지, 그리고 한 우주의 경영에서 우주의 아버지와 그가 가까운 관계를 가졌음을 의식하기까지, 나아갔다. 그를 선한 선생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자기도 모르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외에 아무도 선하지 않으니라” 말하도록 자극한 상태, 필사자로서 의존하는 겸손한 지위로부터 진보하였고 그에게 “너희 가운데 누가 나를 정죄하느냐?” 외치도록 이끈 신성(神性)의 성취를 숭고하게 의식하기까지 이르렀다. 인간인 것으로부터 신다운 것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점진적으로 올라간 것은 순전히 필사자의 성취였다. 이렇게 신성에 이르고 나서,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여전히 똑같은 인간 예수, 사람의 아들이었다.
2001 CM 196:2.2 육신을 입은 예수의 생애는, 원시적 두려움과 인간적 경외심이 나타나는 초기 관념으로부터, 몸소 영적 교류를 나누는 기간을 거쳐서, 마침내 아버지와 하나임을 인식하는 숭고한 신분에 도달하는 위대한 종교적 성장을 묘사한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한 번의 짧은 생애 동안에, 사람이 땅에서 시작하고, 이어지는 낙원-이전{以前} 생애 수준의 여러 영 훈련 학교에서 오래 머문 후에야 대개 성취하게 되는, 종교의 영적 진행과정 체험을 모두 거쳤다. 예수께서는 개인의 종교 체험에서 신앙으로 확신하는, 순전히 인간적으로 의식하는 경지로부터, 자신의 신성한 본성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숭고한 영적 경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우주 경영에서 우주 아버지와 긴밀하게 연합하는 것을 의식하기까지 나아갔다. 그는 자신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고 자연스럽게 말하도록 자극받을 만큼, 필사자로서 의존하는 겸손한 신분으로부터, “너희 가운데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라고 주장할 수 있는, 성취된 신성을 숭고하게 자각하기까지 나아갔다. 인간 세계로부터 신의 세계에 이르는 이런 점진적 상승은, 전적으로 필사자로서 성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신성에 도달하고 나서도, 그는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동일한 인간 예수, 사람의 아들이었다.
2007 URKA 196:2.2 육신으로서의 예수의 일생은 원시적 경외와 인간적 존경의 초기 관념에서부터 개인적인 영적 교제의 시기들을 통과하여 그가 최종적으로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가 되는 의식의 발전되고 고양된 지위에 도달하기까지의 초월적인 종교적 성장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는 한 번의 짧은 일생동안에, 사람이 지상에서 시작하여 파라다이스 이전 삶의 연속적인 단계들의 영 훈련 학교들에서 그의 오랜 체재를 마친 후에만 일반적으로 성취하는, 종교적 영적 진보의 체험을 가로질렀다. 예수는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에 대한 신앙 확신들의 순수한 인간 의식으로부터 그의 신성한 본성이 적극적으로 실현되는 숭고한 영적 절정에까지, 그리고 우주 경영에 대한 우주 아버지와의 긴밀한 연관의 의식까지 진보하였다. 그는 그를 선한 선생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저절로 그가 즉시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니라”라고 말하도록 한 그러한 필자사로서 의존하는 겸손한 지위로부터, “너희 중의 누가 나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느냐?”라고 외치도록 그를 인도한 성취된 신성의 그 숭고한 의식에 이르기까지 진보하였다. 그리고 인간으로부터 신성한 것까지의 이 진보하는 상승은 전적으로 필사자 성취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신성을 이루었을 때, 그는 아직 동일한 인간 예수, 사람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아들, 이었다.
2025 196:2.2 육체를 입은 예수의 일생은, 원시적 경외감과 인간적 존경이 나타나는 초기의 관념으로부터, 몸소 영적 교통을 가지는 여러 해를 거쳐서, 마침내 그가 아버지와 하나임을 의식하는 높은 상급 지위에 이를 때까지 거쳐간, 뛰어난 종교적 성장을 묘사한다. 그러므로 짧은 일생 안에 예수는 사람이 땅에서 시작하고, 연속된 파라다이스 이전 생애 수준의 여러 영 훈련[179] 학교에서 오래 머무른 뒤에야 보통 이룩하는, 종교적ㆍ영적 진보 체험을 거쳤다. 예수는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서 확실히 믿는 것들을 순전히 인간으로서 의식(意識)하는 경지에서, 자기의 신 성품을 분명히 깨닫는 숭고한 영적 높이까지, 그리고 한 우주의 경영에서 우주의 아버지와 그가 가까운 관계를 가졌음을 의식하기까지, 나아갔다[19]. 그를 선한 선생이라고 부른 사람에게 자기도 모르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외에 아무도 선하지 않으니라” 말하도록 자극한 상태, 필사자로서 의존하는 겸손한 지위에서 진보하였고 그에게 “너희 가운데 누가 나를 정죄하느냐?” 외치도록 이끈 신성(神性)의 성취를 숭고하게 의식하기까지 이르렀다
[20][21]. 인간인 것에서 신다운 것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점진적으로 올라간 것은 순전히 필사자의 성취였다. 이렇게 신성에 이르고 나서,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여전히 똑같은 인간 예수, 사람의 아들이었다.
1955 196:2.3 Mark, Matthew, and Luke retain something of the picture of the human Jesus as he engaged in the superb struggle to ascertain the divine will and to do that will. John presents a picture of the triumphant Jesus as he walked on earth in the full consciousness of divinity. The great mistake that has been made by those who have studied the Master’s life is that some have conceived of him as entirely human, while others have thought of him as only divine. Throughout his entire experience he was truly both human and divine, even as he yet is.
2000 196:2.3 마가ㆍ마태ㆍ누가는 신의 뜻을 확인하고 그 뜻을 행하려는 숭고한 투쟁에 몰두한 인간 예수의 그림을 얼마큼 간직한다. 요한은 신성을 완전히 의식하면서 땅에서 걸어다닌 승리한 예수의 그림을 제시한다. 주의 일생을 연구한 자들이 저지른 큰 잘못은, 더러가 그를 전적으로 인간이라 생각했고 더러는 오직 신(神)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의 체험 전부를 통해서 내내, 아니 아직도 그렇다시피, 그는 참으로 인간이자 신이었다.
2001 CM 196:2.3 마가복음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신의 뜻을 확인하고 그 뜻을 행하려고 훌륭하게 분투하는 인간 예수의 모습을 조금 간직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신성을 온전히 의식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승리한 예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님의 생애를 연구해온 자들이 저지른 큰 실수는, 더러는 그를 한결같이 인간으로 여기는 반면, 더러는 그를 오로지 신으로 여긴 점이었다. 그가 체험한 모든 과정 내내, 그는 진정으로 인간인 동시에 신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2007 URKA 196:2.3 마가와 마태 그리고 누가복음은 그가 신성한 뜻을 확인하고 그 뜻을 행하려고 장엄한 투쟁에 임하고 있었을 때의 인간 예수의 모습을 조금 간직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신성의 충만한 의식으로 지상을 거닐었던 승리한 예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主)의 일생을 공부한 사람들이 저지른 큰 오류는, 어떤 사람들은 그를 전반적으로 인간으로 생각하였고, 한편 다른 사람들은 그를 오로지 신성으로만 생각하였다. 그의 모든 체험을 통하여 그는 진실로 인간인 동시에 신성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2025 196:2.3 마가ㆍ마태ㆍ누가는 신의 뜻을 확인하고 그 뜻을 행하려는 숭고한 투쟁에 몰두한 인간 예수의 그림을 얼마큼 간직한다. 요한은 신성을 완전히 의식하면서 땅에서 걸어 다닌 승리한 예수의 그림을 제시한다. 주의 일생을 연구한 자들이 저지른 큰 잘못은, 더러가 그를 전적으로 인간이라 생각했고 더러는 오직 신(神)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의 체험 전부를 통해서 내내, 아니 아직도 그렇다시피, 그는 참으로 인간이자 신이었다.
1955 196:2.4 But the greatest mistake was made in that, while the human Jesus was recognized as having a religion, the divine Jesus (Christ) almost overnight became a religion. Paul’s Christianity made sure of the adoration of the divine Christ, but it almost wholly lost sight of the struggling and valiant human Jesus of Galilee, who, by the valor of his personal religious faith and the heroism of his indwelling Adjuster, ascended from the lowly levels of humanity to become one with divinity, thus becoming the new and living way whereby all mortals may so ascend from humanity to divinity. Mortals in all stages of spirituality and on all worlds may find in the personal life of Jesus that which will strengthen and inspire them as they progress from the lowest spirit levels up to the highest divine values,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of all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2000 196:2.4 그러나 인간 예수가 종교를 가졌다고 인식되기는 했어도 신다운 예수(그리스도)가 거의 하룻밤 사이에 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가장 큰 잘못이 일어났다. 바울의 기독교는 사람들이 신다운 그리스도를 틀림없이 경배하도록 만들었지만, 갈릴리의 예수, 투쟁하는 용감한 인간 예수를 거의 전적으로 못보고 놓쳤다. 인간 예수는 개인의 종교적 믿음의 용기와 그에 깃드는 조절자의 영웅다운 행위로 인하여, 낮은 인간 수준에서 신과 하나가 되기까지 올라갔으며, 이처럼 모든 필사자가 그렇게 인간으로부터 신성에 이르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그러한 새 생명의 길이 되었다. 어떤 영적 단계, 어떤 세계에 있는 필사자라도 예수 개인의 일생에서, 가장 낮은 영 수준에서 가장 높은 신다운 가치에 이르기까지, 몸소 겪는 모든 영적 체험의 시초부터 끝까지 올라가는 동안에, 그들에게 힘을 주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을 발견할지 모른다.
2001 CM 196:2.4 그러나 가장 큰 과오는, 인간 예수가 종교를 가졌다고 인식되기는 했어도, 신성한 예수(곧 그리스도)가 거의 하룻밤 사이에 종교가 됐기 때문에 발생됐다. 바울의 그리스도교는, 신성한 그리스도를 찬미하도록 했으나, 갈릴리의 분투하는 씩씩한 인간 예수의 모습을 거의 전적으로 잃어버린 반면, 인간 예수는, 종교적인 개인 신앙의 용맹함과 내주하는 섭리사의 영웅적 자질로, 낮은 단계의 인성으로부터 신성과 하나 되는 경지까지 올라갔고, 이처럼 어떤 필사자든지 그렇게 인성으로부터 신성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하는 새 생명의 길이 됐다. 어떤 영성 단계든지, 어떤 세계의 필사자든지, 가장 낮은 영 수준에서 가장 높은 신성한 가치에 이르기까지, 몸소 겪는 모든 종교 체험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진하는 동안, 힘과 영감을 주는 무엇을 예수의 개인 생애에서 발견할지도 모른다.
2007 URKA 196:2.4 그러나 가장 큰 과오는, 인간 예수가 종교를 가지신 것으로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성한 예수가 (그리스도) 하룻밤 사이에 종교로 되어버린 것이다. 바울의 그리스도교는 신성한 그리스도의 숭배를 확실히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개인적 종교 신앙의 용기와 그의 내재하는 조절자의 영웅적 자질로, 인간성의 낮은 차원들에서부터 신성과 하나가 되기까지 상승하였으며, 그리하여 모든 필사자들이 그것을 통하여 인간성으로부터 신성으로 그렇게 상승할 수 있는 새롭고 살아있는 길이 되신 갈릴리의 투쟁하는 용감한 인간 예수를 거의 잃어버렸다. 영성(靈性)의 모든 단계들과 온 세상들에 있는 필사자들은 예수의 개인적 일생 속에서 그들이 가장 낮은 영 차원들에서 가장 높은 신성한 가치들까지, 모든 개인적인 종교 체험의 시작부터 끝까지 진보할 때 그들에게 힘을 주고 영감을 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2025 196:2.4 그러나 인간 예수가 종교를 가졌다고 인식되기는 했어도 신다운 예수(그리스도)가 거의 하룻밤 사이에 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가장 큰 잘못이 일어났다. 바울의 기독교는 사람들이 신다운 그리스도를 틀림없이 경배하도록 만들었지만, 갈릴리의 예수, 투쟁하는 용감한 인간 예수를 거의 전적으로 못 보고 놓쳤다[22]. 인간 예수는 개인의 종교적 믿음의 용기와 그에 깃드는 조절자의 영웅다운 행위로 인하여, 낮은 인간 수준에서 신과 하나가 되기까지 올라갔으며, 이처럼 모든 필사자가 그렇게 인간으로부터 신성에 이르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그러한 새 생명의 길이 되었다. 어떤 영적 단계, 어떤 세계에 있는 필사자라도 예수 개인의 일생에서, 가장 낮은 영 수준에서 가장 높은 신다운 가치에 이르기까지, 몸소 겪는 모든 영적 체험의 시초부터 끝까지 올라가는 동안에, 그들에게 힘을 주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을 발견할지 모른다.
1955 196:2.5 At the time of the writing of the New Testament, the authors not only most profoundly believed in the divinity of the risen Christ, but they also devotedly and sincerely believed in his immediate return to earth to consummate the heavenly kingdom. This strong faith in the Lord’s immediate return had much to do with the tendency to omit from the record those references which portrayed the purely human experiences and attributes of the Master. The whole Christian movement tended away from the human picture of Jesus of Nazareth toward the exaltation of the risen Christ, the glorified and soon-returning Lord Jesus Christ.
2000 196:2.5 신약을 기록하던 당시의 저자(著者)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아주 깊이 믿었을 뿐 아니라, 하늘나라를 완성하려고 그가 즉시 땅으로 돌아오리라고 열심히, 진지하게 믿었다. 주가 즉시 돌아온다는 이 굳센 믿음은 순전히 인간다운 주의 체험과 속성을 묘사하는 언급을 기록에서 빼버리는 경향을 많이 부추겼다. 기독교 운동 전체가 나사렛 예수의 인간다운 그림으로부터 멀리, 부활한 그리스도, 영화롭게 되었고 곧 돌아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쪽으로 가는 경향이 있었다.
2001 CM 196:2.5 신약 성경을 기록하던 당시에 저자{著者}들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아주 절실히 믿었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를 완성하려고 그가 이 땅에 속히 돌아오리라는 것을 진심으로 열렬히 믿었다. 주{主}의 신속한 재림에 대한 이런 강한 신앙은, 주님의 순전히 인간적인 체험과 속성들을 묘사해주는 그런 자료를, 기록에서 생략하려는 풍조를 많이 부추겼다. 전체 그리스도교 운동은, 나사렛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으로부터, 부활한 그리스도, 즉 영광을 얻고 곧 다시 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쪽으로 멀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2007 URKA 196:2.5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 저자들은 부활한 예수의 신성을 가장 깊이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늘왕국을 절정으로 이루기 위하여 그의 즉각적인 땅으로의 재림을 헌신적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믿었다. 주님의 신속한 재림에 대한 이러한 강한 신앙은 주(主)의 순전한 인간 체험들과 속성들을 보여주는 그러한 자료들을 기록에서 생략하려는 추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체 그리스도교 운동은 나사렛 예수의 인간 모습으로부터 부활한 그리스도, 영광되고 그리고 곧-재림하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찬미로 향하였다.
1955 196:2.6 Jesus founded the religion of personal experience in doing the will of God and serving the human brotherhood; Paul founded a religion in which the glorified Jesus became the object of worship and the brotherhood consisted of fellow believers in the divine Christ. In the bestowal of Jesus these two concepts were potential in his divine-human life, and it is indeed a pity that his followers failed to create a unified religion which might have given proper recognition to both the human and the divine natures of the Master as they were inseparably bound up in his earth life and so gloriously set forth in the original gospel of the kingdom.
2000 196:2.6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인간 형제들을 위하여 수고하면서 몸소 체험한 종교를 세웠다. 바울은 영화롭게 된 예수가 예배의 대상이 되고, 그 형제 단체가 신다운 그리스도를 믿는 동료 신자들로 이루어진 그러한 종교를 세웠다. 예수의 자신 수여에서 이 두 개념은 신이자 인간인 일생에 잠재했다. 땅에서 사신 일생에서 주의 인간 성품과 신다운 성품이 뗄 수 없이 붙어 있고 최초의 하늘나라 복음에서 아주 영화롭게 발표된 바와 같이, 이 두 성품을 적절히 인정하는 통일된 종교를 추종자들이 만들지 못한 것은 정말로 유감스럽다.
2001 CM 196:2.6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인간의 형제관계를 위하여 봉사하면서 몸소 체험하는 종교를 설립했으나;바울은, 영광을 받은 예수를 경배 대상으로 삼고, 신성한 그리스도를 믿는 친구들로 구성된 형제단체를 수립했다. 신이자-인간인 생애동안 예수의 증여에 잠재돼있던 이 두 가지 개념에서, 따르는 자들이 통합된 종교를 만들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인데, 만약 그렇게 통합됐다면, 주님의 인간적인 본성과 신성한 본성 둘 다 그의 이 세상 생애동안에 떨어질 수 없도록 묶여있던대로, 그리하여 원래의 천국 복음에서 그토록 영광스럽게 제시됐던대로, 둘 다 올바르게 알아봤을지도 모른다.
2007 URKA 196:2.6 예수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인간 형제신분에 봉사하는 개인적 체험의 종교를 기초하였다; 바울은 영광된 예수가 경배의 대상이 되었고 그리고 형제신분은 신성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 구성된 종교를 기초하였다. 예수의 증여에 있어서, 이 두 가지 개념들은 그의 신성의-인간의 일생 속에 잠재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의 지상의 일생에 따로 떼어놓을 수 없도록 묶여있고 최초의 왕국 복음에 영광스럽게 밝혀져 있었음으로 주(主)의 인간적이고 그리고 신성한 두개의 본성들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그의 추종자들이 통합된 종교의 창조에 실패한 것은 정말 슬프다.
2025 196:2.6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인간 형제들을 위하여 수고하면서 몸소 체험한 종교를 세웠다. 바울은 영화롭게 된 예수가 예배의 대상이 되고, 그 형제 단체가 신다운 그리스도를 믿는 동료 신자들로 이루어진 그러한 종교를 세웠다[25]. 예수의 자신 수여에서 이 두 개념은 신이자 인간인 일생에 잠재했다. 땅에서 사신 일생에서 주의 인간 성품과 신다운 성품이 뗄 수 없이 붙어 있고 최초의 하늘나라 복음에서 아주 영화롭게 발표된 바와 같이, 이 두 성품을 적절히 인정하는 통일된 종교를 추종자들이 만들지 못한 것은 정말로 유감스럽다.
1955 196:2.7 You would be neither shocked nor disturbed by some of Jesus’ strong pronouncements if you would only remember that he was the world’s most wholehearted and devoted religionist. He was a wholly consecrated mortal, unreservedly dedicated to doing his Father’s will. Many of his apparently hard sayings were more of a personal confession of faith and a pledge of devotion than commands to his followers. And it was this very singleness of purpose and unselfish devotion that enabled him to effect such extraordinary progress in the conquest of the human mind in one short life. Many of his declarations should be considered as a confession of what he demanded of himself rather than what he required of all his followers. In his devotion to the cause of the kingdom, Jesus burned all bridges behind him; he sacrificed all hindrances to the doing of his Father’s will.
2000 196:2.7 예수가 세상에서 아주 진심으로 헌신한 종교가였다는 것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너희는 그의 어떤 강경한 발언에 충격을 받거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아낌없이 몸을 바친, 온통 거룩하게 헌신한 필사자였다. 어렵게 보이는 말씀 가운데 많은 것은 추종자에게 내리는 명령이라기보다 믿음을 친히 고백한 것이요 헌신(獻身)의 서약이었다. 바로 이러한 한결같은 목적과 사심 없는 헌신으로 인하여 그는 짧은 일생에 인간의 지성을 정복하는 데 그렇게 특별히 진보할 수 있었다. 그의 선언 가운데 많은 것은 모든 추종자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부과한 요구를 고백한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하늘나라 운동에 헌신하면서, 예수는 지나간 다리를 모두 불살랐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있는 모든 장애물을 희생했다.
2001 CM 196:2.7 예수께서 세상에서 가장 진지하고 헌신적인 종교인이었음을 너희가 기억한다면, 그의 일부 강경한 발언 때문에 충격을 받거나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 뜻을 행하기에 거리낌 없이 일생을 바친, 전적으로 헌신한 필사자였다. 무정한 듯한 그의 말씀 가운데 다수는, 따르는 자들에게 주는 명령이라기보다, 본인의 신앙 고백과 헌신의 서약이었다. 바로 이런 오로지 한 가지 목적과 이타적 헌신 때문에, 그는 짧은 생애동안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는 일에 그토록 엄청난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가 선언한 말씀 가운데 다수는, 따르는 자들 전체에게 무엇을 요구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자신에게 부과한 요구를 고백한 것으로 간주돼야한다. 천국의 대의{大義}를 위하여 헌신하면서, 예수께서는 배수진{背水陣}을 쳤으며;아버지 뜻을 행하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희생시켰다.
2007 URKA 196:2.7 너희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진지하고 헌신적인 종교가였다는 것을 기억만 한다면, 너희는 그의 일부 강한 표현들 때문에 충격을 받거나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전적으로 정화(淨化)된 필사자,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남김없이 봉헌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명백한 강한 말씀들 중 많은 것들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명령보다 신앙의 개인적 고백과 헌신의 서약이었다. 바로 이러한 오로지 한 가지의 목적과 사심-없는 헌신이 그로 하여금 하나의 짧은 일생에 인간 마음을 정복하고 그토록 엄청난 진전을 이루게 하였다. 그의 선언들의 많은 것들은 그가 모든 그의 추종자들에게 요구한 것이라기보다 그 자신에게 요구한 것에 대한 고백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왕국의 원인이 되는 것에 대한 그의 헌신에서, 예수는 그가 건너온 모든 다리들을 불태웠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에 있는 모든 장애물들을 희생시켰다.
2025 196:2.7 예수가 세상에서 아주 진심으로 헌신한 종교가였다는 것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너희는 그의 어떤 강경한 발언에 충격을 받거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아낌없이 몸을 바친, 온통 거룩하게 헌신한 필사자였다. 어렵게 보이는 말씀 가운데 많은 것은 추종자에게 내리는 명령이기보다 믿음을 친히 고백한 것이요 헌신(獻身)의 서약이었다. 바로 이러한 한결같은 목적과 사심 없는 헌신으로 인하여 그는 짧은 일생에 인간의 지성을 정복하는 데 그렇게 특별히 진보할 수 있었다. 그의 선언 가운데 많은 것은 모든 추종자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부과한 요구를 고백한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하늘나라 운동에 헌신하면서, 예수는 지나간 다리를 모두 불살랐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있는 모든 장애물을 희생했다.
1955 196:2.8 Jesus blessed the poor because they were usually sincere and pious; he condemned the rich because they were usually wanton and irreligious. He would equally condemn the irreligious pauper and commend the consecrated and worshipful man of wealth.
2000 196:2.8 예수가 가난한 자를 축복한 것은 그들이 보통 성실하고 경건했기 때문이다. 부유한 자가 보통 바람을 피우고 신앙심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비난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종교가 없는 빈민을 비난하고, 거룩하게 헌신하는 경건한 부자를 칭찬할 것이다.
2001 CM 196:2.8 예수께서 가난한 자를 축복한 것은, 그들이 대개 진지하고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이며;부자를 비난한 것은, 그들이 대개 방종하고 신앙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비종교적인 가난뱅이를 비난하고, 헌신적이면서 경건한 부자를 칭찬할 것이다.
2007 URKA 196:2.8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개 진지하고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그들을 축복하였다; 부자들은 대개 방종하고 신앙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비난하였다. 그는 신앙심 없는 가난뱅이를 똑같이 비난하였을 것이고 헌신적인 신앙심 깊은 부자를 칭찬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1955 196:2.9 Jesus led men to feel at home in the world; he delivered them from the slavery of taboo and taught them that the world was not fundamentally evil. He did not long to escape from his earthly life; he mastered a technique of acceptably doing the Father’s will while in the flesh. He attained an idealistic religious life in the very midst of a realistic world. Jesus did not share Paul’s pessimistic view of humankind. The Master looked upon men as the sons of God and foresaw a magnificent and eternal future for those who chose survival. He was not a moral skeptic; he viewed man positively, not negatively. He saw most men as weak rather than wicked, more distraught than depraved. But no matter what their status, they were all God’s children and his brethren.
2000 196:2.9 예수는 세상에서 사람이 마음을 편안히 가지도록 이끌었다. 금기(禁忌)에 노예가 된 처지로부터 사람들을 구했고, 세상이 근본적으로 악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그는 땅의 생활을 벗어나기를 동경(憧憬)하지 않았다.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아버지의 뜻을 만족스럽게 행하는 기법을 통달했다. 현실인 세상의 바로 한가운데서 이상적 종교 생활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바울과 달리, 예수는 인류에 대하여 비관적 견해를 가지지 않았다. 주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라보았고, 살아남기를 택한 자에게 장대하고 영원한 앞날이 있음을 미리 알았다. 도덕 면에서 회의론자가 아니었고,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 눈으로 사람을 보았다. 모든 사람이 사악하기보다 약하다고, 타락하기보다 갈팡질팡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지위가 어떻든 상관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형제였다.
2001 CM 196:2.9 예수께서는, 사람이 세상에서 편안함을 느끼도록 인도했으며;금기{禁忌}에 노예 된 처지로부터 저희를 구했고, 세상이 근본적으로 악하지 않다는 것을 저희에게 가르쳤다. 이 세상 생애로부터 도피하기를 원치 않았으며;육신 속에 있는 동안에 아버지 뜻을 훌륭히 해내는 기법을 터득했다. 그는 현실 세계의 한 복판에서 이상적 종교 생활의 경지에 도달했다. 바울은 인류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를 가졌으나, 예수께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주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봤고, 생존하기로 선택한 그들 앞에 펼쳐질 장엄하고 영원한 미래를 내다봤다. 도덕적으로 비관적이지 않았으며;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아니라 긍정적인 견해를 가졌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이 사악하기보다 약하다고, 타락했다기보다 마음이 산란하다고 봤다. 그러나 그들의 처지가 어떻든지 상관없이,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였고 그의 형제였다.
2007 URKA 196:2.9 예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편안함을 느끼도록 인도하였다; 미신적인 금기에 노예가 된 상태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셨으며, 세상이 근본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는 지상의 일생으로부터의 도피하기를 갈망하지 않았다; 육신으로 있으면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행하는 기법을 터득하였다. 그는 실제적인 현실 세계 한 복판에서 이상적인 종교적 일생을 성취하였다. 예수는 바울이 지닌 인간에 대한 비관론적 견해를 갖지 않았다. 주(主)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아들들로 보셨고, 생존을 선택한 그들 앞에 펼쳐질 장엄하고 영원한 미래를 내다 보셨다. 그는 도덕적으로 회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부정적이 아니고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사악하기보다는 약하다고 보았으며, 타락하기보다는 마음이 산란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처지가 어떻든지 간에,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었으며 그의 형제들이었다.
2025 196:2.9 예수는 세상에서 사람이 마음을 편안히 가지도록 이끌었다. 금기(禁忌)에 노예가 된 처지에서 사람들을 구했고, 세상이 근본적으로 악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그는 땅의 생활을 벗어나기를 동경(憧憬)하지 않았다.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아버지의 뜻을 만족스럽게 행하는 기법을 통달했다. 현실인 세상의 바로 한가운데서 이상적 종교 생활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바울과 달리, 예수는 인류에 대하여 비관적 견해를 가지지 않았다. 주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바라보았고, 살아남기를 택한 자에게 장대하고 영원한 앞날이 있음을 미리 알았다. 도덕 면에서 회의론자가 아니었고,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 눈으로 사람을 보았다. 모든 사람이 사악하기보다 약하다고, 타락하기보다 갈팡질팡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지위가 어떻든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형제였다.
1955 196:2.10 He taught men to place a high value upon themselves in time and in eternity. Because of this high estimate which Jesus placed upon men, he was willing to spend himself in the unremitting service of humankind. And it was this infinite worth of the finite that made the golden rule a vital factor in his religion. What mortal can fail to be uplifted by the extraordinary faith Jesus has in him?
2000 196:2.10 그는 사람들에게 시간 세계와 영원 속에서 자신을 높이 평가하라고 가르쳤다. 사람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예수는 기꺼이 인류에게 끊임없이 봉사하는 데 몸을 바쳤다. 그의 종교에서 황금률을 필수 요인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유한자(有限者)의 무한한 가치였다. 어떤 필사자가 예수의 특별한 신임을 얻고서도 격려를 받지 않을 수 있는가?
2001 CM 196:2.10 그는 사람들에게, 시간세계에서 그리고 영원 속에서 그들 자신에게 높은 가치를 두라고 가르쳤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높이 평가했으므로, 사람을 위한 끊임없는 봉사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었다. 유한한 존재에게 이렇게 무한한 진가{眞價}가 있다고 평가했기 때문에, 그의 종교는 황금률을 핵심으로 삼았다. 예수께서 특별히 믿어주는데도 사기가 충천해지지 않을 필사자가 있을까?
2007 URKA 196:2.10 그는 사람들에게 시간 안에서 그리고 영원 안에서 그들 자신들에게 높은 가치를 두라고 가르쳤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인정한 이 높은 평가 때문에. 인간을 위한 끊임없는 봉사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시려고 하였다. 유한 존재에 대한 이 무한한 가치가 그의 종교에서 생명 요소인 황금률을 만들었다. 어떤 필사자가 예수가 가진 그에게 대한 특별한 신앙에 의해 높이 향상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025 196:2.10 그는 사람들에게 시간 세계와 영원 속에서 자신을 높이 평가하라고 가르쳤다. 사람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예수는 기꺼이 인류에게 끊임없이 봉사하는 데 몸을 바쳤다. 그의 종교에서 황금률을 필수 요인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유한자(有限者)의 무한한 가치였다. 어떤 필사자가 예수의 특별한 신임을 얻고서도 격려를 받지 않을 수 있는가?
1955 196:2.11 Jesus offered no rules for social advancement; his was a religious mission, and religion is an exclusively individual experience. The ultimate goal of society’s most advanced achievement can never hope to transcend Jesus’ brotherhood of men based on the recognition of the fatherhood of God. The ideal of all social attainment can be realized only in the coming of this divine kingdom.
2000 196:2.11 예수는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아무런 규칙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의 사명은 종교에 관한 것이었고, 종교는 순전히 개인의 체험이다. 사회가 성취할 가장 높은 궁극의 목적은 결코 사람들이 형제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뛰어넘기를 바랄 수 없고, 이것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인식에 기초를 둔다. 사회가 성취할 모든 이상은 오직 이 신의 나라가 올 때 이루어질 수 있다.
2001 CM 196:2.11 예수께서는 사회 발전을 위한 아무런 규율도 제공하지 않았으며;그의 사명은 종교적인 것이었고, 종교는 전적으로 개인의 체험이다. 최고 사회 진보를 성취하는 궁극적 목표라도,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깨달음을 근본으로 하는, 사람과 예수의 형제관계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 사회가 달성할 모든 이상{理想}은, 이런 신성한 나라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2007 URKA 196:2.11 예수는 사회 발전을 위한 아무런 규율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의 임무는 종교적이었고, 그리고 종교는 전적으로 개별적인 체험이다. 사회의 가장 진보된 성취의 궁극적 목표도 하느님의 아버지신분에 대한 깨달음에 기초한 사람들과 예수의 형제신분을 초월하기를 바랄 수 없다. 모든 사회적 달성에 대한 이상(理想)은 이 신성한 왕국의 도래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2025 196:2.11 예수는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아무런 규칙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의 사명은 종교에 관한 것이었고, 종교는 순전히 개인의 체험이다. 사회가 성취할 가장 높은 궁극의 목적은 결코 사람들이 형제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뛰어넘기를 바랄 수 없고, 이것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인식에 기초를 둔다. 사회가 성취할 모든 이상은 오직 이 신의 나라가 올 때 이루어질 수 있다.
3. THE SUPREMACY OF RELIGION
3. 종교의 우월성
3. 종교의 지존성
3. 종교의 최극위
3. 종교의 우월성
1955 196:3.1 Personal, spiritual religious experience is an efficient solvent for most mortal difficulties; it is an effective sorter, evaluator, and adjuster of all human problems. Religion does not remove or destroy human troubles, but it does dissolve, absorb, illuminate, and transcend them. True religion unifies the personality for effective adjustment to all mortal requirements. Religious faith—the positive leading of the indwelling divine presence—unfailingly enables the God-knowing man to bridge that gulf existing between the intellectual logic which recognizes the Universal First Cause as It and those positive affirmations of the soul which aver this First Cause is He, the heavenly Father of Jesus’ gospel, the personal God of human salvation.
2000 196:3.1 개인의 영적 종교적 체험은 필사자가 겪는 대부분의 문제에 효과적 해결책이며, 인간의 모든 문제를 효과 있게 분류하고 평가하고 조정한다. 종교는 인간의 걱정거리를 없애거나 사라지게 만들지 않지만, 이를 분해하고 흡수하고 밝게 비춰주고 초월한다. 참된 종교는 필사자의 모든 요구 조건에 효과적으로 순응하기 위하여 인격을 통일한다. 종교적 믿음―깃드는 신의 계심이 분명히 이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주의 첫째 근원을 그것으로 인식하는 지적 논리, 이 첫째 근원을 그분이라고 확언하는 혼의 분명한 주장,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어김없이 좁힐 수 있게 만들며, 예수의 복음에서 그분은 하늘 아버지요, 인간을 구원하는, 성격을 가진 하나님이다.
2001 CM 196:3.1 개인의 영적 종교 체험은, 필사자가 겪는 대부분의 곤경에 대한 효율적인 해결책이며;인간의 모든 문제를 효과적으로 분류하고 평가하고 조절한다. 종교는, 인간의 곤란한 문제를 없애거나 파괴하지는 않지만, 이를 용해하고 흡수하고 밝혀주고 초월한다. 참된 종교는 필사자의 모든 요구 사항에 효과적으로 적응하도록 인격을 통합한다. 종교적 신앙은--곧 내재하는 신성한 현존의 적극적 인도는--, 하나님을-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주의 제1 근원을 그것으로 인식하는 지적 논리와, 이 제1 근원을 그분이라고 단언하는 혼의 적극적 선언, 이 둘 사이의 간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만들며, 예수의 복음에서 그분은 하늘 아버지요, 인간을 구원하는 인격있는 하나님이시다.
2007 URKA 196:3.1 개인적, 영적 종교 체험은 대부분의 필사자의 어려움들에 대한 효율적인 해결책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 문제들의 효과적인 분류자, 평가자, 그리고 조절자이다. 종교는 인간의 근심들을 없애거나 파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들을 용해하고, 흡수하고, 밝혀주고, 그리고 초월한다. 참된 종교는 필사자의 요구들에 효과 있게 적응하도록 개인성을 통합한다. 종교적 신념 ─내재하는 신성한 현존의 적극적인 인도─ 은 하느님-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주의 첫째 원인을 그것으로 아는 지적인 논리와, 그리고 이 첫째 원인이 그 분 이며, 예수의 복음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며, 인간 구원의 개인적 하느님이라고 단언하는 혼의 적극적 선언들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에 다리를 놓게 한다.
2025 196:3.1 개인의 영적 종교적 체험은 필사자가 겪는 대부분의 문제에 효과적 해결책이며, 인간의 모든 문제를 효과 있게 분류하고 평가하고 조정한다. 종교는 인간의 걱정거리를 없애거나 사라지게 만들지 않지만, 이를 분해하고 흡수하고 밝게 비춰주고 초월한다. 참된 종교는 필사자의 모든 요구 조건에 효과적으로 순응하기 위하여 인격을 통일한다. 종교적 믿음 ― 깃드는 신의 계심이 분명히 이끄는 것 ― 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주의 첫째 근원을 그것으로 인식하는 지적 논리, 이 첫째 근원을 그분이라고 확언하는 혼의 분명한 주장,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어김없이 좁힐 수 있게 만들며, 예수의 복음에서 그분은 하늘 아버지요, 인간을 구원하는, 성격을 가진 하나님이다.
1955 196:3.2 There are just three elements in universal reality: fact, idea, and relation. The religious consciousness identifies these realities as science, philosophy, and truth. Philosophy would be inclined to view these activities as reason, wisdom, and faith—physical reality, intellectual reality, and spiritual reality. We are in the habit of designating these realities as thing, meaning, and value.
2000 196:3.2 우주 실체에는 꼭 세 가지 원소(元素)가 있으니, 사실ㆍ관념ㆍ관계이다. 종교적 의식은 이 실체들을 과학ㆍ철학ㆍ진리로서 식별한다. 철학은 이 활동을 이성ㆍ지혜ㆍ믿음―물리적 실체, 지적 실체, 영적 실체―로 보고 싶어한다. 우리는 이 실체들을 사물ㆍ의미ㆍ가치로 부르는 버릇이 있다.
2001 CM 196:3.2 우주 실체에는 정확히 세 요소가 있는데:사실과 관념과 관계다. 종교적 의식{意識}은 이런 실체들을, 과학과 철학과 진리로 간주한다. 철학은 이런 활동을, 이성과 지혜와 신앙으로--곧 물리적 실체와 지적 실체와 영적 실체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런 실체들을, 사물과 의미와 가치로 명시하는 습관이 있다.
2007 URKA 196:3.2 우주 실체에는 꼭 세 가지의 요소들이 있다; 사실, 관념, 그리고 관계이다. 종교적 의식은 이들 실체들을 과학, 철학, 그리고 진리로 정체화한다. 철학은 이 활동들을─물리적 실체, 지적 실체, 영적 실체─이성, 지혜, 그리고 신앙으로 보려는 경향을 갖곤 한다. 우리는 이 실체들을 물질, 의미, 그리고 가치로 명시하려는 습관에 있다.
2025 196:3.2 우주 실체에는 꼭 세 가지 원소(元素)가 있으니, 사실ㆍ관념ㆍ관계이다. 종교적 의식은 이 실체들을 과학ㆍ철학ㆍ진실로서 식별한다. 철학은 이 활동을 이성ㆍ지혜ㆍ믿음 ― 물리적 실체, 지적 실체, 영적 실체 ― 로 보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 실체들을 사물ㆍ의미ㆍ가치로 부르는 버릇이 있다.
1955 196:3.3 The progressive comprehension of reality is the equivalent of approaching God. The finding of God, the consciousness of identity with reality, is the equivalent of the experiencing of self-completion—self-entirety, self-totality. The experiencing of total reality is the full realization of God, the finality of the God-knowing experience.
2000 196:3.3 실체를 점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과 대등하다. 하나님을 찾아내는 것, 실체와 동일함을 의식하는 것은 자아 완성―자아 전체, 자아 총체―의 체험과 맞먹는다. 총 실체의 체험은 하나님을 충만히 깨닫는 것이요, 하나님을 아는 최종 체험이다.
2001 CM 196:3.3 실체에 대한 점진적 납득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과 대등하다.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 실체와 일치됨을 자각하는 것은, 자아-완성--곧 자아-전체, 자아-총체--을 체험하는 것과 대등하다. 실체를 전부 체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깨닫는 것 곧 하나님을-아는 체험을 완결하는 것이다.
2007 URKA 196:3.3 실체에 대한 진보적인 이해는 하느님께 접근하는 것에 상응한다. 하느님의 발견, 실체로서의 정체성을 의식함은 자아-완성─자아-전체성, 자아-총체성─을 체험하는 것에 상응한다. 전체적 실체의 체험은 하느님에 대한 충만한 실현, 하느님을-아는 체험의 최종이다.
2025 196:3.3 실체를 점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과 대등하다. 하나님을 찾아내는 것, 실체와 동일함을 의식하는 것은 자아 완성 ― 자아 전체, 자아 총체 ― 의 체험과 맞먹는다. 총 실체의 체험은 하나님을 충만히 깨닫는 것이요, 하나님을 아는 최종 체험이다.
1955 196:3.4 The full summation of human life is the knowledge that man is educated by fact, ennobled by wisdom, and saved—justified—by religious faith.
2000 196:3.4 인생의 총합은 사람이 사실로 교육받고, 지혜로 고귀하게 되며, 종교적 믿음으로 구원되는―정당하게 되는―것을 아는 것이다.
2001 CM 196:3.4 인간 생애에 대한 전체 요약은, 사람은 사실로 교육받고 지혜로 고상해지고 종교적 신앙으로 구원받는다는--곧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지식이다.
2007 URKA 196:3.4 인간 일생의 충만한 총합은 사람은 사실에 의해 교육되고, 지혜에 의해 고귀해지며, 종교적 신앙에 의해 구원되고-정당화된다는 앎이다.
1955 196:3.5 Physical certainty consists in the logic of science; moral certainty, in the wisdom of philosophy; spiritual certainty, in the truth of genuine religious experience.
2000 196:3.5 물리적 확실성은 과학의 논리(論理)에 있고, 도덕적 확실성은 철학의 지혜에, 영적 확실성은 진정한 종교적 체험의 진실함에 있다.
2001 CM 196:3.5 물리적 확실성은 과학의 논리에 있으며;도덕적 확실성은 철학의 지혜에 있으며;영적 확실성은 참된 종교 체험이라는 진리에 있다.
2007 URKA 196:3.5 물질적인 확실성은 과학의 논리에 있다; 도덕적인 확실성은 철학의 지혜에 있다; 영적 확실성은 참된 종교적 체험의 진리에 있다.
2025 196:3.5 물리적 확실성은 과학의 논리(論理)에 있고, 도덕적 확실성은 철학의 지혜에, 영적 확실성은 진정한 종교적 체험이 진실한가에 있다.
1955 196:3.6 The mind of man can attain high levels of spiritual insight and corresponding spheres of divinity of values because it is not wholly material. There is a spirit nucleus in the mind of man—the Adjuster of the divine presence. There are three separate evidences of this spirit indwelling of the human mind:
2000 196:3.6 지성이 전적으로 물질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지성은 높은 수준의 영적 통찰력과 그에 상당하는 신성한 가치 분야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의 지성 속에 영 알맹이가―신의 계심인 조절자가―있다. 인간의 지성에 이 영(靈)이 깃든다는 세 가지 증거가 따로 있다:
2001 CM 196:3.6 사람의 정신은, 전적으로 물질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영적 통찰력과, 그에 상응하는 신성한 가치 분야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의 정신 속에는 영 핵심이 있다--곧 신성한 현존인 섭리사가 있다. 인간의 정신에 이런 섭리사가 내재하고 있음에 대한, 서로 다른 세 가지 증거가 있다:
2007 URKA 196:3.6 사람의 마음은 전적으로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 통찰력의 높은 차원들과 가치들의 신성에 상응하는 영역들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에는 영의 핵─신성한 현존의 조절자─이 있다. 사람의 마음에 이 영 내주에 대한 서로 다른 세 개의 증거들이 있다:
2025 196:3.6 지성이 전적으로 물질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지성은 높은 수준의 영적 통찰력과 그에 상당하는 신성한 가치 분야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의 지성 속에 영 알맹이 ― 신의 계심인 조절자 ― 가 있다. 인간의 지성에 이 영(靈)이 깃든다는 세 가지 증거가 따로 있다:
1955 196:3.7 1. Humanitarian fellowship—love. The purely animal mind may be gregarious for self-protection, but only the spirit-indwelt intellect is unselfishly altruistic and unconditionally loving.
2000 196:3.7 1. 인도주의적 교제―사랑. 순전한 동물 지성은 자아를 보호하려고 함께 살지 모르지만, 오직 영이 깃든 지능이 사심 없이 이타적(利他的)이고 조건 없이 사랑하는 성질이 있다.
2001 CM 196:3.7 1. 인도주의적 교제 --사랑. 순전히 동물적인 정신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하여 집단을 이룰 수 있겠지만, 영이 내주하는 지능만이, 사심{私心}없이 이타적일 수 있고,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다.
2007 URKA 196:3.7 1. 인도주의적 동료관계─사랑. 순전히 동물적인 마음이 자아-보호를 위하여 집단을 이룰 수는 있다, 그러나 영이 내주하는 지성만이 사심-없이 이타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2025 196:3.7 1. 인도주의적 교제 ― 사랑. 순전한 동물 지성은 자아를 보호하려고 함께 살지 모르지만, 오직 영이 깃든 지능이 사심 없이 이타적(利他的)이고 조건 없이 사랑하는 성질이 있다.
1955 196:3.8 2. Interpretation of the universe—wisdom. Only the spirit-indwelt mind can comprehend that the universe is friendly to the individual.
2000 196:3.8 2. 우주의 해석―지혜. 영이 깃든 지성만이 우주가 개인에게 친절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2001 CM 196:3.8 2. 우주에 대한 해석 --지혜. 우주가 각 개인에게 호의적임을, 영이 내주하는 정신만 납득할 수 있다.
2007 URKA 196:3.8 2. 우주의 해석─지혜. 우주가 개별존재에게 친밀하다는 것을 영이-내주하는 마음만이 이해할 수 있다.
2025 196:3.8 2. 우주의 해석 ― 지혜. 영이 깃든 지성만이 우주가 개인에게 친절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1955 196:3.9 3. Spiritual evaluation of life—worship. Only the spirit-indwelt man can realize the divine presence and seek to attain a fuller experience in and with this foretaste of divinity.
2000 196:3.9 3. 인생의 영적 평가―예배. 영이 깃든 사람만이 신의 계심을 깨닫고, 이처럼 신성(神性)을 미리 맛보는 가운데, 그리고 그와 함께 더욱 충만한 체험을 얻기를 추구할 수 있다.
2001 CM 196:3.9 3. 인생에 대한 영적 평가 --경배. 오직 영이 내주하는 사람만이 신의 현존을 깨달을 수 있고, 신성을 미리 맛보는 더 온전한 체험을 달성하고자 추구한다.
2007 URKA 196:3.9 3. 일생의 영적인 평가─경배. 오직 영이 내주하는 사람만이 신성한 현존을 깨달을 수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신성의 미리 맛보는 것 안에서 보다 충만한 체험을 얻으려고 한다.
2025 196:3.9 3. 인생의 영적 평가 ― 예배. 영이 깃든 사람만이 신의 계심을 깨닫고, 이처럼 신성(神性)을 미리 맛보는 가운데, 그리고 그와 함께 더욱 충만한 체험을 얻기를 추구할 수 있다.
1955 196:3.10 The human mind does not create real values; human experience does not yield universe insight. Concerning insight, the recognition of moral values and the discernment of spiritual meanings, all that the human mind can do is to discover, recognize, interpret, and choose.
2000 196:3.10 인간의 지성은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지 않으며, 인간의 체험은 우주를 보는 통찰력을 낳지 않는다. 통찰력, 곧 도덕적 가치를 인식하고 영적 의미를 헤아리는 것에 관하여 말하면, 인간의 지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발견ㆍ인식(認識)ㆍ해석, 그리고 선택밖에 없다.
2001 CM 196:3.10 인간의 정신은 참된 가치를 창조하지 않으며;인간의 체험은 우주적 통찰력을 생기게 하지 않는다. 도덕적 가치관을 인식하고 영적 의미를 식별하는 통찰력에 관하여, 인간의 정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발견과 인식과 해석 및 선택이 전부다.
2007 URKA 196:3.10 인간 마음은 실제 가치들을 창조하지 않는다; 인간의 체험은 우주적 통찰력을 주지 않는다. 통찰력, 도덕적 가치들을 인식과 영적 의미들을 식별함에 대하여 인간 마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발견하고, 인식하며, 해석하고, 그리고 선택하는 것이다.
2025 196:3.10 인간의 지성은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지 않으며, 인간의 체험은 우주를 보는 통찰력을 낳지 않는다. 통찰력, 곧 도덕적 가치를 인식하고 영적 의미를 헤아리는 것에 관하여 말하면, 인간의 지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발견ㆍ인식(認識)ㆍ해석, 그리고 선택밖에 없다.
1955 196:3.11 The moral values of the universe become intellectual possessions by the exercise of the three basic judgments, or choices, of the mortal mind:
2000 196:3.11 우주의 도덕적 가치는 필사 지성이 세 가지 기본적 판단을 내림으로, 곧 선택함으로, 지적 소유물이 된다:
2001 CM 196:3.11 우주의 도덕적 가치관은 다음과 같은 필사 정신의 세 가지 기본 판단 곧 선택함으로 지적 재산이 될 수 있다:
2007 URKA 196:3.11 우주의 도덕적 가치들은 필사자 마음의 세 가지 기본 판단들, 혹은 선택들에 의하여 지적 소유들이 될 수 있다: 자아의-판단─도덕적 선택. 사회적-판단─윤리적 선택. 하느님의-판단─종교적 선택.
2025 196:3.11 우주의 도덕적 가치는 필사 지성이 세 가지 기본적 판단을 내림으로, 곧 선택함으로, 지적 소유물이 된다:
1955 196:3.12 1. Self-judgment—moral choice.
2000 196:3.12 1. 자아의 판단―도덕적 선택.
2001 CM 196:3.12 1. 자아-판단 --도덕적 선택.
2007 URKA 196:3.12 자아의-판단─도덕적 선택.
2025 196:3.12 1. 자아의 판단 ― 도덕적 선택.
1955 196:3.13 2. Social-judgment—ethical choice.
2000 196:3.13 2. 사회적 판단―윤리적 선택.
2001 CM 196:3.13 2. 사회적-판단 --윤리적 선택.
2007 URKA 196:3.13 사회적-판단─윤리적 선택.
2025 196:3.13 2. 사회적 판단 ― 윤리적 선택.
1955 196:3.14 3. God-judgment—religious choice.
2000 196:3.14 3. 하나님에 대한 판단―종교적 선택.
2001 CM 196:3.14 3. 하나님에 대한-판단 --종교적 선택.
2007 URKA 196:3.14 하느님의-판단─종교적 선택.
2025 196:3.14 3. 하나님에 대한 판단 ― 종교적 선택.
1955 196:3.15 Thus it appears that all human progress is effected by a technique of conjoint revelational evolution.
2000 196:3.15 따라서 인간의 모든 진보는 계시와 진화의 공동 기법으로 실현되는 듯하다.
2001 CM 196:3.15 따라서 인간의 모든 진보는 계시의 진화라는 공동 기법으로 이뤄지는 것 같다.
2007 URKA 196:3.15 이렇게 모든 인간 진보는 공동의 계시적 진화의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2025 196:3.15 따라서 인간의 모든 진보는 계시적 진화라는 공동 기법으로 실현되는 듯하다.
1955 196:3.16 Unless a divine lover lived in man, he could not unselfishly and spiritually love. Unless an interpreter lived in the mind, man could not truly realize the unity of the universe. Unless an evaluator dwelt with man, he could not possibly appraise moral values and recognize spiritual meanings. And this lover hails from the very source of infinite love; this interpreter is a part of Universal Unity; this evaluator is the child of the Center and Source of all absolute values of divine and eternal reality.
2000 196:3.16 사랑을 주는 신다운 자가 사람 속에 살지 않으면, 사람은 사심 없이 영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 해석하는 자가 지성 속에 살지 않으면, 우주의 통일성을 참으로 깨달을 수 없다. 평가하는 자가 사람과 함께 거하지 않으면, 사람은 도저히 도덕적 가치를 평가하고 영적 의미를 헤아릴 수 없다. 이 사랑하는 자는 무한한 사랑의 바로 그 근원으로부터 온다. 이 해석자는 우주의 통일의 일부이며, 이 평가자는 신성하고 영원한 실체에 담긴 모든 절대 가치의 중심 근원의 자식이다.
2001 CM 196:3.16 신성한 연인{戀人}이 사람 속에 살지 않는다면, 사람은 사심 없이 영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 해석하는 존재가 정신 속에 살지 않으면, 사람은 우주의 통일성을 진정으로 깨달을 수 없다. 평가하는 존재가 사람과 함께 거하지 않으면, 사람은 도덕적 가치관을 평가할 수 없고 영적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연인은 무한한 사랑의 바로 그 근원으로부터 내려오며;이 해석자는 우주의 통일성의 한 부분이며;이 평가자는, 신성하고 영원한 실체의 전체 절대 가치인 중심 및 근원의 자녀다.
2007 URKA 196:3.16 사랑에 빠진 신성한 연인이 사람 속에 살지 않으면, 사심-없이 그리고 영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 해석자가 마음속에 살지 않는다면, 사람은 우주의 합일성을 진정으로 깨달을 수 없다. 평가자가 사람과 함께 거주하지 않으면, 사람은 도저히 도덕적 가치를 평가할 수도 없고 영적 의미들을 깨달을 수도 없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 연인은 무한한 사랑의 바로 그 근원으로부터 내려온다; 이 해석자는 우주적 합일성의 한 부분이다; 이 평가자는 신성하고 영원한 실체의 모든 절대 가치들의 중심과 근원의 자녀이다.
2025 196:3.16 사랑을 주는 신다운 자가 사람 속에 살지 않으면, 사람은 사심 없이 영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 해석하는 자가 지성 속에 살지 않으면, 우주의 통일성을 참으로 깨달을 수 없다. 평가하는 자가 사람과 함께 거하지 않으면, 사람은 도저히 도덕적 가치를 평가하고 영적 의미를 헤아릴 수 없다. 이 사랑하는 자는 무한한 사랑의 바로 그 근원에서 온다. 이 해석자는 우주의 통일의 일부이며, 이 평가자는 신성하고 영원한 실체에 담긴 모든 절대 가치의 중심 근원의 자식이다.
1955 196:3.17 Moral evaluation with a religious meaning—spiritual insight—connotes the individual’s choice between good and evil, truth and error, material and spiritual, human and divine, time and eternity. Human survival is in great measure dependent on consecrating the human will to the choosing of those values selected by this spirit-value sorter—the indwelling interpreter and unifier. Personal religious experience consists in two phases: discovery in the human mind and revelation by the indwelling divine spirit. Through oversophistication or as a result of the irreligious conduct of professed religionists, a man, or even a generation of men, may elect to suspend their efforts to discover the God who indwells them; they may fail to progress in and attain the divine revelation. But such attitudes of spiritual nonprogression cannot long persist because of the presence and influence of the indwelling Thought Adjusters.
2000 196:3.17 종교적 의미를―영적 통찰력을―가진 도덕적 평가는 선과 악, 진실과 잘못,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인간다운 것과 신다운 것, 시간과 영원 사이에 개인이 선택함을 가리킨다. 인간이 살아남는 것은 상당히 많이 이 영적 가치 분류자가―깃드는 해석자이자 통일자가―골라놓은 가치를 선택하려고 인간의 의지(意志)를 거룩하게 바치는 데 달려 있다. 개인의 종교적 체험은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니, 하나는 인간의 지성 속에서 발견하는 단계요, 하나는 깃드는 신다운 영이 계시하는 단계이다. 지나치게 세상에 익숙하거나 또는 종교가라고 공언하는 자들의 경건치 못한 행위의 결과로서, 한 사람 또는 한 세대의 사람들조차 안에 깃드는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그만둘 수 있다. 신의 계시(啓示)를 받으면서 진보하지 못하거나 그 계시에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부진한 그러한 태도는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계심과 영향 때문에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다.
2001 CM 196:3.17 종교적 의미를--곧 영적 통찰력을-- 갖는 도덕적 평가는, 선과 악, 진리와 오류, 물질과 영, 인간과 신성, 시간과 영원 사이에 개인이 선택함을 암시한다. 인간의 생존은 영적 가치 분류자--곧 내주하는 해석자이자 통합자--가 선정한 그런 가치를,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전념하여 선택하는가에 상당히 많이 달려있다. 개인의 종교 체험은 두 단계로 구성되는데:인간 정신 속에서 발견하는 단계와, 내주하는 신성한 영이 계시하는 단계다. 지나치게 고상하거나, 스스로 종교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불경스럽게 행동한 결과로, 한 개인 또는 심지어 한 세대의 사람들이, 자기에게 내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될 수 있으며;신성한 계시를 더 이상 받지 못하거나 그 계시를 접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내주하는 사고 섭리사 현존과 영향 때문에, 영적 진행과정이 없는 그런 태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2007 URKA 196:3.17 종교적 의미─영적 통찰력─를 갖는 도덕적 평가는 선과 악, 진리와 실수, 물질과 영, 인간과 신성한 것, 시간과 영원 사이에서 개별적 선택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존은 영적 가치 분류자─내주하는 해석자이며 통합자─에 의해 선정된 그러한 가치들을 선택하는 일에 인간의 의지를 헌납하는 것에 상당히 많이 의존한다. 개인적 종교 체험은 두 위상으로 구성된다; 인간 마음속에서의 발견과 내재하는 신성한 영에 의한 계시이다. 지나친 억지이론을 통하여 또는 공언된 종교가들의 비종교적 행위의 결과로 한 사람, 심지어 사람들의 한 세대가 그들에게 내주하는 하느님을 발견하려는 그들의 노력들을 유보하도록 결정할 수 있다; 그들은 신성한 계시 안에서 진보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것에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내주하는 생각 조절자의 현존과 영향 때문에, 영적으로 진보하지 못하는 그러한 태도들은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2025 196:3.17 종교적 의미 ― 영적 통찰력 ― 을 가진 도덕적 평가는 선과 악, 진실과 잘못, 물질인 것과 영적인 것, 인간다운 것과 신다운 것, 시간과 영원 사이에 개인이 선택함을 가리킨다. 인간이 살아남는 것은 상당히 많이 이 영적 가치 분류자 ― 깃드는 해석자이자 통일자 ― 가 골라 놓은 가치를 선택하려고 인간의 의지(意志)를 거룩하게 바치는 데 달려 있다. 개인의 종교적 체험은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니, 하나는 인간의 지성 속에서 발견하는 단계요, 하나는 깃드는 신다운 영이 계시하는 단계이다. 지나치게 세상에 익숙하거나 또는 종교가라고 공언하는 자들의 경건치 못한 행위의 결과로서, 한 사람 또는 한 세대의 사람들조차 안에 깃드는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그만둘 수 있다. 신의 계시(啓示)를 받으면서 진보하지 못하거나 그 계시에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부진한 그러한 태도는 깃드는 생각 조절자의 계심과 영향 때문에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다.
1955 196:3.18 This profound experience of the reality of the divine indwelling forever transcends the crude materialistic technique of the physical sciences. You cannot put spiritual joy under a microscope; you cannot weigh love in a balance; you cannot measure moral values; neither can you estimate the quality of spiritual worship.
2000 196:3.18 신이 깃드는 현실을 깨닫는 이 심오한 체험은 언제까지나 자연 과학의 투박한 유물론 기법을 초월한다. 너희는 영적 기쁨을 현미경 밑에 놓을 수 없고, 사랑을 저울에 달 수 없고, 도덕적 가치를 자로 잴 수 없다. 영적 예배의 질(質)을 수치로 어림잡을 수도 없다.
2001 CM 196:3.18 영원히 내주하는 신의 실재에 대한 이런 의미심장한 체험은, 자연 과학의 조잡한 유물론적 기법을 초월한다. 너희는, 영적 기쁨을 현미경 아래에 놓고 볼 수 없으며;사랑을 저울에 달아 볼 수 없으며;도덕적 가치관을 자로 잴 수 없으며;또한 영적 경배의 질{質}을 평가할 수도 없다.
2007 URKA 196:3.18 내주하는 신성한 실체에 대한 심오한 체험은 물리적 자연 과학들의 조잡한 물질주의적 방법을 언제까지나 초월한다. 너희는 영적 기쁨을 현미경 아래에 놓고 볼 수는 없다: 너희는 사랑을 저울에 달 수 없다: 너희는 도덕적 가치들 측정할 수 없다: 또한 영적 경배의 본질특성을 추정할 수도 없다.
2025 196:3.18 신이 깃드는 현실을 깨닫는 이 심오한 체험은 언제까지나 자연 과학의 투박한 유물론 기법을 초월한다. 너희는 영적 기쁨을 현미경 밑에 놓을 수 없고, 사랑을 저울에 달 수 없고, 도덕적 가치를 자로 잴 수 없다. 영적 예배의 질(質)을 수치로 어림잡을 수도 없다.
1955 196:3.19 The Hebrews had a religion of moral sublimity; the Greeks evolved a religion of beauty; Paul and his conferees founded a religion of faith, hope, and charity. Jesus revealed and exemplified a religion of love: security in the Father’s love, with joy and satisfaction consequent upon sharing this love in the service of the human brotherhood.
2000 196:3.19 히브리인은 도덕적으로 숭고한 종교를 가졌고, 그리스인은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종교를 발전시켰으며, 바울, 그리고 함께 의논한 자들은 믿음ㆍ소망ㆍ자선의 종교를 창시했다. 예수는 사랑의 종교, 즉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는 보장과 함께, 인간의 형제 정신에 봉사하면서, 이 사랑을 나누는 결과로 기쁨과 만족을 얻는 종교를 계시하고 본보기로 보였다.
2001 CM 196:3.19 히브리인은 도덕적으로 숭고한 종교를 가졌으며;그리스인은 미{美}의 종교를 발전시켰으며;바울과 그 수제자들은, 신앙과 희망과 자비의 종교를 세웠다. 예수께서는 사랑의 종교:즉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안심하는 종교, 그리고 인간이 형제관계로 봉사하면서 이 사랑을 나누는 결과로 얻는 기쁨과 만족감이 있는 종교를 계시했고 예증{例證}했다.
2007 URKA 196:3.19 히브리인들은 도덕적으로 절정에 달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미(美)의 종교를 발전시켰다; 바울과 그의 의논 상대자들은 신앙, 소망, 그리고 박애의 종교를 기초하였다. 예수는 사랑의 종교: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의 보호, 인간 형제신분의 봉사에 이 사랑을 나누는 결과로 얻어지는 즐거움과 만족을 보여주었고 예시하였다.
1955 196:3.20 Every time man makes a reflective moral choice, he immediately experiences a new divine invasion of his soul. Moral choosing constitutes religion as the motive of inner response to outer conditions. But such a real religion is not a purely subjective experience. It signifies the whole of the subjectivity of the individual engaged in a meaningful and intelligent response to total objectivity—the universe and its Maker.
2000 196:3.20 깊이 생각하여 도덕적 결정을 내릴 때마다, 사람은 즉시 혼(魂)에 새로이 신(神)이 쳐들어오는 것을 체험한다. 도덕적 선택은 외부 조건에 대하여 안에서 반응하는 동기로서 종교가 된다. 그러나 그러한 진정한 종교는 순전히 주관적 체험이 아니다. 그런 종교는 객관적 총체―우주와 그 창조주―에 대하여 의미 깊게, 총명하게 반응하는 개인의 주관성 전체를 의미한다.
2001 CM 196:3.20 사려 깊은 도덕적 선택을 할 때마다, 사람은 자신의 혼 속에 신성한 자극이 새로 일어나는 것을 즉시 체험한다. 도덕적 선택은, 외부 조건에 대한 내적 반응의 동기로서, 종교의 일부분이 된다. 그러나 그런 진정한 종교는 순전히 주관적인 체험은 아니다. 그것은 객관성 총체--곧 우주와 그 조물주--에 대하여 의미심장하게 지성적으로 응답하는 개인의 주관성 전체를 뜻한다.
2007 URKA 196:3.20 사람은 사려 깊은 도덕적 선택을 할 때마다, 그는 그의 혼 속에 새로운 신성한 침투를 즉시 체험한다. 도덕적 선택은 종교를 외부의 조건들에 대한 내적인 반응의 동기로 형성한다. 그러나 그러한 실제 종교는 순전히 주관적인 체험은 아니다. 그것은 전체적인 객관성-우주와 그 조물주-에 대한 의미 있고 그리고 지능적인 반응에 몰두되어 있는 개별존재 주관성의 총체를 의미한다.
2025 196:3.20 깊이 생각하여 도덕적 결정을 내릴 때마다, 사람은 즉시 혼(魂)에 새로이 신(神)이 쳐들어오는 것을 체험한다. 도덕적 선택은 외부 조건에 대하여 안에서 반응하는 동기로서 종교가 된다. 그러나 그러한 진정한 종교는 순전히 주관적 체험이 아니다. 그런 종교는 객관적 총체 ― 우주와 그 창조주 ― 에 대하여 의미 깊게, 총명하게 반응하는 개인의 주관성 전체를 의미한다.
1955 196:3.21 The exquisite and transcendent experience of loving and being loved is not just a psychic illusion because it is so purely subjective. The one truly divine and objective reality that is associated with mortal beings, the Thought Adjuster, functions to human observation apparently as an exclusively subjective phenomenon. Man’s contact with the highest objective reality, God, is only through the purely subjective experience of knowing him, of worshiping him, of realizing sonship with him.
2000 196:3.21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름답고 초월적인 체험은 순전히 주관적이라고 해서 단순히 정신의 환상은 아니다. 필사 존재와 관련되고 참으로 신다운, 하나의 객관적 실체, 생각 조절자는 인간이 지켜보기에 순전히 주관적 현상으로서 작용하는 듯이 보인다. 사람이 가장 높은 객관적 실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은 오직 그를 알고 예배하고 그의 아들임을 깨닫는, 순전히 주관적 체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2001 CM 196:3.21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름답고 숭고한 체험은, 너무나 순전히 주관적이라고 해서 단순히 심령적 착각이 될 수는 없다. 필사 존재들과 관련돼있는 단 하나의 신성하고 객관적인 실체인 사고 섭리사는, 인간이 관찰하기에, 순전히 주관적 현상으로서 작용하는 듯이 보인다. 인간이 최고 객관적 실체인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은, 그를 알고 그에게 경배 드리고 그의 아들임을 깨닫는, 순전히 주관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이뤄진다.
2007 URKA 196:3.21 사랑하고 사랑받는 절묘하고 초월적인 체험은, 너무 순수하게 주관적이라고 해서, 단순히 심리적 환상은 아니다. 필사 존재들과 연관되어 있는 어떤 진실로 신성하고 객관적인 실체, 생각 조절자는 배타적인 주관적 현상으로서 명백하게 인간 관찰에 대하여 기능하고 있다. 가장 높은 객관적 실체, 하느님과 사람의 접촉은 오직 그를 알고, 그를 경배하고, 그와의 아들관계를 깨닫는 순수한 주관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2025 196:3.21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름답고 초월적인 체험은 순전히 주관적이라고 해서 단순히 정신의 환상은 아니다. 필사 존재와 관련되고 참으로 신다운, 하나의 객관적 실체, 생각 조절자는 인간이 지켜보기에 순전히 주관적 현상으로서 작용하는 듯이 보인다. 사람이 가장 높은 객관적 실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은 오직 그를 알고 예배하고 그의 아들임을 깨닫는, 순전히 주관적 체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1955 196:3.22 True religious worship is not a futile monologue of self-deception. Worship is a personal communion with that which is divinely real, with that which is the very source of reality. Man aspires by worship to be better and thereby eventually attains the best.
2000 196:3.22 참된 종교적 예배는 자아를 속이는, 쓸데없는 혼잣말이 아니다. 예배는 신답게 실재하는 것, 실체의 바로 그 근원인 것과 몸소 교제하는 것이다. 사람은 예배로 인하여 더 나아질 생각을 품고, 그렇게 함으로 궁극에는 최선에 이른다.
2001 CM 196:3.22 참된 종교적 경배는 자기 기만적인 쓸데없는 독백이 아니다. 경배는 신성하게 실제적인 것, 즉 실체의 바로 그 근원인 것과 몸소 교류함이다. 사람은 경배함으로써 좀 더 나아지기를 염원하는데, 그것 때문에 결국 가장 높은 상태에 도달한다.
2007 URKA 196:3.22 진정한 종교적 경배는 자아-기만의 헛된 혼자만의 독백이 아니다. 경배는 신성하게 실제적인 것, 실체의 바로 그 근원과의 개인적 교제이다. 사람은 경배로서 더 나아지기를 갈망하며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결국에는 최상에 이른다.
2025 196:3.22 참된 종교적 예배는 자아를 속이는, 쓸데없는 혼잣말이 아니다. 예배는 신답게 실재하는 것, 실체의 바로 그 근원인 것과 몸소 교제하는 것이다. 사람은 예배로 인하여 더 나아질 생각을 품고, 그렇게 함으로 궁극에는 최선에 이른다.
1955 196:3.23 The idealization and attempted service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is not a substitute for genuine religious experience—spiritual reality. Psychology and idealism are not the equivalent of religious reality. The projections of the human intellect may indeed originate false gods—gods in man’s image—but the true God-consciousness does not have such an origin. The God-consciousness is resident in the indwelling spirit. Many of the religious systems of man come from the formulations of the human intellect, but the God-consciousness is not necessarily a part of these grotesque systems of religious slavery.
2000 196:3.23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을 이상으로 삼고 이를 위하여 봉사하려는 시도는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영적 실체를―대신하는 물건이 아니다. 심리학과 유심론(唯心論)은 종교적 실체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 지능이 추정하는 것은 정말로 거짓 신―사람 모습을 입은 신―을 창시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참으로 의식하는 상태는 그런 기원을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 의식(意識)은 깃드는 영 안에 거한다. 사람이 만든 많은 종교적 체계는 인간 지능이 빚은 것으로부터 생겨나지만, 하나님 의식이 반드시, 괴상한 이 종교적 노예 체계의 일부는 아니다.
2001 CM 196:3.23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을 이상으로 삼아서 봉사하려는 시도가 순수한 종교 체험을--곧 영적 실체를-- 대신할 수 없다. 심리학과 관념론은 종교적 실체와 대등하지 않다. 인간 지능을 투영시킴으로써 잘못된 신들--곧 사람 형상의 신들--을 만들었겠지만, 참된 하나님-인식은 그렇게 기원되지 않는다. 하나님-인식은 내주하는 영 안에 존재한다. 사람이 만든 여러 종교 체계는 인간 지능이 고안해냄으로써 생기지만, 하나님을-인식함이 이런 우스꽝스런 종교적 노예 체계의 일부분일 필요는 없다.
2007 URKA 196:3.23 진리(眞), 아름다움(美), 선(善)에 대한 이상화(理想化)와 시도되는 봉사는 순수한 종교 체험,─영적(靈的) 실체─의 대용품이 아니다. 심리학과 이상주의는 종교적 실체와 동등한 것이 아니다. 인간 지성의 구체적 투사 활동들이 거짓의 하느님들─사람 형상의 하느님들─을 창작하였다, 그러나 참된 하느님을-의식함은 그러한 기원(起源)을 가지지 않는다. 하느님을-의식함은 내주하는 영 속에 살고 있다. 사람의 종교 체계들 대부분은 인간 지능이 꾸며서 갖춘 것에서 왔다, 그러나 하느님을-의식함은 종교적 노예제도의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체계들의 일부가 될 필요가 없다.
2025 196:3.23 진실ㆍ아름다움ㆍ선을 이상으로 삼고 이를 위하여 봉사하려는 시도는 진정한 종교적 체험 ― 영적 실체 ― 를 대신하는 물건이 아니다. 심리학과 유심론(唯心論)은 종교적 실체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 지능이 추정하는 것은 정말로 거짓 신 ― 사람 모습을 입은 신 ― 을 창시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참으로 의식하는 상태는 그런 기원을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 의식(意識)은 깃드는 영 안에 거한다. 사람이 만든 많은 종교적 체계는 인간 지능이 빚은 것에서 생겨나지만, 하나님 의식이 반드시, 괴상한 이 종교적 노예 체계의 일부는 아니다.
1955 196:3.24 God is not the mere invention of man’s idealism; he is the very source of all such superanimal insights and values. God is not a hypothesis formulated to unify the human concepts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he is the personality of love from whom all of these universe manifestations are derived. The truth, beauty, and goodness of man’s world are unified by the increasing spirituality of the experience of mortals ascending toward Paradise realities. The unity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can only be realized in the spiritual experience of the God-knowing personality.
2000 196:3.24 하나님은 단지 사람의 유심론(唯心論)이 발명한 물건이 아니라, 동물을 뛰어넘는 모든 그러한 통찰력과 가치의 바로 그 근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진리ㆍ아름다움ㆍ선 개념을 통일하려고 지어낸 가설(假說)이 아니다. 사랑의 성격자이며, 그로부터 이 모든 우주 명시가 파생된다. 사람의 세계에 있는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은 파라다이스 실체들을 향하여 올라가는 필사자 체험의 영적 성향이 높아짐으로 통일된다.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의 통일은 오로지 하나님을 아는 인격의 영적 체험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2001 CM 196:3.24 하나님은 단지 사람의 관념론의 발명품이 아니며;모든 초동물적 통찰력과 가치의 근원이다. 하나님은,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이라는 인간 개념을 통합하려고 만들어낸 가설이 아니며;그분으로부터 모든 우주 현상이 나타나는 사랑의 인격체시다. 사람이 사는 세상의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은, 낙원이라는 실체를 향해 상승하는 필사자의 체험을 통해서 증가하는 영성으로 말미암아 통합된다.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의 통일은, 오직 하나님을-아는 인격의 영적 체험 안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2007 URKA 196:3.24 하느님은 단순히 사람의 이상주의의 창안이 아니다; 그는 모든 이러한 초(超)동물적인 통찰력들과 가치들의 바로 그 근원이다. 하느님은 인간들의 진, 선, 미의 개념을 통합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가설이 아니다; 그는 그로부터 모든 이들 우주 현시활동들이 기원된 사랑의 개인성이다. 인간 세상의 진리(眞), 아름다움(美), 선(善)은 파라다이스의 실체들을 향하여 상승하는 필사자들의 체험의 증가하는 영성(靈性)에 의해 통합된다. 진리(眞), 아름다움(美), 선(善)의 합일은 오로지 하느님을-아는 개인성의 영적 체험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2025 196:3.24 하나님은 단지 사람의 유심론(唯心論)이 발명한 물건이 아니라, 동물을 뛰어 넘는 모든 그러한 통찰력과 가치의 바로 그 근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진실ㆍ아름다움ㆍ선 개념을 통일하려고 지어낸 가설(假說)이 아니다. 사랑의 성격자이며, 그로부터 이 모든 우주 명시가 파생된다. 사람의 세계에 있는 진실ㆍ아름다움ㆍ선은 파라다이스 실체들을 향하여 올라가는 필사자 체험의 영적 성향이 높아짐으로 통일된다. 진실ㆍ아름다움ㆍ선의 통일은 오로지 하나님을 아는 인격의 영적 체험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1955 196:3.25 Morality is the essential pre-existent soil of personal God-consciousness, the personal realization of the Adjuster’s inner presence, but such morality is not the source of religious experience and the resultant spiritual insight. The moral nature is superanimal but subspiritual. Morality is equivalent to the recognition of duty, the realization of the existence of right and wrong. The moral zone intervenes between the animal and the human types of mind as morontia functions between the material and the spiritual spheres of personality attainment.
2000 196:3.25 도덕성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 조절자가 안에 계심을 몸소 깨닫는 데 필수인 선재(先在)하는 토양이지만, 그러한 도덕성은 종교적 체험과 그 결과로 생기는 영적 통찰력의 근원이 아니다. 도덕적 성품은 동물을 뛰어넘지만 영 밑에 있다. 도덕성은 의무를 인식하는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존재함을 깨닫는 것과 같다. 인격이 달성하는 물질 분야와 영적 분야 사이에 상물질이 작용하는 것 같이, 도덕의 구역은 동물 지성과 인간 종류의 지성 사이에 끼어 있다.
2001 CM 196:3.25 도덕성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인식하는 데, 즉 섭리사의 내적 현존을 개인적으로 깨닫는 데 꼭 필요한 선재{先在}하는 토양이지만, 그런 도덕성은 종교 체험과 그 결과로 생기는 영적 통찰력의 근원이 아니다. 도덕적 본성은 동물을 뛰어넘지만 영적이지는 않다. 도덕성은 의무를 인식함, 즉 옳고 그름이 실재함을 깨닫는 것과 같다. 인격이 달성하는 물질 분야와 영적 분야 사이에서 모론시아가 작용하듯이, 도덕의 범주는 동물 유형의 정신과 인간 유형의 정신 사이에 끼어있다.
2007 URKA 196:3.25 도덕은 조절자의 내적 현존에 대한 개인적 실현인, 개인적인 하느님-의식에 꼭 필요한 선재하는 토양이다, 그러나 그러한 도덕은 종교적 체험과 결국 생겨나는 영적 통찰력의 근원은 아니다. 도덕의 본성은 초(超)동물적이다 그러나 영에 종속적이다. 도덕은 의무의 인식, 옳고 그른 실존에 대한 깨달음과 동등하다. 모론시아가 개인성 달성의 영적 영역과 물질 영역사이에서 작용하듯이 도덕의 범주는 동물과 인간 유형의 마음 사이에 개입한다.
2025 196:3.25 도덕성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 조절자가 안에 계심을 몸소 깨닫는 데 필수인 선재(先在)하는 토양이지만, 그러한 도덕성은 종교적 체험과 그 결과로 생기는 영적 통찰력의 근원이 아니다. 도덕적 성품은 동물을 뛰어 넘지만 영 밑에 있다. 도덕성은 의무를 인식하는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존재함을 깨닫는 것과 같다. 인격이 달성하는 물질 분야와 영적 분야 사이에 상물질이 작용하는 것 같이, 도덕의 구역은 동물 지성과 인간 종류의 지성 사이에 끼어 있다.
1955 196:3.26 The evolutionary mind is able to discover law, morals, and ethics; but the bestowed spirit, the indwelling Adjuster, reveals to the evolving human mind the lawgiver, the Father-source of all that is true, beautiful, and good; and such an illuminated man has a religion and is spiritually equipped to begin the long and adventurous search for God.
2000 196:3.26 진화하는 지성(知性)은 법칙ㆍ도덕률ㆍ윤리를 발견할 수 있지만, 수여된 영, 깃드는 조절자는 점진하는 인간 지성에게 입법자,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의 아버지 근원을 드러낸다. 그렇게 빛을 받은 사람은 종교를 소유하며, 하나님을 찾으려는, 길고 모험이 가득한 탐구를 시작하기 위하여 영적 장비가 갖추어져 있다.
2001 CM 196:3.26 진화하는 정신은, 법과 도덕과 윤리를 발견할 수 있지만;내주하는 섭리사라는 증여된 영은, 입법자{立法者}, 즉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의 근원이신-아버지를 진화하는 인간 정신에게 드러내며;그렇게 빛을 받은 사람은 종교를 소유하고, 하나님을 향해 길고 모험적인 추구를 시작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무장된다.
2007 URKA 196:3.26 진화하는 마음은 법과 도덕과 윤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증여된 영, 내주하는 조절자는 진화하는 인간 마음에게 입법자, 진실되고,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의 아버지-근원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러한 계몽된 사람은 종교를 가진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길고도 모험적인 추구를 시작하도록 영적으로 장비가 갖추어져 있다.
2025 196:3.26 진화하는 지성(知性)은 법칙ㆍ도덕률ㆍ윤리를 발견할 수 있지만, 수여된 영, 깃드는 조절자는 점진하는 인간 지성에게 입법자,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의 아버지 근원을 드러낸다. 그렇게 빛을 받은 사람은 종교를 소유하며, 하나님을 찾으려는, 길고 모험이 가득한 탐구를 시작하기 위하여 영적 장비가 갖추어져 있다.
1955 196:3.27 Morality is not necessarily spiritual; it may be wholly and purely human, albeit real religion enhances all moral values, makes them more meaningful. Morality without religion fails to reveal ultimate goodness, and it also fails to provide for the survival of even its own moral values. Religion provides for the enhancement, glorification, and assured survival of everything morality recognizes and approves.
2000 196:3.27 도덕성은 반드시 영적인 것이 아니지만, 전적으로, 순전히 인간다울지 모른다. 하지만 참된 종교는 모든 도덕적 가치를 높이고 더욱 뜻있게 만든다. 종교가 없는 도덕은 궁극의 선을 드러내지 못하며, 또한 그 자체의 도덕적 가치조차 살아남지 못하게 한다. 종교는 도덕이 인식하고 승인하는 모든 것을 강화하고 영화롭게 만들고, 확실히 살아남게 만든다.
2001 CM 196:3.27 도덕성은 반드시 영적일 필요는 없으며;진정한 종교가 모든 도덕적 가치관을 증진시키고 좀 더 의미 있게 만들지라도, 전적으로 순전히 인간적일지도 모른다. 종교가 없는 도덕성은 궁극적 선을 나타내지 못하고, 또한 그 자체의 도덕적 가치관을 존속시키지도 못한다. 종교는, 인식되고 인정된 모든 도덕성을 향상시키고, 영화롭게 하고, 확실히 생존하도록 준비시킨다.
2007 URKA 196:3.27 도덕은 영적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아마도 전적으로 순전히 인간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종교는 모든 도덕적 가치들을 높이고 그들을 좀더 의미 있게 만든다. 종교가 없는 도덕은 궁극적 선을 나타내는데 실패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그 자체의 도덕적 가치들의 생존을 준비하는데도 실패한다. 종교는 도덕이 인식하고 인정한 모든 것의 향상, 찬미, 그리고 확실한 생존을 제공한다.
2025 196:3.27 도덕성은 반드시 영적인 것이 아니지만, 전적으로, 순전히 인간다울지 모른다. 하지만 참된 종교는 모든 도덕적 가치를 높이고 더욱 뜻있게 만든다. 종교가 없는 도덕은 궁극의 선을 드러내지 못하며, 또한 그 자체의 도덕적 가치조차 살아남지 못하게 한다. 종교는 도덕이 인식하고 승인하는 모든 것을 강화하고 영화롭게 만들고, 확실히 살아남게 만든다.
1955 196:3.28 Religion stands above science, art, philosophy, ethics, and morals, but not independent of them. They are all indissolubly interrelated in human experience, personal and social. Religion is man’s supreme experience in the mortal nature, but finite language makes it forever impossible for theology ever adequately to depict real religious experience.
2000 196:3.28 종교는 과학ㆍ예술ㆍ철학ㆍ윤리ㆍ도덕률 위에 서 있지만, 이로부터 독립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모두 개인 및 사회적인, 인간의 체험 속에 떼어낼 수 없이 서로 얽혀 있다. 종교는 필사 성품을 입고서 사람이 맛보는 최고의 체험이지만, 언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영원히 신학(神學)이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 언제라도 적절히 묘사할 수 없게 만든다.
2001 CM 196:3.28 종교는, 과학, 예술, 철학, 윤리, 및 도덕보다 우위에 있으나, 그것들과 무관하지는 않다. 그것들은 모두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인간 체험에서 서로 확고하게 연관돼있다. 종교는, 사람이 필사자 본성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지만, 언어가 유한하기 때문에, 신학이 실제 종교 체험을 충분히 서술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2007 URKA 196:3.28 종교는 과학과 예술과 철학과 윤리와 도덕 위에 있지만, 그들과 무관하지는 않다. 그들은 모두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인간 체험 속에서 서로 확고하게 상호관계 되어있다. 종교는 필사자 본성 안에서 사람의 최극 체험이다, 그러나 유한한 언어는 신학이 실제 종교 체험을 적절하게 서술하는 것을 언제까지나 불가능하게 한다.
2025 196:3.28 종교는 과학ㆍ예술ㆍ철학ㆍ윤리ㆍ도덕률 위에 서 있지만, 이로부터 독립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모두 개인 및 사회적인, 인간의 체험 속에 떼어낼 수 없이 서로 얽혀 있다. 종교는 필사 성품을 입고서 사람이 맛보는 최고의 체험이지만, 언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영원히 신학(神學)이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 언제라도 적절히 묘사할 수 없게 만든다.
1955 196:3.29 Religious insight possesses the power of turning defeat into higher desires and new determinations. Love is the highest motivation which man may utilize in his universe ascent. But love, divested of truth, beauty, and goodness, is only a sentiment, a philosophic distortion, a psychic illusion, a spiritual deception. Love must always be redefined on successive levels of morontia and spirit progression.
2000 196:3.29 종교적 통찰력은 패배한 사람에게 더 높은 소망과 새 결심을 가지게 하는 힘을 소유한다. 사랑은 사람이 우주에서 올라가면서 이용해도 좋은 가장 높은 동기이다. 그러나 진리ㆍ아름다움ㆍ선이 빠져 버린 사랑은 기껏해야 감정, 철학적 왜곡, 정신의 환상, 영적 속임수일 뿐이다. 사랑은 반드시 상물질 및 영으로 진보하는 연속된 수준에서 다시 정의(定義)되어야 한다.
2001 CM 196:3.29 종교적 통찰력은, 실패를 더 높은 열망과 새로운 결단으로 바꾸는 힘을 갖고 있다. 사랑은, 사람이 우주에서 상승하는 동안에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동기다. 그러나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이 제외된 사랑은, 감상과 철학적 왜곡과 심령적 착각 그리고 영적 기만에 불과하다. 사랑은, 이어지는 모론시아 진행과정 및 영 진행과정 수준에서 항상 다시 정의돼야한다.
2007 URKA 196:3.29 종교적 통찰력은 패배를 더 높은 욕망과 새로운 결의로 전환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우주 상승 시에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동기이다. 그러나 진리(眞), 아름다움(美), 선(善)을 벗어 버린 사랑은 단지 하나의 정서이며, 철학적 왜곡, 심리적 착각, 영적 기만이다. 사랑은 모론시아와 영적 진보의 연속되는 차원들에서 항상 다시 정의(定意)되어야 한다.
2025 196:3.29 종교적 통찰력은 패배한 사람에게 더 높은 소망과 새 결심을 가지게 하는 힘을 소유한다. 사랑은 사람이 우주에서 올라가면서 이용해도 좋은 가장 높은 동기이다. 그러나 진실ㆍ아름다움ㆍ선이 빠져 버린 사랑은 기껏해야 감정, 철학적 왜곡, 정신의 환상, 영적 속임수일 뿐이다. 사랑은 반드시 상물질 및 영으로 진보하는 연속된 수준에서 다시 정의(定義)되어야 한다.
1955 196:3.30 Art results from man’s attempt to escape from the lack of beauty in his material environment; it is a gesture toward the morontia level. Science is man’s effort to solve the apparent riddles of the material universe. Philosophy is man’s attempt at the unification of human experience. Religion is man’s supreme gesture, his magnificent reach for final reality, his determination to find God and to be like him.
2000 196:3.30 예술은 사람이 물질 환경에서 아름다움이 없는 상태를 벗어나려고 애쓰는 결과로 생기며, 예술은 상물질 수준을 향하는 손짓이다. 과학은 사람이 물질 우주에서 수수께끼로 보이는 것을 풀려는 노력이다. 철학은 사람이 인간의 체험을 조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종교는 사람의 최고의 손짓이요, 최종의 실체를 향하여 장엄하게 손을 뻗는 것, 하나님을 찾아내고 그와 같이 되려는 결심이다.
2001 CM 196:3.30 예술은, 사람이 물질 환경에서 아름다움이 없는 상태를 탈피하려고 애쓴 결과이며;모론시아 수준으로 향하는 행위다. 과학은,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물질 우주의 문제를 풀기위한 사람의 노력이다. 철학은, 인간의 체험을 통합하려는 사람의 시도다. 종교는, 사람의 지고한 행위요, 최종 실체를 향해 손을 뻗음이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닮으려는 결단이다.
2007 URKA 196:3.30 예술은 사람이 물질적 환경 속에서 미(美)의 결핍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시도의 결과이다; 그것은 모론시아 차원으로 향한 몸짓이다. 과학은 물질적 우주의 명백한 수수께끼들을 풀려는 사람의 노력이다. 철학은 인간의 체험을 통일하려는 사람의 시도이다. 종교는 사람의 최극 몸짓, 최종의 실체를 향한 그의 장엄한 기지개,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와 같이 되려는 그의 결심이다.
2025 196:3.30 예술은 사람이 물질 환경에서 아름다움이 없는 상태를 벗어나려고 애쓰는 결과로 생기며, 예술은 상물질 수준을 향하는 손짓이다. 과학은 사람이 물질 우주에서 수수께끼로 보이는 것을 풀려는 노력이다. 철학은 사람이 인간의 체험을 조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종교는 사람의 최고의 손짓이요, 최종의 실체를 향하여 장엄하게 손을 뻗는 것, 하나님을 찾아내고 그와 같이 되려는 결심이다.
1955 196:3.31 In the realm of religious experience, spiritual possibility is potential reality. Man’s forward spiritual urge is not a psychic illusion. All of man’s universe romancing may not be fact, but much, very much, is truth.
2000 196:3.31 종교적 체험 분야에서, 영적 가능성은 잠재하는 현실이다. 앞을 향한 사람의 영적 욕구는 정신의 환상이 아니다. 사람이 우주에서 꿈꾸는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닐지 모르지만, 많은 것, 허다한 것이 진리이다.
2001 CM 196:3.31 종교 체험 영역에서는 영적 가능성이 잠재적 실체다. 사람의 표면화된 영적 충동은 심령의 착각이 아니다. 사람이 우주를 낭만적으로 과장한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닐지 모르지만, 많은, 아주 많은 것이 진리다.
2007 URKA 196:3.31 종교 체험의 영역에서는 영적 가능성이 잠재적 실체이다. 사람의 앞으로 나아가는 영적 충동은 심리적 환상이 아니다. 우주 낭만에 젖는 사람의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러나 많은 것이, 참으로 많은 것이 진리이다
2025 196:3.31 종교적 체험 분야에서, 영적 가능성은 잠재하는 현실이다. 앞을 향한 사람의 영적 욕구는 정신의 환상이 아니다. 사람이 우주에서 꿈꾸는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닐지 모르지만, 많은 것, 허다한 것이 진실이다.
1955 196:3.32 Some men’s lives are too great and noble to descend to the low level of being merely successful. The animal must adapt itself to the environment, but the religious man transcends his environment and in this way escapes the limitations of the present material world through this insight of divine love. This concept of love generates in the soul of man that superanimal effort to find truth, beauty, and goodness; and when he does find them, he is glorified in their embrace; he is consumed with the desire to live them, to do righteousness.
2000 196:3.32 어떤 사람들의 인생(人生)은 너무 위대하고 고귀해서, 단지 성공적인 낮은 수준으로 내려올 수 없다. 동물은 환경에 적응해야 하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환경을 뛰어넘고, 이 방법으로 이 신의 사랑을 보는 통찰력을 통해서, 현재 물질 세계의 한계를 벗어난다. 이 사랑 개념은 사람의 혼 속에서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발견하려는, 동물을 뛰어넘는 노력이 생기게 만든다.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찾아낼 때, 사람은 그 품에 안겨 영화롭게 된다. 사람은 이를 실천하고, 정의(正義)를 실행하려는 소망으로 불탄다.
2001 CM 196:3.32 일부 사람의 삶은 너무 위대하고 고상해서, 단순히 성공적인 낮은 수준으로 내려오지 못한다. 동물은 환경에 잘 적응해야하지만, 종교인은 자신의 환경을 초월하고, 이렇게 하여 신의 사랑에 대한 통찰력을 통해서 현재의 물질 세상의 한계를 벗어난다.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을 추구하는, 동물을 뛰어넘는 노력을, 이런 사랑 개념이 사람의 혼에 발생시키며;이것들을 발견하게 되면, 사람은 그 품속에서 영화롭게 되며;이것들을 실천하려는, 정의를 행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2007 URKA 196:3.32 어떤 사람들의 삶은 단지 성공적이었다는 낮은 차원으로 내리기에는, 너무나 위대하고 고상하다. 동물은 그 자신을 환경에 적응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은 그의 환경을 초월하고 그리고 이 방법으로 신성한 사랑의 이 통찰력을 통하여 현재의 물질적 세상의 한계들을 탈출한다. 이 사랑의 개념은 사람의 혼 속에서 진리(眞), 아름다움(美) 그리고 선(善)을 찾으려는 초(超)동물적 노력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가 그것들을 발견하면, 그는 그것들의 포옹 안에서 영광스럽게 된다; 그는 그들로 살아가려는, 정의(正義)를 행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2025 196:3.32 어떤 사람들의 인생(人生)은 너무 위대하고 고귀해서, 단지 성공적인 낮은 수준으로 내려올 수 없다. 동물은 환경에 적응해야 하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환경을 뛰어넘고, 이 방법으로 이 신의 사랑을 보는 통찰력을 통해서, 현재 물질 세계의 한계를 벗어난다. 이 사랑 개념은 사람의 혼 속에서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발견하려는, 동물을 뛰어넘는 노력이 생기게 만든다.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찾아낼 때, 사람은 그 품에 안겨 영화롭게 된다. 사람은 이를 실천하고, 정의(正義)를 실행하려는 소망으로 불탄다.
1955 196:3.33 Be not discouraged; human evolution is still in progress, and the revelation of God to the world, in and through Jesus, shall not fail.
2000 196:3.33 낙심하지 말지니, 인간의 진화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고, 예수 안에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주는 계시(啓示)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2001 CM 196:3.33 좌절하지 말라;인간의 진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서, 세상에게 주는 하나님의 계시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2007 URKA 196:3.33 좌절하지 말라; 인간의 진화는 아직도 진행 중에 있으며, 그리고,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2025 196:3.33 낙심하지 말지니, 인간의 진화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고, 예수 안에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주는 계시(啓示)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1955 196:3.34 The great challenge to modern man is to achieve better communication with the divine Monitor that dwells within the human mind. Man’s greatest adventure in the flesh consists in the well-balanced and sane effort to advance the borders of self-consciousness out through the dim realms of embryonic soul-consciousness in a wholehearted effort to reach the borderland of spirit-consciousness—contact with the divine presence. Such an experience constitutes God-consciousness, an experience mightily confirmative of the pre-existent truth of the religious experience of knowing God. Such spirit-consciousness is the equivalent of the knowledge of the actuality of sonship with God. Otherwise, the assurance of sonship is the experience of faith.
2000 196:3.34 현대인이 당면한 큰 도전은 인간의 지성 안에 거하는 신다운 훈계자와 의사 소통을 개선하는 것이다. 육체를 입고서 사람이 겪는 가장 큰 모험은 영 의식의 경계지에 이르려고―신성한 계심과 접촉하려고―마음을 다하여 노력을 기울이면서, 혼 의식이 태어나는 어둑한 영역을 거쳐서, 자의식(自意識) 테두리를 확장하려고, 치우치지 않고 정신 차려 노력하는 데 있다. 그러한 체험은 하나님 의식이요, 앞서 존재하는 진실, 곧 하나님을 이해하는 종교적 체험을 힘차게 확인하는 체험이다. 그러한 영 의식은 하나님의 아들임이 사실인 것을 아는 것과 대등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들이라는 확신은 믿음의 체험이다.
2001 CM 196:3.34 현대인에게 중대한 도전은, 인간 정신 속에 거하는 신성한 관찰자와 좀 더 나은 대화를 성취하는 것이다. 육신 속에서 사람의 가장 큰 모험은, 영-의식의 가장자리에 도달하려고--곧 신성한 현존과 접촉하려고-- 전심으로 노력을 기울이면서, 혼-의식이 태어나는 희미한 영역을 거쳐서, 자아-의식 테두리를 밖으로 확장시키려고, 균형-잡히도록 노력하고 건전하게 노력하는 데 있다. 그런 체험은 하나님을-인식함, 즉 하나님을 알아가는 종교 체험이라는 선재{先在}하는 진리를 강력하게 확증하는 체험이다. 그런 영-의식은, 하나님의 아들신분이 실제임을 아는 것과 대등하다. 달리 말하면, 아들신분을 확신하는 것이 신앙의 체험이다.
2007 URKA 196:3.34 현대인에게 가장 큰 도전이 되는 것은 인간 마음속에 거하는 신성한 관찰자와 좀더 나은 교제를 이룩하는 것이다. 육신에서의 사람의 가장 큰 모험은, 영-의식─신성한 현존과의 접촉─의 경계점에 도달하려는 전심의 노력으로 싹트고 있는 혼-의식의 희미한 영역을 통과하여 자아-의식의 경계들을 전진시키려는 균형이 잘 잡히고 정신이 올바른 노력 속에 있다. 그러한 체험은 하느님-의식, 하느님을 아는 종교적 체험의 선재하는 진리에 대해 강력하게 확인하는 체험을 구성한다. 그러한 영-의식은 하느님과 아들관계의 실재성에 대한 지식과 동등하다. 그러한 것이 아니라면, 아들관계의 확신은 신앙의 체험이다.
2025 196:3.34 현대인이 당면한 큰 도전은 인간의 지성 안에 거하는 신다운 훈계자와 의사 소통을 개선하는 것이다. 육체를 입고서 사람이 겪는 가장 큰 모험은 영 의식의 경계지에 이르려고 ― 신성한 계심과 접촉하려고 ― 마음을 다하여 노력을 기울이면서, 혼 의식이 태어나는 어둑한 영역을 거쳐서, 자의식(自意識) 테두리를 확장하려고, 치우치지 않고 정신 차려 노력하는 데 있다. 그러한 체험은 하나님 의식이요, 앞서 존재하는 진실, 곧 하나님을 이해하는 종교적 체험을 힘차게 확인하는 체험이다. 그러한 영 의식은 하나님의 아들임이 사실인 것을 아는 것과 대등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들이라는 확신은 믿음의 체험이다.
1955 196:3.35 And God-consciousness is equivalent to the integration of the self with the universe, and on its highest levels of spiritual reality. Only the spirit content of any value is imperishable. Even that which is true, beautiful, and good may not perish in human experience. If man does not choose to survive, then does the surviving Adjuster conserve those realities born of love and nurtured in service. And all these things are a part of the Universal Father. The Father is living love, and this life of the Father is in his Sons. And the spirit of the Father is in his Sons’ sons—mortal men. When all is said and done, the Father idea is still the highest human concept of God.
2000 196:3.35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은 자아(自我)를 우주와 함께, 그리고 우주의 가장 높은 수준의 영적 실체와 통합되는 것과 대등하다. 어떤 가치라도 오직 그 영적 알맹이만 썩지 않는다.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도 인간의 체험에서 썩지 않을지 모른다. 사람이 살아남기를 택하지 않는다면, 그때 뒤에 남는 조절자는 사랑으로 태어나고 봉사하면서 양육된 그 실체들을 보존한다. 이 모두가 우주의 아버지의 일부이다. 아버지는 살아 있는 사랑이요, 아버지의 이 생명은 그 아들들 안에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은 아들들의 아들―필사 인간―안에 계신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대, 아버지 관념은 여전히 인간의 가장 높은 하나님 개념이다.
2001 CM 196:3.35 하나님을-인식함은, 자아를 우주와 통합하고 가장 높은 수준에서 영적 실체와 통합하는 것에 상당한다. 어떤 가치든지, 오직 그 영적 내용만 불멸한다.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이라도, 인간의 체험에서만 불멸할지도 모른다. 사람이 생존하기를 선택하지 않으면, 사랑으로 인해 탄생되고 봉사하면서 양육된 그런 실체를, 잔존하는 섭리사가 보존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주 아버지의 일부분이다. 아버지는 살아있는 사랑이시며, 아버지의 이 생명이 그 아들들 안에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이 그 아들들의 아들들--곧 필사적 사람들-- 안에 있다. 모든 것이 다 설명되고 완료된 지금, 하나님에 대한 인간 개념 중에서 아버지 관념이 여전히 가장 높은 개념이다.
2007 URKA 196:3.35 그리고 하느님을-의식함은 자아가 우주와 함께, 그리고 영적 실체의 가장 높은 차원에서 집대성활동을 이루는 것과 동등하다. 그 어떤 가치에서도 영 내용만은 사멸될 수 없다. 인간의 체험에서도 참되고, 아름답고, 그리고 선한 것은 사멸되지 않을 수있다. 만약에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생존하는 조절자가 사랑으로 태어나고 봉사 안에서 양육된 그 실체들을 보존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주 아버지의 일부분이다. 아버지는 살아있는 사랑이며, 아버지의 이 생명은 그의 아들들 안에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은 그의 아들의 아들들─필사 사람들─안에 있다. 모든 것이 다 설명되고 완료된 지금, 아버지 관념은 여전히 하느님에 대한 가장 높은 인간의 개념이다.
2025 196:3.35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은 자아(自我)를 우주와 함께, 그리고 우주의 가장 높은 수준의 영적 실체와 통합되는 것과 대등하다. 어떤 가치라도 오직 그 영적 알맹이만 썩지 않는다.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도 인간의 체험에서 썩지 않을지 모른다. 사람이 살아남기를 택하지 않는다면, 그때 뒤에 남는 조절자는 사랑으로 태어나고 봉사하면서 양육된 그 실체들을 보존한다. 이 모두가 우주의 아버지의 일부이다. 아버지는 살아 있는 사랑이요, 아버지의 이 생명은 그 아들들 안에 있다[31]. 그리고 아버지의 영은 아들들의 아들 ― 필사 인간 ― 안에 계신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대, 아버지 관념은 여전히 인간의 가장 높은 하나님 개념이다.